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렁거리는 시/박완호 출렁거리는 시/박완호 그 방의 유리창은, 소리를 가득 채운 병의 투명한 마개마냥 단단하게 잠겨 있다 손이라도 잘못 갖다 대면 순식간에 쏟아져버릴 것 같은 액체의 말들, 출렁거리는 유리병 속 포도주처럼 발효하는 소리의 입자들이 빼곡하게 차 있다 귓구멍을 꽁꽁 틀어막은 벽들이 .. 이방인 회개 2013.05.21
이스마일 카다레,「부서진 사월」중에서 (낭독 변진완) 이따금 그조르그는 날짜의 흐름을 생각하곤 했다. 그로서는 시간의 흐름이 괴상하기 이를 데 없는 것 같았다. 나날들은 어느 시간까지는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다가도, 복숭아 꽃잎 위에서 한동안 파르르 떨다가 갑자기 굴러떨어져 부서지고는 마침내 죽고 마는 물방울처럼 느껴지기도 .. 이방인 회개 2013.05.18
은유/최규승 바람의 문 문의 바람 빌딩의 숲 숲의 빌딩 기타의 사운드 사운드의 기타 마이크의 손 손의 마이크 하늘의 끝 끝의 하늘 비둘기의 평화 평화의 비둘기 노동의 노래 노래의 노동 행복의 시간 시간의 행복 슬리퍼의 때 때의 슬리퍼 모빌의 흔들림 흔들림의 모빌 화분의 선인장 선인장의 화분.. 이방인 회개 2013.05.09
허공의 마디 /김 대 호 허공의 마디 외 4편 김 대 호 어떤 식으로든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말이 있었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 순간이 지나가자 내 앞에 서 있던 말이 떠났고 이 일 저 일 시간을 궁리했다 나이들면 표정에 마디가 생기나 보다 나무의 옹이 같은 것이었는데, 단단한 그 안에는 뱉고 싶었.. 이방인 회개 2013.05.03
가난한 오늘 / 이병국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가난한 오늘 / 이병국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 이방인 회개 2013.05.01
손톱 깎는 날 / 김재현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손톱 깎는 날 / 김재현 우주는 뒷덜미만이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처럼 구름은 흩어져 있다 기상청은 거짓, 오늘 나는 천 원짜리 손톱깎이 하나를 살 것이다 태.. 이방인 회개 2013.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