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출지/정재희
폐업하는 문방구 앞 평상
누구나 가져다 쓰라고 내놓은
견출지 무더기, 손대는 이가 없다
카페가 찻집만이 아니고
노트북이 공책만이 아닌 요즘 시대
쓸모 줄어든 문구 견출지
눈에 잘 띄게 돌출용으로
공책이나 어느 서류에나
붙어 있어야 할 문구
버려진 자세조차 반듯한데
촉감은 내세울 것 없는
내 오기처럼 뻣뻣하다
어둡고 후미진 문방구 구석
어느 틈새에 눌려
오래 버텨왔을 시간들
정신줄 놓치지 않으려
몸은 또 그리 경직되었을까
그래도 있어야 할 쓸모 때문에
어쩌면 꼿꼿이
자존심을 지켜왔을지도 모를 일
나는 그의 쓸쓸한 쓰임을 위하여
마지막 이별 행위처럼
견출지를 가지런히 장바구니에 담는다
돌아와 성경 필사 노트에 사용해보는데
풀기 옅어진 견출지 잘 붙지 않는다
겨자씨만도 안 되는 소망이지만
기도 묻은 손으로 꼭꼭 눌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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