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영혼 469

오월의 그늘/김현승

오월의 그늘/김현승(1913∼1975) 그늘, 밝음을 너는 이렇게도 말하는구나 나도 기쁠 때는 눈물에 젖는다. 그늘, 밝음에 너는 옷을 입혔구나 우리도 일일이 형상을 들어 때로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이 밝음, 이 빛은 채울 대로 가득히 채우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구나 그늘―너에게서… 내 아버지의 집 풍성한 대지의 원탁마다 그늘, 오월의 새 술들 가득 부어라! 이팝나무―네 이름 아래 나의 고단한 꿈을 한때나마 쉬어 가리니…

삶과 영혼 2024.02.12

생각하는 사람/김장환

생각하는 사람/김장환(1958∼ ) 로댕은 생각했었지 지옥의 문 앞에서 삶은 죽음의 그림자였음을 들릴 듯 들리지 않고 보일 듯 보이지 않던 시간 너머 끝없는 시간 모든 기회는 지나가고 결국은 절망 너머의 절망 어둡고 긴 고뇌의 함성 로댕은 말하고 있었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보라고 새로 가야할 길은 멀다고 턱을 고인 팔꿈치 두렵다 못한 침통한 침묵 묵직이 내려앉은 어둠 너무 늦게 깨달았지 무지와 거짓과 위선을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삶과 영혼 2024.02.04

눈 속에 핀 한 달란트 / 임용남

눈 속에 핀 한 달란트 / 임용남 싸락눈이 탱크같이 내리는 날 당신은 극빈을 동구 밖으로 밀어내려고 삼손의 나무꾼이 되셨다 그의 냉가슴은 늘 만선을 꿈꾸었고 호미 끝으로 새벽이 눈을 뜬다 때론 소쩍새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의 발가락을 몰아낸 진흙들이 고무신을 점령했을 때 나는, 양떼들이 모여 사는 성경책 속을 걸었다 그의 관자놀이 쪽으로 눈물의 강이 흐른다 그곳에 한 장의 편지가 떠다닌다 그 편지를 읽었다 성자 같은 천개의 은하수를 가슴에 안고 폭풍만이 떼 지어 사는 길을 걸었다 지금, 바람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있다 영혼이 없는 양을 안고, 천상으로 가는 가시밭길을 오르고 또 오르고 있다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푸르게 들려왔다 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삶과 영혼 2024.01.21

어머니 방석/장기욱제 13회 신춘문예 신앙시 최우수상

어머니 방석/장기욱 소천하신 어머니 방 한편 눈물로 남아있는 방석에는 눈물 내음이 난다. 자식 향한 간구의 모퉁이를 돌고 돌아 삼백예순 날 내 몸 드리는 제단(祭壇)되어 소리 없이 품기던 아픔 적셔있다 촘촘한 실선마다 탕자 향한 눈 깊어진 자리 모래폭풍 속 오가며 두 손으로 기다려주시던 구릉엔 샤론의 꽃 피어있다 제 몸 불사라 온기 떨어주던 솜털 뜨거운 간구 감싸 안느라 한 가닥 두 가닥 헤지고 거죽만 남아있다. 내 몸이 향기로운 건 빈 가슴에 울림으로 전해오는 건 패인 자국마다 눈물로 꿰매놓은 기도 때문이다

삶과 영혼 2024.01.14

견출지/정재희 13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견출지/정재희 폐업하는 문방구 앞 평상 누구나 가져다 쓰라고 내놓은 견출지 무더기, 손대는 이가 없다 카페가 찻집만이 아니고 노트북이 공책만이 아닌 요즘 시대 쓸모 줄어든 문구 견출지 눈에 잘 띄게 돌출용으로 공책이나 어느 서류에나 붙어 있어야 할 문구 버려진 자세조차 반듯한데 촉감은 내세울 것 없는 내 오기처럼 뻣뻣하다 어둡고 후미진 문방구 구석 어느 틈새에 눌려 오래 버텨왔을 시간들 정신줄 놓치지 않으려 몸은 또 그리 경직되었을까 그래도 있어야 할 쓸모 때문에 어쩌면 꼿꼿이 자존심을 지켜왔을지도 모를 일 나는 그의 쓸쓸한 쓰임을 위하여 마지막 이별 행위처럼 견출지를 가지런히 장바구니에 담는다 돌아와 성경 필사 노트에 사용해보는데 풀기 옅어진 견출지 잘 붙지 않는다 겨자씨만도 안 되는 소망이지만 기도 ..

삶과 영혼 2024.01.06

눈 먼 자의 기도, 소리 /우현준

1. 눈먼 자의 기도/우현준 오월 병동 창가에서 푸른 봄 내려다보던 아이 반짝이는 여름날 좔좔좔 개울물 흐르는 소리 듣게 하옵소서 붉은 가을날 우수수 나뭇잎들 몰려가는 소리 손 시린 겨울날 사락사락 댓잎에 바람이 베이는 소리 세상 잠든 밤 뽀직뽀직 쌀 불는 소리 듣게 하옵소서 자연의 양팔저울에 빛과 소리 얹으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으니 타닥타닥 벽난로 장작불 타는 소리 때앵때앵 새벽종 고요한 마을을 깨우는 소리 사뿐사뿐 거리마다 봄이 오는 소리 듣게 하옵소서 손 내밀면 나비처럼 나플나플 뛰어가던 아이 깊은 밤 어머니의 찬송 소리 듣게 하옵소서 어머니따라 찬송을 부르고 찬송처럼 하루를 살고 하루가 찬송이 되게 하옵소서 소리 없는 하루를 살더라도 소리 없는 침묵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2. 소리/우현준 양팔..

삶과 영혼 2023.12.05

꽃등/류시화

꽃등 - 류시화 누가 죽었는지 꽃집에 등이 하나 걸려 있다 꽃들이 저마다 너무 환해 등이 오히려 어둡다, 어둔 등 밑을 지나 문상객들은 죽은 자보다 더 서둘러 꽃집을 나서고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뜨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순간보다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 지금은 상처마저도 등을 켜는 시간 누가 한 생애를 꽃처럼 저버렸는지 등 하나가 꽃집에 걸려 있다

삶과 영혼 2023.11.22

인생/이기철, 이기철 시모음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이기철 창문은 누가 두드리는가, 과일 익는 저녁이여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불빛으로 남은 이름이 내 생의 핏줄이다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어둡지 않으려고 마음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어느 별에 살다가 내게로 온 생이여 내 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는다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을까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붉은 옷 한 벌 해지면 떠나갈 꽃들처럼 그렇게는 내게 온 생을 떠나보낼 수 없다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여 네가 있어 삶은 과..

삶과 영혼 2023.10.24

하루만의 위안 외 시는 영혼의 자연이어서/조병화

시는 영혼의 자연이어서/조병화 시를 쓰시려 하십니까. 시인으로 살려하십니까. 시인의 영혼은 큰 자연을 살아가는 고독한 겸손이옵니다 눈물도 자연이요, 슬픔도 자연이요, 사랑도 자연이요, 실연도 자연이요, 만남과 이별도 자연. 깨달음도 허망으로, 믿음도 허공으로, 큰 자연의 바람이옵니다 자연 속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닦으며 닦으며 투명한 영혼을 살아가는 큰 자연이옵니다.

삶과 영혼 2023.10.17

그날을 기다리며/사영숙(2011년 기독 신춘문예 당선작)

그날을 기다리며 사영숙 짚 엮어 만든 동아줄 길게 늘어뜨려 퍼 올린 두레박 그 안에서 달빛으로 흔들리고 있는 당신은 내 삶의 우물 날마다 오롯이 길어낸 물에 바람 깃만 닿아도 은색 파장이 둥글게 퍼져 메아리를 부여잡은 양손 끝까지 그 떨림이 저려온다. 우물가 곧추 선 소나무에 앉았다 불현듯 비상하는 새의 몸짓에 실어주는 시선 한 줄기는 목마름이 써놓은 편지 내일로 이어주는 이음새 노래를 당신에게 부르고 있는 중이다.

삶과 영혼 202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