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영혼

인생/이기철, 이기철 시모음

헤븐드림 2023. 10. 24. 04:03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이기철

 


창문은 누가 두드리는가, 과일 익는 저녁이여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불빛으로 남은 이름이 내 생의 핏줄이다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어둡지 않으려고 마음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어느 별에 살다가 내게로 온 생이여
내 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는다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을까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붉은 옷 한 벌 해지면 떠나갈 꽃들처럼
그렇게는 내게 온 생을 떠나보낼 수 없다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여
네가 있어 삶은 과일처럼 익는다

현대문학 / 2013년 9월호

 
눈 오는 밤엔 연필로 시를 쓴다
이 기철 
눈 오는 밤에는
이 세상 가장 슬픈 시를 읽고 싶다
슬픔이 아름다워 차마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시집을 
 
헌책방에 가서 오백 원 주고
사 온 옛날 시집을 다시 꺼내 읽고 싶다 
 
종이 썩는 냄새가
조금은 코에 거슬리지만
그것이 추억의 냄새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즐겁고 떨어져 나간 책 귀퉁이의
구절이 새록새록 상상 움을 내미는 
 
책상을 정리하다
나온 흑백 사진 같은 시집을
눈 오는 밤엔 내가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이 되어 읽고 싶다 
 
전화도 티브이도 없는 곳이면 더 좋겠다
캄캄함이 하얗게 빛나는 외진 곳으로 
 
먼 나라 사람 지바고처럼 털모자를
눌러 쓰고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펑펑 눈 오는 밤에는
잊혔던 호롱불 심지를 올리고
불빛이 흐려 글자가 잘 안 보이는
작은 방에서
지금은 죽은 작가가 쓴
이별이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싶다 
 
실패가 아름다운 연애, 
슬퍼서 아름다운 소설을 
 
한기가 찾아들면
면 내복을 꺼내 입고 외투를 껴입고
누군가가 창을 두드려도
못 들은 척 책 읽기에만 몰두하고 싶다 
 
 눈 오는 밤은 시골 교회 뒷담
기다리다 기다리다 그만 돌아설까
망설일 때 작은 그림자로 나타나던
처음 닿던 입술이 인두불이던
소녀를 만나고 싶다 
 
슬프지 않은 추억은 추억이 아니다
그때의 가슴이 손수건 같이 펄럭였다고
쓴다 한들 풋순 같은 그 가슴을 누가 탓하랴 
 
눈의 살은 희고 눈의 빛은 부드럽다
눈 오는 밤에는 옛날의 책들 
 
조루즈 상드니 버지니아 울프
샤롯 부론테니 알프렛 테니슨,
읽으면 금방 한숨이고 눈물인
김소월이니 백석이니
그런 이름을 A4용지 다섯 장에
덧없이 끄적거리고 싶다 
 
펑펑 문풍지에까지 눈이 차오르면
갈 곳도 없이 자꾸만 목이 긴 양말만
갈아 신어보고 혼자서 뒤척거리며
쓸쓸함을 생밤처럼 깨물기도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눈 오는 밤은
티브이도 안 켜고 전화도 안 받고
그것이 꼭 태고의 말일 수밖에 없는 시를
새로 깎은 4B연필로 쓰고 싶다 
 
눈을 목화송이에 비유한 최초의 사람의
눈보다 더 희고 깨끗한 마음을
하이얀 종이에 눈의 물을 찍어 쓰고 싶다 
 
일생을 시를 써도
눈 오는 밤 아니면 쓸 수 없는 시를
마음이 부르는 대로 받아쓰고 싶다 

 

 

 

들판은 시집이다

 

이기철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 
오전의 햇살에 일찍 데워진 돌들 
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 
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 
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


벌들의 날개 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줄 
넝쿨풀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이 긴 구절 
나비 날개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 
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 
갓 봉지 맺은 제비꽃은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가장 따뜻한 책 / 민음사, 2005

 

근심을 지펴 밥을 짓는다

 

                이기철 

 

                꽃씨 떨어지는 세상으로 내려 가

꽃씨보다 더 작게 살고 싶었다

나뭇잎이 지면서 남긴 이야기를 모아 동화를 쓰고

병에서 깨어나는 사람들의 엷은 미소를 보며 시를 쓰고 싶었다

저 혼자 나들이 간 마음이 날개가 찢겨 돌아올 때마다

가제 손수건으로 피 묻은 그 얼굴을 닦아 주었다

어린 근심아, 강물을 못 건너고 돌아오는 네 얼굴의 슬픔

더 멀리 가려던 네 꿈이 새의 죽지처럼 꺾였구나

들판이 강물을 보듬고 남은 햇살이 하루를 껴안을 때

너의 몸이 종이쪽처럼 가벼워졌구나

악의를 씻어 국 끓이고 가시로 돋는 증오를 빗질하면

어느덧 마음 한편에 파랗게 돋는 새 잎

모래의 마을이 금이 되는 날을 기다려

내 손수 지은 색동 옷 갈아입히면

칭얼대던 근심들이 하얀 쌀밥이 되어 밥상에 오른다

그때 나는 너에게 상처를 보석이라고,

슬픔은 실밥 따뜻한 내복이라고

이 세상 가장 긴 편지를 쓰리라

근심이 눈발처럼 흩날려도

날개 찢긴 근심이 돌아와 갈아입을 옷 한 벌 다림질 하리라

슬픔이 아닌, 눈물이 아닌

환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모닥불처럼 나누리라.

 


따뜻한 책 

 

이기철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 
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 
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 
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 
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 
서서 읽는 사람아 
내가 의자가 되어줄게 내 위에 앉아라 
우리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 
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 다니는 것은 
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 
엽록처럼 살아 있는 예지들이 
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 
글자들은 늘 신생을 꿈꾼다 
마음의 쟁반에 담기는 한 알 비타민의 말들 
책이라는 말이 세상을 가꾼다

 

가장 따뜻한 책 / 민음사, 2005

 

내가 바라는 세상

 

이기철

 

 

 

이 세상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꽃모종을 심는 일이다

이름 없는 꽃들이 길가에 피어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꽃을 제 마음대로 이름 지어 부르게 하는 일이다

아무에게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이 혼자 눈시울 붉히면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그 꽃에 다가가

시처럼 따뜻한 이름을 그 꽃에 달아주는 일이다

부리가 하얀 새가 와서 시의 이름을 단 꽃을 물고 하늘을 날아가면

그 새가 가는 쪽의 마을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면 그 마을도 꽃처럼 예쁜 이름을 처음으로 달게 되겠지

 

그러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꽃이 된 사람의 마음을 시로 읽는 일이다

마을마다 살구꽃 같은 등불 오르고

식구들이 저녁 상가에 모여 앉아 꽃물 든 손으로 수저를 들 때

식구들의 이마에 환한 꽃빛이 비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다

어둠이 목화송이처럼 내려와 꽃들이 잎을 포개면

그날 밤 갓 시집온 신부는 꽃처럼 아름다운 첫 아일 가질 것이다

그러면 나 혼자 베갯모를 베고

그 소문을 화신처럼 듣는 일이다

 

 

그리움 측정법

이기철

 

 

 

 

다 말해버리지 못해 입안에 오래오래 불덩이로 남아 있는 것

스러진 줄 알았는데 가보면 새록새록 살아 있는 것

책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 보니 창에도 서려 있는 것

오다가 자꾸 뒤가 궁금해 다섯 번은 돌아보게 하는 것

수숫대처럼 가늘고 힘겹게 등뒤에서 오래오래 흔들리는 것

양말까지 다 챙겼는데 도착해보니 그것 하나만 남겨두고 온 것

事實이 아니고 實在가 아닌 것 實體가 아니고 實物이 아닌 것

어제까지 내 안에 소복했는데 오늘은 어디에도 없는 것

지금까지 부르던 이름을 지우고 새 이름 붙여주고 싶은 것

개화보다 더 일찍 영글어 버린 것

내다 버렸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내 곁에 와 있는 것

일찌감치, 라고 말하면 훨씬 늦게 오는 것

천천히, 라고 말하면 일찌감치 내 안에 와 있는 것

내가 익혀온 공부 중 가장 어려운 공부법

그리움 측정법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이기철

 

 

 

나무의 생각이 그늘을 만든다

그늘을 넓히고 좁히는 것은 나무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나무는

나무가 벋고 싶은 곳으로 가서 그늘을 만든다

그늘은 일하다가 쉬는 나무의 자리다

길을 아는가 물으면 대답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만 가서 제 지닌 만큼의 자유를 심으면서

나무는 가지와 잎의 생각을 따라 그늘을 만든다

수피 속으로 난 길은 숨은 길이어서 나무는

나무 혼자만 걸어 다니는 길을 안다

가지가 펴놓은 수평 아래 아이들이 와서 놀면

나무는 잎을 내려보내 아이들과 함께 논다

가로와 세로로 짜 늘인 넓은 그늘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백지의 말

 

이기철

 

 

 

나의 몸은 언제나 하얗게 비워두겠습니다

네 모는 날카로워도 속은 늘 부드럽겠습니다

설령 글씨를 썼다 해도 여백은 늘 갖고 있겠습니다

진한 물감이 있어도 내 몸을 칠하지 않겠습니다

가까이 가고 싶어도 늘 멀리 떨어져 있겠습니다

바람이 불면 납작하게 엎드리겠습니다

칼날이 다가오면 물처럼 연해지겠습니다

그러나 불빛에는 되도록 반짝이겠습니다

노래가 다가오면 치렁치렁 몸으로 받겠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들어올 문을 열어두겠습니다

당신이 들어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향기가 되겠습니다

그땐 당신이 내 몸에 단 한 폭 그림을 그리십시오

그러기 위해 한 필 붓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사랑의 기억

이기철

 

 

 

시집 한 권 살 돈이 없어 온종일 헌책방 돌 때 있었네

남문 시장 고서점, 시청 옆 헌책방 돌 때 있었네

하루에 서른 편 키 큰 서가 아래 지팡이처럼 서서 읽을 때 있었네

모두들 서럽고 쓸쓸한 말로 시의 베를 짜고 있었네

귀에는 벌 떼 잉잉거리고 눈시울엔 안개비 촉촉이 서렸었네

어쩌다 맘에 드는 시 한 편 만나면 발길 돌리지 못하고

꽃술의 꿀벌처럼 뱅뱅거리다가

주인 눈살 피해 서너 번 문을 여닫을 때 있었네

더러는 노트 조각 찢어 열 줄 시를 베꼈네

주인 몰래 책장을 찢고도 싶었으나, 이게 시인데 시는 아름다운 것인데

나를 달래며 내일 또 오지, 모레 또 오지

문을 밀고 나올 때 있었네

그때마다 엷은 등에는 시구들이 고딕으로 찍혔었네

시집 이름 기억 안 나도 머릿속에 베껴 논 시구 선명해

내일 또 와 베낄 거라고

문을 밀고 나오는 발등에 뜨거운 것이 툭-하고 떨어졌네

머리카락 위로 낙엽이 시가 되어 내려앉았네

사랑이 깊었던 날들이었네

지금도 너 어디 있느냐 묻고 싶은 날들이었네

달려가 와락 끌어안고 싶은 날들이었네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이기철

 

 

 

저렇게 푸른 잎들이 날빛을 짜는 동안은

우리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저녁이면 수정 이슬이 세상을 적시고

밤이면 유리 별들이 하늘을 반짝이고 있는 동안은

내 아는 사람들 가까운 곳에서

펄럭이는 하루를 씻어 널어놓고

아직 내 만나지 못한 사람들

먼 곳에서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꿈을 엮고 있는 동안은

바람이 먼 곳에서 불어와 머리카락을 만지고

햇빛이 순금의 깁으로 들판을 어루만지는 동안은

우리들 삶의 근심이 결코 세상의 저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밤새 꾸던 꿈 하늘에 닿지 못하면 어떠랴

하루의 계단을 쌓으며

일생이라는 건축을 쌓아 올리는 사람들

우리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그 아름답고 견고한 마음들 눈감아도 보이는 동안은

그들 숨소리 내일을 여는 빗장 소리로

귓가에 들리는 동안은

 

 

가장 따뜻한 책 / 민음사, 2005

 

유등리

이기철

 

 

 

지나는 어디에도 유등리는 있다

오래 만진 삶이 문고리처럼 닳아 반짝이고

잘못 만지면 바스러지고 말 집들이

종이 연처럼 가볍게 추녀 끝에 걸려 있다

닳은 신발 잠시 뜨락에 벗어놓으면

굳이 문자로 쓰지 않아도 언문체로 남을 골목들

나는 어제도 이 비슷한 골목을 걸어갈 것이다

돌담 아래 겨우 몸 부지하고도

제 기쁨만큼 웃는 꽃들을 보면

가난이 아름다움임을 여기서 깨닫는다

가을이 조금씩 여름의 치마끈을 물어뜯는 유등리에 와서

오래 잊고 있던 들깻단과

들판에 내려앉는 구름 그림자에 마음 베이며

한 촌락이 외씨 같은 사람들을 키우고

조선 솥 같은 사람들을 껴안는 것을 본다

남쪽 섬돌에 벌레가 울 때까진

나는 길 떠나지 않으리라

돌담처럼 오래 여기 서 있으리라

 

 

​가장 따뜻한 책 / 민음사, 2005

 

 

이것만 쓰네

이기철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산방에 벗어놓은 흰 고무신 안에 혼자 놀다 간 낮달을

내게로 날아오다 제 앉을 자리가 아닌 줄 미리 알고 되돌아간 노랑나비를

단풍잎 다 진 뒤에 혼자 남아 글썽이는 가을 하늘을

한 해 여름을 제 앞치마에 싸서 일찌감치 풀숲 속으로 이사를 간 엉겅퀴 꽃씨를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사월 달래순이 묵은 돌덩이를 들어 올리는 힘을 본 것도 같은데

저를 좀 옮겨달라고 내 바지 자락에 매달리는, 어언 한 해를 다 살아버린

풀씨의 말을 알아들은 것도 같은데

아직도 흙 이불로 돌아가지 못한 고욤 열매의 추위를 느낀 것도 같은데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가장 따뜻한 책 / 민음사, 2005

 

 

청산행(靑山行) 

 

이기철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靑山)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山)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치솔을 생각한다

남방(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慣習)들

서(西)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생목(生木) 울타리엔 들 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어쩌다 시인이 되어

이기철

 

내 어쩌다 시인이 되어
이 세상길 혼자 걸어가네


내 가진 것 시인이라는 이름밖엔 아무것도 없어도
내 하늘과 땅, 구름과 시내 가진 것만으로도 넉넉한 마음이 되어
혼자라도 여럿인 듯 부유한 마음으로
이 세상길 걸어가네


어쩌다 떨어지는 나뭇잎 발길에라도 스치면
그것만으로도 기쁨이라 여기며
냇물이 전하는 마음 알아들을 수 있으면
더없는 은총이라 생각하며
잠시라도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에 가까이 가리라
나를 채찍질 하며


남들은 가위 들어 마음의 가지를 잘라낸다 하지만
나는 풀싹처럼 그것들을 보듬으며 가네
내 욕망의 강철이 부드러운 새움이 될 때까지
나는 내 체온으로 그것들을 다듬고 데우며 가네


내 어쩌다 시인이 되어
사람과 짐승, 나무와 풀들에 눈맞추며
맨발이라도 아프지 않게
이 세상길 혼자 걸어가네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와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봄밤

 

 

이기철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 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無言)으로는 전할 수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소설을 읽는가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아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生을 살러 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리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줌의 삶을 기탁하러 왔다

 

 

 

사람의 이름이 향기이다

​​

이기철

아름다운 내일을 기다리기에

사람들은 슬픔을 참고 견딘다

아름다운 내일이 있기에

풀잎이 들판에 초록으로 피어나고

향기로운 내일이 있기에

새들은 하늘에 노래를 심는다

사람이 사람 생각하는 마음만큼

이 세상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이 노래가 되고

향기로운 사람의 얼굴이 꽃이 된다

이름 부를 사람 있기에

이 세상 넉넉하고

그리워할 사람 있기에

우리 삶 부유하다

 

가장 따뜻한 책 / 민음사, 2005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이기철

내 몸은 낡은 의자처럼 주저앉아 기다렸다
병은 연인처럼 와서 적처럼 깃든다
그리움에 발 담그면 병이 된다는 것을
일찍 안 사람은 현명하다
, 아직도 사람 그리운 병 낫지 않아
낯선 골목 헤맬 때
등신아 등신아 어깨 때리는 바람소리 귓가에 들린다
별 돋아도 가슴 뛰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꽃잎 지고 나서 옷깃에 매달아 둘 이름 하나 있다면
아픈 날들 지나 아프지 않은 날로 가자
없던 풀들이 새로 돋고
안보이던 꽃들이 세상을 채운다
,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삶보다는 훨씬 푸르고 생생한 생
그러나 지상의 모든 것은 한번은 생을 떠난다
저 지붕들, 얼마나 하늘로 올라 가고 싶었을까
이 흙먼지 밟고 짐승들, 병아리들 다 떠날 때까지
병을 사랑하자, 병이 생이다
그 병조차 떠나고 나면, 우리
무엇으로 밥 먹고 무엇으로 그리워 할 수 있느냐

 

가장 따뜻한 책 / 민음사, 2005

따뜻한 밥

​​

이기철

신발마다 전생이 묻어 있다

세월에 용서 비는 일 쉽지 않음을

한 그릇 더운 밥 앞에서 깨닫는다

어제는 모두 남루와 회한의 빛깔이다

저무는 것들은 다 제 속에

눈물 한 방울씩 감추고 있다

저녁이 끌고 오는 것이 어찌 어둠뿐이랴

내 용서받고 살아야 할 죄의 목록들

내일 다시 걸어야 할 낯선 초행길들

생은 사는 게 아니라 아파하는 것이다

너는 몇 켤레의 신발을 버리며

예까지 왔느냐

나무들은 인간처럼 20세기의 오류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늦었지만 그것이 내 믿음이요 신앙이다

나는 내 믿음이 틀렸더라도 끝내 수정하지 않으리라

쌀 안치는 손의 거룩함을 알기 전에는

이런 말도 함부로 서서는 안 되리라

생을 업고 일을 업고 가기 위해선

이 따듯한 밥 한 그릇의 종교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선

​가장 따뜻한 책 / 민음사, 2005

 

 

시인이란 이름에는 들꽃 냄새가 난다

 

이기철

 

시인이란 이름에는 들꽃 냄새가 난다

저녁 햇빛에 피는 메밀꽃 냄새가 난다

 

시인이란 이름에는 나무 뒤에 선 나무

베어진 그루터기에 목숨으로 돋는 새잎

 

이 세상 모든 향기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 향기가 되는 이름

 

그가 만질 수 있는 것은 몇 송이 언어

그가 거둘 수 있는 것은 몇 다발 사색

 

시인이란 이름에는 이삭 털고 난 볏짚 내음

비비새 울고 간 낮은 산길

돌에 부딪쳐도 노래가 되는

낮게 흐르는 도랑물 소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