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회개 349

가까워서 머나먼/유안진

​ ​ ​ 가까워서 머나먼 / 유안진 ​ ​ 번번이 내리고 싶었던 정거장이었다 반드시 내려야 할 것 같은 그런 역이었다 내려서 손차양 얹고 바라다보면 뭔가 모를 뭔가가 알아질 성싶어서 타이르다 강요하는 정거장을 지나칠 때마다 멀리는 고사하고 더 가깝게 보려고 돋보기를 끼다 마주치는 낯익은, 낯선 숙적의 무리 에워싼 인민재판장에서 팔뚝춤과 삿대질로 질타하는 조목조목의 목록에서 빠진 사항까지 보태주고 싶어지고 그러느라 더 멀리 지나와 아닌 역에 내려서면 되돌아가 빌고 싶어지는 머나머언 가까워서 한번도 못 내린 머나머언 망원역(望源驛) ​ 신(神)이 계신 그곳이 서울에도 있다면, 필시 망원역에 내려야만 찾아갈 수 있을 거라 ​ - 유안진 시집 2004 ​ ​

이방인 회개 2023.10.12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 이향아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 이향아 이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나를 아직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 보다 용서할 수 없음에 뜬눈의 밤이 길고 나처럼 일어나서 불을 켜는 사람이 있나 보다 즐펀히 젖어 있는 창문께로 가서 목늘여 달빛을 들여마시면 태기처럼 퍼지는 가까운 기별 나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 보다 용서받지 못할 일을 내가 저질렀나 보다 그의 눈물 때문에 온종일 날이 궂고 바람은 헝클어진 산발로 우나 보다 그래서 사시철 내 마음이 춥고 바람결 소식에도 귀가 시린가 보다 *

이방인 회개 2023.06.23

노숙/김사인

노숙/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이방인 회개 2023.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