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회개 349

박노해 시인의 결氣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지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이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

이방인 회개 2024.02.16

소리의 집/길상호

소리의 집/길상호 ​ 그 집은 소리를 키우는 집, 늑골의 대문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마루에 할머니 혼자 나물을 다듬거나 바람과 함께 잠을 자는 집 그 가벼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삐이걱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오는 집, 단단하게 박혀 있던 못 몇 개 빠져나가고 헐거워진 허공이 부딪히며 만드는 소리, 사람의 세월도 오래되면 소리가 된다는 듯 할머니 무릎에서 어깨 가슴팍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들, 아팠던 곳이 삭고 삭아서 만들어낸 관악기의 구멍을 통해 이어지는 가락들, 나의 짧은 생으로는 꾸밀 수 없는 그 소리 듣고 있으면 내가 키워온 옹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바람 드나들며 나 또한 소리 될 것 같은데 더 기다려야 한다고 틈이 생긴 마음에 촘촘히 못질하고 있는 집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

이방인 회개 2024.02.13

반성의 기도/윌리암 쿠퍼

윌리엄 쿠퍼(1731∼1800)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났던 날 받은 축복은 지금 어디에? 내 심령을 새롭게 하는 예수님과 그 말씀은 지금 어디에? 그 즐겁고 평화롭던 시간이여 그 달콤했던 기억이여, 그것들이 다 떠나고 남은 공허를 세상은 결코 채우지 못하리. 돌아오라, 성령의 비둘기여, 돌아오라, 달콤한 평화의 천사여, 주님을 슬프게 하고 내 가슴에서 떠나게 하는 죄를 미워하노라.

이방인 회개 2024.02.08

연서/김초양[신앙시 공모 당선작-우수작]

연서/김초양 하얀 눈발이 냉쾌冷快하게 날리는 깊은 밤입니다 연연戀戀한 아픔으로 기어코 상심의 붓을 들었습니다 미명의 새벽마다 당신을 향한 발걸음 통회하는 내면의 이슬 묻은 고백에 왜 잠잠히 계시는지요? 당신에 대한 열망과 충만으로 절규하면서 공막空漠이 나의 전의식을 휩싸고 있습니다 당신의 호흡에 영혼은 젖어들었고 육신의 세포는 살아 뛰었습니다 내 영혼을 성형하고 영골靈骨을 교정시키시고 세상에서 나를 분재시킨 임이시여! 당신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머무시는데 나 혼자만 늘- 허기진 외로움에 갈증을 느낍니다 당신에 대한 충실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슬픔과 고통에도 은총이 깃든다고 하였으니 관념의 행로에서 돌아보아 주십시오 사흘 밤 사흘 낮 철철 눈물 쏟던 막달라처럼 소녀도 그렇게, 그렇게 울게 하여 주십시오 선혈..

이방인 회개 2024.01.30

마지막 손님이 올 때/이해인

마지막 손님이 올 때/이해인 올해도 많은 이들이 저희 곁을 떠났습니다. 주님 눈물의 샘이 마를 겨를도 없이 저희는 또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떠난 이들의 쓸쓸한 기침 소리가 미루어둔 기도를 재촉하곤 합니다 어느 날 문득 예고 없이 찾아올 손님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아직 살아 있는 저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헤아려 볼뿐입니다. 그 낯선 얼굴의 마지막 손님을 진정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을까요?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가 상상보다는 어렵더라는 어느 임종자의 고백을 다시 기억하며 저희 모두 지상에서의 남은 날들을 겸허하고 성실한 기도로 채워가게 하소서 하루에 꼭 한번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화해와 용서를 먼저 청하는 사랑의 사람으로 깨어 있게 하소서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인 듯이 생각하..

이방인 회개 2024.01.24

강물과 나는/나태주

강물과 나는 /나태주 맑은 날 강가에 나아가 바가지로 강물에 비친 하늘 한 자락 떠올렸습니다 물고기 몇 마리 흰구름 한 송이 새소리도 몇 움큼 건져 올렸습니다 한참동안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믿음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을 기르다가 공연스레 죽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나는 걸음을 돌려 다시 강가로 나아가 그것들을 강물에 풀어 넣었습니다 물고기와 흰구름과 새소리 모두 강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날부터 강물과 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방인 회개 2024.01.17

가난한 사랑 노래/신경림

1980년대의 한 노동자, 이웃의 가난한 한 젊은이가 절규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두려움을, 그리움을, 아, 나의 사랑을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그가 제 마음에 못을 박을 때, 어둠이 가장 깊어져 불빛이 커지듯 이 가난한 젊은이의 외로움, 두려움, 그리움, 그리고 사랑의 감정은 절정에 도달한다. 돌아서는 나의 등 뒤에서 터지는 네 울음소리를 들으며 사랑은 격렬해진다. 이 뜨거운 사랑은 가난을 운명론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의문 속에서 깨어나게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이 땅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이 나라의 노동자는 왜 이토록 절망적으로 가난한가. 에로스는 가장 깊은 곳에서 발동하는 에너지..

이방인 회개 2023.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