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회개 363

연두의 내부/김선우

연두의 내부                           김선우  막 해동된 핏방울들의부산한 발소리를 상상한다이른 봄 막 태어나는 연두의 기미를 살피는 일은지렁이 울음을 듣는 일, 비슷할 거라고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운다고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웃는다고도최선을 다해 죽는다거나최선을 다해 이별한다거나최선을 다해 남는다거나최선을 다해 떠난다거나 최선을 다해 광합성하고 싶은꼼지락거리는 저 기척이빗방울 하나하나 닦아주는 일처럼무량하다 무구하다 바닥이 낮아진다 아마도 사랑의 일처럼  시인 김선우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이방인 회개 2025.03.04

한해를 돌아보는 길위에서 / 이해인

한해를 돌아보는 길위에서 / 이해인  우리가 가장 믿어야 할 이들의무책임과 불성실과 끝없는 욕심으로집이 무너지고마음마저 부너져 슬펐던 한 해희망을 키우지 못 해더욱 괴로웠던 한 해였습니다 마지막 잎새 한 장 달려 있는창 밖의 겨울나무를 바라보듯한 해의 마지막 달인12월의 달력을 바라보는 제 마음엔초조하고 불안한 그림자가 덮쳐옵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은 실천했나요?사랑과 기도의 삶은 뿌리를 내렸나요?사를 잊고 살진 않았나요? 달력 위의 숫자들이 눈을 크게 뜨고담담히 던져 오는 물음에선뜻 대답을 못해 망설이는 저를누구보다 잘알고 계시는 주님하루의 끝과 한 해의 끝이 되면더욱 크게 드러나는저의 허물과 약점을 받아들이고반복되는 실수를후회하는 일도이젠 부끄럽다 못해 슬퍼만지는저의 마음도 헤아려 주십니까? 정성과 ..

이방인 회개 2024.12.26

마지막 손님이 올 때/이해인

마지막 손님이 올 때/이해인올해도 많은 이들이저희 곁을 떠났습니다. 주님눈물의 샘이 마를 겨를도 없이저희는 또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떠난 이들의 쓸쓸한 기침 소리가미루어둔 기도를 재촉하곤 합니다어느 날 문득예고 없이 찾아올 손님인 죽음을어떻게 맞이해야 할지아직 살아 있는 저희는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헤아려 볼뿐입니다.그 낯선 얼굴의 마지막 손님을진정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을까요?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가상상보다는 어렵더라는어느 임종자의 고백을 다시 기억하며저희 모두 지상에서의 남은 날들을겸허하고 성실한 기도로 채워가게 하소서하루에 꼭 한번은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화해와 용서를 먼저 청하는사랑의 사람으로 깨어 있게 하소서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인 듯이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혜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

이방인 회개 2024.11.24

붉은 잎/류시화

붉은 잎 / 류시화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을그 다음 날이 왔고그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붉은 잎들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직여가고또 갑자기 멈춘다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 없는 넓은 강물들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은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이 붉은 잎, 붉은 잎들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 잎들바람도 자고 물도 맑은 날에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 당기는 곳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그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그것들을 겨울 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이방인 회개 2024.11.21

아침 기도 /유안진

아침 기도 /유안진  아침마다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어제처럼 빕니다.살아봐도 별수없는 세상일지라도무책이 상책인 세상일지라도아주 등 돌리지 않고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그래서 더러 용서도 빌어가며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 가며신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늘 용서 구할 꺼리를 가진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여 있어늘 미안한 자격 미달자로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오늘 하루도…….

이방인 회개 2024.08.08

이방인/장혜령

이방인/장혜령     빛은 잘 들어옵니까 이상하지.세입자가 관리인에게, 그리고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불 꺼진 독방의 내부는누군가 두고 간불펜 잉크처럼 캄캄하다는 거,의도 없이도 흐른다는 거 처음 타본 비행기와어깨가 기울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의 휘파람을존경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크고 두터운 손으로, 아버지처럼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바람은 불어옵니까 진주식당의 여자는 국수 대신빨래를 솥에 넣었고 예수기도회의 붉은 자전거 옆에는북경반점 오토바이가 모든 질문에전학생의 시점으로생각했지 경도와 위도 선상에서초조해질 때마다별들 사이에 있다는 건, 더 확고해졌으니까 동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삼키는 연습을 하는수배자처럼 배후가 없는 비밀이 몸속을 떠돌고깡통 속엔씹다 뱉은 성냥들이붉게 차오르..

이방인 회개 2024.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