누구든 떠나갈 때는/류시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류시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고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이방인 회개 2022.06.05
십자가의 길/김귀녀 십자가의 길/김귀녀 황사가 담벽을 돌아가는 작은 어촌 앞마당 대나무에 꽂힌 채 깃발로 변한 오징어 골고다 십자가 주님의 아픔을 닮았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보고 읽고 들어도 욕심의 저울 위에 올리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부족한 믿음 넓은 길 걸어가는 죄인임을 고백하며 욕심에 젖은 입술 깨물어 본다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늘 쫓기는 듯한 마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던 그분을 떠올리며 어촌 앞마당 대나무에 꽂힌 오징어처럼 십자가의 길 침묵으로 걷고 싶다 이방인 회개 2022.04.09
그 분이 홀로서 가듯/구상 그 분이 홀로서 가듯/구상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이방인 회개 2022.04.05
부활절에/김현승 부활절에 /김현승 당신의 핏자국에선 꽃이 피어 - 사랑이 피어 땅 끝에서 땅 끝에서 당신의 못자국은 우리에게 열매 맺게 합니다. 당신은 지금 무덤 밖 온 천하에 계십니다 - 두루 계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로마를 정복하지 않았으나 당신은 그 손의 피로 로마를 붙들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유태인의 옛 수의를 벗고 모든 4월의 관에서 나오십니다. 모든 나라가 지금은 이것을 믿습니다. 증거로는 증거할 수 없는 곳에 모든 나라의 합창은 우렁차게 울려납니다. 해마다 3월과 4월 사이의 훈훈한 땅들은, 밀알 하나가 썩어서 다시 사는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파릇한 새 목숨의 순으로... 이방인 회개 2022.03.31
음악/샤를 보들레르 음악 음악은 때때로 바다처럼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출발한다 창백한 별을 향해 자욱한 안개 밑으로 때로는 끝없는 창공 속으로 돛대처럼 부푼 가슴 앞으로 내밀고 밤에 묻혀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나는 탄다 나는 느낀다 신음하는 배의 온갖 정열이 진동함을 순풍과 폭우, 그리고 그 진동이 나를 흔든다 광막한 바다 위에서 음악은 때로는 고요한 바다 내 절망의 거대한 거울 (보들레르·프랑스 시인, 1821-1867) 프랑스 시인 "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 이방인 회개 2022.03.12
부표/권여원 사진플루토(kjcb1234)님 부표 / 권여원 수면에 떠있는 내 싱싱함은 당신이 들어 올린 쉼표, 떠미는 것은 수평선이 아닌 시간의 기울기였어 물안개를 몰고 다니는 당신의 흐름 속에 빠져들었지 열길 물속, 뿌리는 없지만 심증은 늘 출렁거렸어 파도를 끌어와 어둠을 깔고 누우면 내 깃발은 둘레 밖을 넘볼 수 없었지 텅 빈 가슴으로 떠오르지만 가벼운 게 흠이야 붉은 입술을 삼키는 파도에게서 바람을 벗기는 소리가 나, 아직까지 목선 밑이 말라본 적 없지만 나 언제쯤 온 몸을 당신에게 담글 수 있을까 꼭짓점을 향해 넘나드는 비릿한 스침, 그날의 살 냄새로 부풀어진 허파는 아직도 혼자 흐르고 있어 물살의 등에 기대어 저녁을 견디다 보면 달 한 점도 밤하늘의 계절이 될까 별들이 달의 부표를 향해 밀려오고 있어 이 바.. 이방인 회개 2022.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