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산책 371

비의 손가락을 보다/마경덕

비의 손가락을 보다 마경덕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선명한 빗줄기를 마치 샤워기 물줄기처럼 일정한 간격, 똑같은 굵기로 쏟아지는 질서를 보았다 아득한 공중에서 빗물은 서로 부딪치지 않을 거리를 미리 정하고 똑같은 무게로 몸을 쪼개 각각의 빗줄기가 된 것이었다 길가 배롱나무 품에 사뿐 안기거나 가파른 정자 지붕을 타고 미끄러지거나 난폭한 바퀴에 깔리거나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을 것이다 지나가는 노란 우산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자전거도 덜어내고 나눠서 가벼워진 빗줄기를 맞으며 빗속을 무사히 통과하고 있다 늘 당연했던 빗줄기 하늘과의 약속이 없었다면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지는 그 무서운 속도는 물대포가 되고 물폭탄이 되어 부상자가 늘고 비 내리는 날은 ‘재난의 날’로 선포되었을 ..

서정산책 2023.06.10

풍경의 깊이/김사인

풍경의 깊이/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 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

서정산책 2023.05.06

서정시/조지프 브로드스키

조지프 브로드스키 (1988) 조지프 브로드스키(Joseph Brodsky, 1940년 5월 24일 ~ 1996년 1월 28일)는 러시아계 미국인 시인이자 에세이 작가이다. 원래 이름은 이오시프 알렉산드로비치 브로드스키(러시아어: Ио́сиф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ро́дский)이다. 198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 6월 4일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추방되어 1977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1987년 중요한 서정적 비가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문단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독립적 성향과 꾸준하지 않은 작품활동으로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사회주의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1964..

서정산책 2023.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