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회개 349

참회록/윤동주

윤동주가 창시개명을 하기 닷새 전에 지은 시이다.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 반성과 성찰 등이 주제로 시를 읽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슬퍼지는 시이다. 이 시의 주제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동반한 끊임없는 자아 성찰이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는 구절은 바로 이러한 자아 성찰의 자세가 극명히 나타난 것으로, 온몸을 바쳐 자신을 꾸준히 되돌아보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게 하여 절망과 암흑의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화자는, 마침내 욕된 역사에 대한 책임 의식과 철저한 자기 참회의 실존적 자아 성찰을 통해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삶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방인 회개 2023.03.18

목련/김경주

(20)김경주-비정형의 사유를 연주하다 2007.06.01 15:58 시인 김경주는 전천후다. 목련의 처연한 죽음(‘목련’)과 헤겔의 ‘정신현상학’(‘정신현상학에 부쳐’)을 똑같은 톤으로 노래하고, 시나리오와 희곡과 장시(長詩)의 경계를 무람없이 오간다. 서정에 능한 가객인가 싶다가도 다시 보면 이렇게 치열한 사색가가 또 없다. 이 무모하리 만큼 완강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는 “외로운 날에는 살을 만진다”(‘내 워크맨 속의 갠지스’)라고 적었다. 이 시인은 저 자신의 살에서 우주의 기미(幾微)를 엿보고 영혼의 음악을 듣는다. 이 ‘살’(감각)의 직접성과 확실성이 그의 위력이다. 그는 시를 쓰지 않는다. 감각으로 시를 밀어붙인다. ‘나쁜 피’와 ‘취한 배’의 시인 랭보의 혈족이다. 일러스트 / 김..

이방인 회개 2023.03.14

삼월의 시/김현승

삼월의 시/김현승 내가 나의 모국어로 삼월의 시를 쓰면 이 달의 어린 새들은 가지에서 노래하리라, 아름다운 미래와 같이 알 수 없는 저들의 이국어로. 겨우내 어버이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이제는 양지로 모인다, 그리고 저들이 닦는 구두 콧부리에서 삼월의 윤이 빛나기 시작한다! 도심엔 시청 지붕 위 비둘기들이 광장의 분수탑을 몇 차롄가 돌고선 플라타너스 마른 뿔 위에 무료히 앉는 삼월이기에 아직은 비어 있다. 그러나 0속에 모든 수의 신비가 묻혀 있듯, 우리들의 마음은 개구리의 숨통처럼 벌써부터 울먹인다. 울먹인다. 그러기에 지금 오랜 황금이 천리에 뻗쳐 묻혔기로 벙그는 가지 끝에 맺는 한 오라기의 빛만은 못하리라! 오오, 목숨이 눈뜨는 삼월이여 상자에 묻힌 진주를 바다에 내어주라, 이윽고 술과 같이..

이방인 회개 2023.03.02

비대칭으로 말하기/김은자

비대칭으로 말하기/김은자 울음에 슬픔이 어두워지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며칠씩 목이 마르고 괜찮다고, 이제 다 지나갔다고, 손을 맞잡은 생이 벽처럼 깊어가네 오늘 당신은 정적, 투명한 유리잔처럼 출렁이네 슬픔의 바깥쪽을 돌다가 한 뼘씩 순도 높은 궤도의 안쪽을 향해 안착하는 울어야 할 때 웃어버리는 당신 왼팔과 오른팔의 길이는 얼마쯤 다른가?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깨진 대칭은 누구의 계절인가? 한쪽 발로 무거운 추를 오래 끌고 다닌 듯 그늘이 다리를 저네 웃어야 할 때 울어버리는 당신 눈을 중심으로 낙타가 사막을 가로질러 가네 모래바람에 커다란 두 눈을 끔뻑거리며 슬픔을 끝도 없이 행진하네 그것마저 울어버리면 웃을 테지 쓸쓸히 울어버릴 테지 울음 밖을 머물던 통렬한 시詩도 눈 쌓인 골목을 떠..

이방인 회개 2022.11.12

밥값/정연복

밥값 /정연복 하늘은 가만히 있으면서도 제 할 일을 다합니다 산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 같아도 제 몫의 일을 합니다 물은 흘러가면서 자기의 본분을 다합니다 나무는 제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철 따라 무척 많은 일을 합니다 한 송이 꽃은 피고 지며 자기다운 일에 충실합니다. 나는 하루 세 끼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밥값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냥 밥만 축내며 엉터리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 들어 문득문득 내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이방인 회개 2022.10.07

연륜/박두진

연륜 / 박두진 소나무와 갈나무와 사시나무와 함께 나는 산다 억새와 칡덤불과 가시 사이에 서서 머언 떠나가는 구름을 손짓하며 뜻 없는 휘휘로운 바람에 불리우며 우로와 상설에도 그대로 헐벗고 창궁과 일월과 다만 머언 그 성신들을 우러르며 나는 자랐다 봄 가고 가을 가는 동안 뻐꾹새며 꾀꼬리며 접동새도 와서 울고 다람쥐며 산토끼며 사슴도 와 놀고 하나 아침에 뚜놀던 어린 사슴이 저녁에 이리에게 무찔림도 보곤 한다 때로 --- 초부의 날선 낫이 내 아끼는 가지를 찍어가고 푸른 도끼날이 내 옆에 나무에 와 번뜩인다 내가 이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날까지는 내 스스로 더욱 빛내야 할 나의 세기 푸른 가지는 위로 더욱 하늘을 받들어 올라가고 돌사닥 사이를 뿌리는 깊이 지심으로 지심으로 뻗으며 언..

이방인 회개 2022.10.02

범사에 감사하라(박얼서·시인, 1952-)

범사에 감사하라(박얼서·시인, 1952-) 안개에 갇혔을 땐 마음을 내려놓으란다. 속도 확 줄이고 가시거리 최대한 낮춘 채 숫눈길 찾아가듯 쉬엄쉬엄 길을 가란다. 신은 충고했었다 아침 은근히 감춰두고 안개 슬그머니 내어주면서 신은 충고했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경건함으로 새날을 새아침을 감사로 맞이하라고...

이방인 회개 2022.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