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회개 363

돌아보지 말자/박목월 시인

돌아보지 말자/박목월 하루에도 나는 몇번이나 소금기둥이 된다. 롯의 아내여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다짐하면서 믿음이 약한자여 세상의 유혹에 이끌려서 나는 뒤를 돌아본다. 뒤를 돌아 보았자 유황과 불이 퍼붓는 타오르는 소돔과 고모라 나의 어리석은 미련이여. 나는 하루에도 하루에도 몇차례나 뒤를 돌아보고 소금기둥이 된다. 신문지로 만든 관에 마음이 유혹되고 잿더미로 화하는 재물에 미련을 가지게 되고 오늘의 불 앞에 마음이 흔들리고 뱀의 혀의 꾀임에 빠져 뒤를 돌아본다. 거듭 믿음이 약한자여 오로지 주를 향한 생명의 길을 앞만 보고 걸어가자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지자.

이방인 회개 2021.04.13

오래된 울음/이진환 신앙시공모 대상작

오래된 울음 이진환 숲에서 하나 둘 나무를 세고가면 나무가 되었다 숲이 되었다 고요가 되었다 고요가 깊어지자 웅크리고 있던 숲이 안개처럼 몸을 푼다 불신의 늪이 꿈틀거려서다 한때, 뿌리 뻗친 늪에서 마구잡이로 우듬지를 흔들어대다 새 한 마리 갖지 못한 나무였다 눈도 귀도 없는, 그 몸속으로 흘러 다니던 울음을 물고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릴 적 어둑한 논둑길에서 두려움을 쫓던 휘파람소리와 함께 가슴을 졸이고 나오던 눈물이었다 울음의 반은 기도였으므로, 안개의 미혹(迷惑)에서 깨어나는 숲이다 고요란 것이 자연스럽게 들어서서 허기지는 저녁 같아 모든 생명이 소망을 기도하는 시간이 아닌가 두려움의 들녘에서 울던 오래된 울음이 징역살이하듯 갇혔던 가슴으로 번지고 있다 기도를 물고 돌아오는 새들의 소리다

이방인 회개 2021.03.19

겨울 자작 나무/류인채

겨울 자작나무 늦은 밤 성경을 읽는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지난겨울 페테르부르크 교외 길 위에서 만난 자작나무 숲이 떠오른다 눈이 내리는 속에서 더욱 하얗게 빛나던 자작나무들 가지마다 상처 입은 바람을 앉히고 그 위에 눈은 덮이고 눈발 속에서 마른 잎 몇 장 매달려 고요했다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던 변화산에서 그의 옷이 희고 빛나던 것처럼 희고 빛나는 성자 같은 나무 자신의 살갗을 찢으며 혹한을 견디고 있었다 길 위에 곧게 서서 우듬지가 가늘게 떨리던 목마른 나무 그 상처를 만져보지 않아도 자작나무는 자작나무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눈밭에서 채찍으로 맞은 듯이 부르터 백지처럼 벗겨진 수피 갈피마다 깊은 뜻 새겨놓았는지 말씀을 곱씹듯이 꿈을 꾸..

이방인 회개 2021.02.21

흰 노트를 사러 가며 - 김승희

흰 노트를 사러 가며 외로운 날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소복소복 흰 종이 위에 넋을 묻고 울어야 합니다. 황혼이 무서운 곡조로 저벅저벅 자살미사를 집전하는 우리의 불길한 도회의 지붕밑을 지나 나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면죄부를 잔뜩 사는 탐욕스런 노파처럼 나는 흰 노트를 무섭도록 많이 삽니다. 간호부-수녀-어머니- 흰 노트는 피에 젖은 나의 정수리를 자기의 가슴으로 자애롭게 껴안고 하얀 붕대로 환부를 감아주듯 조심조심 물어봅니다. 고독이 두렵지 않다면 너는 과연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이 고통스러운가고 세상에는 너무나 무능하여 성스럽게 보이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무능한 순정으로 무능한 순정으로 흰 노트는 나를 위해 정말 몸을 바칩니다. 외로운 날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미칠 듯한 순정으로 미칠..

이방인 회개 2019.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