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영혼 469

그의 반/정지용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유리창 1」 중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중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호수 1」 전문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고향」 중 대한민국의 시인. 본관은 연일(延日), 아명은 지용(池龍), 세례명은 프란치스코(方濟角)이다. 국내 모더니즘 시의 선구자로, 후술되어있듯 일각에선 ..

삶과 영혼 2023.09.24

영혼의 고요한 밤/이현승

영혼의 고요한 밤/이현승 고요한 가을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내 영혼의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스치는…… 고요한 가을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내 육신의 높은 언덕 그 위에 서서 얄리얄리 보리 피리 불어주던…… 고요한 가을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누구의 감는 갈피엔가 뉘우치며 되새기며 단풍잎 접어 넣는…… 고요한 가을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낙엽보다 쓸쓸한 쓰르라미 울음소리 내 메마른 영혼의 가지에 붙어 우는…… 고요한 가을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책상 위에 고요히 턱을 고이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 버린 다 읽어 버린…

삶과 영혼 2023.09.20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프랑시스 잠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맥에서 평생 사랑과 생명을 노래한 전원시인 프랑시스 잠(1868~1938). 그는 절친한 벗 앙드레 지드와 알제리를 여행한 것과 잠깐 동안의 파리 생활을 제외하고는 외딴 산골 마을에서 지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껴안고 어루만지는 포용과 모성의 시인, 세기말 프랑스 문학의 퇴폐적인 요소를 씻어낸 자연주의 대가로도 꼽힌다. 시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에 나오는 정서 그대로였다. 그의 작품도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겸손과 온화로 이끌어주는 것들이었다. 고답적이고 난해한 시에 넌더리를 내던 독자에게는 청순한 샘물과 같았다. 이른바 ‘잠주의(Jammisme)’라는 문학운동까지 생겼다. 당시 주류를 이루던 난해하고 기교적인 시와 달리 간명하고도 쉬운 시로 독자를 사로잡은 ..

삶과 영혼 2023.07.04

알바트로스/샤를 보들레르

“어린 시절부터 고독감./ 가족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특히 친구들 속에 끼어서도―/ 영원히 고독하도록 운명 지어진 숙명감.” 1821년 출생한 샤를 보들레르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많은 글에서 자신의 내면에 동거하는 두 개의 마음, 이중성에 대해 썼는데 그것을 “생명력, 그리고 쾌락에의 매우 격렬한 기호”라고 칭했다. 보들레르의 비교적 행복했던 초년은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의 생생한 빛”이었다. 적어도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루이 16세의 고가구, 고미술품, 집정 정부, 파스텔화, 18세기의 사교계”라는 어휘들로 꽉 차 있었으나,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앳된 사랑의 푸른 낙원”의..

삶과 영혼 2023.06.30

하루가 끝나고/롱펠로우·미국 시인, 1807-1882

하루가 끝나고/롱펠로우·미국 시인, 1807-1882 하루가 끝나고 어둠이 밤의 날개에서 내린다 독수리가 날다 흘린 깃털 하나 천천히 떨어지듯 마을의 불빛 비와 안개 속에 빛나는 걸 보노라니 알 수 없는 서글픔 휩싸와 내 영혼 그것을 감당할 수 없구나 서글픔과 그리움의 느낌 아픔이라고는 할 수 없고 안개와 비가 비슷하듯 그냥 슬픔과 비슷한 어떤 것 이리 와 내게 시를 읽어 주오 이 산란한 심정 달래고 낮의 온갖 상념 몰아내 줄 소박하고 감동적인 시를 옛 거장들의 시는 그만 두오 장엄한 시인들의 시도 그만 두오 그네의 아득한 걸음 소리 아직 시간의 통로에서 메아리치오 저들의 거창한 생각 듣노라면 마치 군대의 행진곡처럼 싸우고 또 싸우라는 것만 같소 허나 오늘밤 나는 휴식이 그립소 소박한 시인의 시를 읽어 ..

삶과 영혼 2023.06.25

그날이 왔을 때/작자 미상

그날이 왔을 때 놀이터에서 어린아이가 모래 장난을 한참 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 즈음 엄마 목소리를 듣고 손에 묻은 모래를 탁탁 털고 기쁘게 달려가는 모습처럼, 제가 이 세상 삶을 떠나야 할 때 이런 모습으로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삶 안에서 강한 애착 집착을 보이는 제 모습을 보면 막상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날이 왔을 때 떠나지 못해 울고불고 손놓지 못하면 그 모습 때문에 얼마나 더 아플까... 많이 두렵답니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좋은 것처럼 더욱더 사랑할 수 있기를 주님께서 온통 내 안을 차지하시기를 두 손 모읍니다.

삶과 영혼 2023.06.08

그는 천국의 옷감을 소망하네/예이츠

아일랜드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그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고 정치인이었다. 10대 때부터 시를 쓴 그는 20대 중반 이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51세 때인 1916년에는 아일랜드인 2000여 명이 일으킨 ‘부활절 봉기’를 목격했다. 이때 500여 명이 죽는 참상을 딛고 아일랜드는 1922년 독립했다. 그는 독립한 조국에서 상원의원을 지내며 뛰어난 시를 계속 썼고 58세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 굴곡진 삶의 고비에서 훌륭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스무 살이나 어린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와 깊이 교류하며 작품을 분석했다. 결혼도 파운드 부인의 사촌과 했다. ‘황무지’의 시인 T S 엘리엇과도 친했다. 엘리엇은 예이츠를 “지적 우수성과 도덕적 우수성을 다 갖춘 최고 ..

삶과 영혼 2023.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