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이상
권태(倦怠) 이상(李箱) 一. 어서―차라리 어둬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僻村)의 여름―날은 자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東)에 팔봉산(八峰山).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農家)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덩굴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 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는 백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