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먼 자의 기도/우현준
오월 병동 창가에서 푸른 봄 내려다보던 아이
반짝이는 여름날 좔좔좔 개울물 흐르는 소리 듣게 하옵소서
붉은 가을날 우수수 나뭇잎들 몰려가는 소리
손 시린 겨울날 사락사락 댓잎에 바람이 베이는 소리
세상 잠든 밤 뽀직뽀직 쌀 불는 소리 듣게 하옵소서
자연의 양팔저울에 빛과 소리 얹으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으니
타닥타닥 벽난로 장작불 타는 소리
때앵때앵 새벽종 고요한 마을을 깨우는 소리
사뿐사뿐 거리마다 봄이 오는 소리 듣게 하옵소서
손 내밀면 나비처럼 나플나플 뛰어가던 아이
깊은 밤 어머니의 찬송 소리 듣게 하옵소서
어머니따라 찬송을 부르고
찬송처럼 하루를 살고
하루가 찬송이 되게 하옵소서
소리 없는 하루를 살더라도
소리 없는 침묵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2. 소리/우현준
양팔저울에 빛과 소리 내려앉는다
수평선처럼 기울지 않는 팽팽한 수평
어둠 몸집을 키워 수평을 흔들고 빛은
눈물처럼 떨어진다 기우뚱 균형을 잃고
소리 쪽으로 쏠리는 무게
놀란 절반의 소리 캄캄한 빛의 자리로 뛰어간다
양팔저울은 다시 팽팽한 수평
소리가 소리에게 속삭인다
태초에 소리가 있었어
빛은 언제고 돌아온다
당선자 우현준씨
지난가을, 눈이 멀었다. 넓은 부엌창 너머 눈 쌓인 소백산이 보이지 않는다. 시력이 서서히 멀어가다 실명하는 망막색소변성증이 병명이다. 지금은 허허로운 12월의 끝자락, 아내가 부스스 일어나 커튼을 열며 아이처럼 해맑게 말했다.
"오빠. 펑펑 눈이 와. 펑펑, 세상이 하얗다."
창문을 열고 방충망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차갑고 부드럽고 가벼운 눈이 내려앉는 느낌이 좋았다. 눈을 크게 떠도 눈은 보이지 않고 시린 손을 오므렸다. 눈송이 녹는 손을 불쑥 아내의 잠옷 주머니에 넣었다. 깜짝 놀라는 아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아내의 얼굴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고 오래 기도했다. 흰 눈을 못 봐도 괜찮고, 글자를 못 봐도 괜찮고, 세상을 못 봐도 괜찮지만, 봄날 수선화처럼 미소 짓는 아내의 얼굴은 보고 싶다.
지금은 마음으로 보는 연습 중이다. 실명이 운명이라면 시도 운명일까. 시의 창으로 세상을 보려 한다. 눈먼 눈으로 세상을 비추는 불빛 같은 시를 쓰고 싶다. 나는 전교 꼴찌였고 아내는 전교 일등이었다. 꼴찌가 읽어도 가만가만 끄덕이고 일등이 읽어도 다시 읽고 싶은 시를 쓰고 싶다. 주변에 시를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실명처럼 캄캄하다. 어두운 시간에 빛을 비추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고개 숙여 올린다. 오늘 밤도 푹푹 눈이 내리고, 고마운 이름들을 부르며 하루의 문을 닫는다.
시 심사평
소리', '눈먼자의 기도'와 응모작 '내전', '물들의 환승'등 3명의 작품을 최종 후보작으로 올렸다.
'소리'와 '눈 먼자의 기도'는 시 속의 화자가 시각 장애인으로 등장한다. 태생적 시각 장애인이라면 사물을 인식하는 의식구조가 비장애인과 엄청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 등장한 시각 장애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악조건을 극복해 영적인 빛과 음성을 체험하는 영성(靈性)을 얻는다.
'소리'와 '눈먼 자의 기도'는 구상력(構想力)과 간결한 구문으로 시적 긴장감을 저울의 추로 비유했다. 제 6감의 촉수를 벋어 절대자 신의 형상을 빛과 소리를 통해 의식한 것이다. 자기 나름의 신의 영상을 형상 짓고 있다. 빛과 소리에 관련한 상상을 극적으로 표상해 낸 것이다. 또한 '눈먼 자의 기도'에서는 일상으로 듣는 자연의 소리와 어머님의 찬송과 기도를 통해 얻은 은혜를 이어 항상 주님을 앙모(仰慕)하기를 바라는 침묵의 기도시가 되었다.
'삶과 영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 방석/장기욱제 13회 신춘문예 신앙시 최우수상 (0) | 2024.01.14 |
---|---|
견출지/정재희 13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0) | 2024.01.06 |
꽃등/류시화 (0) | 2023.11.22 |
인생/이기철, 이기철 시모음 (0) | 2023.10.24 |
하루만의 위안 외 시는 영혼의 자연이어서/조병화 (0) | 2023.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