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회개 365

이방인/장혜령

이방인/장혜령     빛은 잘 들어옵니까 이상하지.세입자가 관리인에게, 그리고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불 꺼진 독방의 내부는누군가 두고 간불펜 잉크처럼 캄캄하다는 거,의도 없이도 흐른다는 거 처음 타본 비행기와어깨가 기울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의 휘파람을존경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크고 두터운 손으로, 아버지처럼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바람은 불어옵니까 진주식당의 여자는 국수 대신빨래를 솥에 넣었고 예수기도회의 붉은 자전거 옆에는북경반점 오토바이가 모든 질문에전학생의 시점으로생각했지 경도와 위도 선상에서초조해질 때마다별들 사이에 있다는 건, 더 확고해졌으니까 동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삼키는 연습을 하는수배자처럼 배후가 없는 비밀이 몸속을 떠돌고깡통 속엔씹다 뱉은 성냥들이붉게 차오르..

이방인 회개 2024.07.26

이제 와 우리 죽을 때에/박노해

이제 와 우리 죽을 때에/박노해   하나님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제 남은 길이 아무리 참혹해도다 받아들이고 그 길을 따를 테니제가 죽을 때 웃고 죽게만 해 주세요.다른 거는 하나도 안 바랄게요.그때가 언제라도 좋으니"저, 잘 놀다갑니다."맑은 웃음으로 떠나게만 해 주셔요.저도 제 사랑하는 이들께삶의 겉돌기나 하는 약속 따윈 하지 않을게요.오직 한가지만 다짐할게요.우리 죽을 때 환한 웃음 지으며 떠나가자고"고마웠습니다. 저 잘 놀다갑니다"그렇게 남은 하루하루 남김없이 불살라가자고.

이방인 회개 2024.07.21

6월/오세영

6월  바람은 꽃향기의 길이고꽃향기는 그리움의 길인데내겐 길이 없습니다.밤꽃이 저렇게 무시로 향기를 쏟는 날,나는 숲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님의 체취에그만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입니다.강물은 꽃잎의 길이고꽃잎은 기다림의 길인데내겐 길이 없습니다.개구리가 저렇게푸른 울음 우는 밤,나는 들녘에서 길을 잃었습니다.님의 말씀에그만 정신이 황홀해졌기 때문입니다.숲은 숲더러 길이라 하고들은 들더러 길이라는데눈먼 나는 아아,어디로 가야 하나요.녹음도 지치면 타오르는 불길인 것을,숨막힐 듯, 숨막힐 듯 푸른 연기 헤치고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강물은 강물로 흐르는데바람은 바람으로 흐르는데...(오세영·시인, 1942-)

이방인 회개 2024.06.05

박노해 시인의 결氣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지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이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

이방인 회개 2024.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