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산책 391

겨울에 그리는 수채화 / 오광수

♣ 겨울에 그리는 수채화 / 오광수 ♣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면당신의 곱고 하얀 마음을눈 속에서 찾지 못할까봐 걱정됩니다.온 세상이 더 하얗게 되면당신의 그 고운 마음씨들이하얀 꽃가루처럼 날아가서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숨어 버릴 테지요.개울물이 꽁꽁 얼어 버리면당신의 맑은 노래 소리를겨울 내내 듣지 못할까봐 걱정됩니다.온 세상이 더 반짝거리면당신의 그 맑은 노랫소리는퐁당 깊은 물속에 들어가서물고기들의 자장가로 변해 버릴 테지요.찬바람이 씽씽 불어버리면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하늘에서 볼 수 없을까봐 걱정됩니다.온 세상이 너무 추우면당신이 베푸는 따스함들이살금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어린이들의 말동무가 되어 있을 테지요.

서정산책 2025.01.12

겨울의 춤/곽재구

겨울의 춤/곽재구  첫눈이 오기 전에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튼을 걷어내고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낙엽 아래 작은 시냇물이 노래하듯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끌어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서정산책 2025.01.07

1월/오세영

1월/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꿈꾸는 짐승 같은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1월이 음악이라면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바람은 설레고1월이 말씀이라면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문득 들려 오는 그녀의 질책“아가 일어나거라벌서 해가 떴단다.” 아! 1월은침묵으로 맞이하는눈부신 함성

서정산책 2025.01.04

12월의 노래/이해인

12월의 노래/이해인 하얀 배추 속같이깨끗한 내음의 12월에우리는 월동 준비를 해요           단 한마디의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헛말을 많이 했던빈말을 많이 했던우리의 지난날을 잊어버려요때로는 마늘이 되고때로는 파가 되고때로는 생강이 되는사랑의 양념부서지지 않고는아무도 사랑할 수 없음을다시 기억해요함께 있을 날도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땅 속에 묻힌 김장독처럼자신을 통째로 묻고 서서하늘을 보아야 해요얼마쯤의 고독한 거리는항상 지켜야 해요한겨울 추위 속에제 맛이 드는 김치처럼우리의 사랑도 제 맛이 들게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이해인·수녀 시인, 1945-)

서정산책 2024.12.06

겨울의 춤/곽재구

겨울의 춤곽재구첫눈이 오기 전에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튼을 걷어내고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낙엽 아래 작은 시냇물이 노래하듯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끌어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첫눈이..

서정산책 2024.12.02

단풍 숲속을 가며 / 오세영

단풍 숲속을 가며 / 오세영 무어라 말씀하셨나돌아서 옆을 보면화들짝 붉히는 낯익은 얼굴무어라 말씀하셨나돌아서 뒤를 보면또 노오랗게 흘기는 그 고운 눈빛가을 산 어스름 숲속을 간다붉게 물든 단풍 속을 호올로 간다산은 산으로 말을 하고나무는 나무로 말하는데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하는귀머거리 하루해는설키만 하다찬 서리 내려산은 불현듯 침묵을 걷고화려하게 천자만홍 터뜨리는데무어라 말씀하셨나어느덧 하얗게 센 반백의귀머거리아직도 봄 꿈꾸는 반백의철딱서니

서정산책 2024.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