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회개 363

밥값/정연복

밥값 /정연복 하늘은 가만히 있으면서도 제 할 일을 다합니다 산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 같아도 제 몫의 일을 합니다 물은 흘러가면서 자기의 본분을 다합니다 나무는 제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철 따라 무척 많은 일을 합니다 한 송이 꽃은 피고 지며 자기다운 일에 충실합니다. 나는 하루 세 끼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밥값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냥 밥만 축내며 엉터리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 들어 문득문득 내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이방인 회개 2022.10.07

연륜/박두진

연륜 / 박두진 소나무와 갈나무와 사시나무와 함께 나는 산다 억새와 칡덤불과 가시 사이에 서서 머언 떠나가는 구름을 손짓하며 뜻 없는 휘휘로운 바람에 불리우며 우로와 상설에도 그대로 헐벗고 창궁과 일월과 다만 머언 그 성신들을 우러르며 나는 자랐다 봄 가고 가을 가는 동안 뻐꾹새며 꾀꼬리며 접동새도 와서 울고 다람쥐며 산토끼며 사슴도 와 놀고 하나 아침에 뚜놀던 어린 사슴이 저녁에 이리에게 무찔림도 보곤 한다 때로 --- 초부의 날선 낫이 내 아끼는 가지를 찍어가고 푸른 도끼날이 내 옆에 나무에 와 번뜩인다 내가 이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날까지는 내 스스로 더욱 빛내야 할 나의 세기 푸른 가지는 위로 더욱 하늘을 받들어 올라가고 돌사닥 사이를 뿌리는 깊이 지심으로 지심으로 뻗으며 언..

이방인 회개 2022.10.02

범사에 감사하라(박얼서·시인, 1952-)

범사에 감사하라(박얼서·시인, 1952-) 안개에 갇혔을 땐 마음을 내려놓으란다. 속도 확 줄이고 가시거리 최대한 낮춘 채 숫눈길 찾아가듯 쉬엄쉬엄 길을 가란다. 신은 충고했었다 아침 은근히 감춰두고 안개 슬그머니 내어주면서 신은 충고했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경건함으로 새날을 새아침을 감사로 맞이하라고...

이방인 회개 2022.09.29

저녁 기도/류시화

저녁기도/류시화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나는 기립근이 약해 잘 무너집니다 나를 붙잡아 주소서 나는 가시뿐 아니라 꽃에도 약합니다 외로움에도 약하고 그리움에도 약합니다 세상 속에 사는 것에도 약하고 세상을 등지는 것에도 약합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사랑에도 약하고 미움에도 뼈저리게 약합니다 말주변 없는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나는 저항하는 것에도 약하고 받아들이는 것에도 약합니다 축복에도 약하고 저주에도 약합니다 진실에도 거짓에도 약합니다 내 얼굴이 나에게 낯설지 않도록 생의 저녁 나와 함께하소서 내 심장은 혼자서도 이중창을 부릅니다 절망과 희망의, 용기와 두려움의 이부합창을 그러니 많은 해답을 가진 자를 멀리 하고 상처 입은 치유자와 걸어가게 하소서 나는 혼자인 것에도 약하고 함께인 것에도 약합니다 손을 내미는..

이방인 회개 2022.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