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336

삶에 대하여/김형하

삶에 대하여 김형하 어느덧 세월이 흘러 고희 앞에 서 있다. 잠시 삶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돌아보지 못했었다. 그냥 닥치는 대로 그때그때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한답시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 살아온 것 같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뭘까?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남이 생각하는 가치는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의 가치는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가족의 행복, 풍요로운 삶의 추구, 건강, 직업, 자연, 자유, 취미활동 등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삶을 존중하고 싶다. 솔직히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도 근자의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철이 들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 ..

수필 2024.01.24

슬로우 슬로우 퀵퀵/2023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작

하물며, 골목 바람도 리듬을 탄다. 느긋한 바람이 강아지풀을 쓰다듬으며 살랑거리다가도 남쪽 동백꽃 내음을 골목으로 부려 놓을 만큼 세차게 불기도 한다. 빨랫줄에 널려있는 시래기가 왜바람 따라 바스락거린다. 거칠어진 바람에 돌쩌귀 빠진 철대문이 덜커덩덜커덩 녹을 닦는다. 바람의 장단에 골목은 부풀었다가도 이내 고요한 풍경이 된다. 사람이 만드는 바깥바람에도 골목은 술렁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진다. 후미진 골목의 리듬이다. ‘슬로우슬로우 퀵퀵’ 휘파람 불 듯 발음해야 하는 이 말을 내가 맨 처음 들었던 때는 골목이란 골목을 죄다 이어 나만의 세상을 만들던 어린 날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와 골목을 휩쓸다가 숲을 타고 산등선 너머로 사라지던 바람을 뒤쫓는 일이 당시 아이들의 놀이였다. 순간순간 속도를..

수필 2024.01.21

몇 초의 포옹- 조남숙/2023년 신춘문예 경남일보 수필 당선작

폐허는 사람이 없어야 폐허가 된다. 역사의 한 부분을 떠들썩하게 채워 넣던 도읍지였을망정 인걸이 간데없어지면 폐허가 된다’(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 서현 지음 / 효형출판, 2014)는 문장에서 폐허를 생각한다. 사람은 공간에 에너지를 채워 넣는 중요한 유기체다. 유기체는 공간에 모여 구분 불가능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공간 속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사람의 힘은 달콤하면서 힘이 있다. 사람 구경 할 수 있는 시장이나 백화점, 극장이나 공연장, 그 어떤 장소에서도 사람들의 움직임은 살아있는 우주 그 자체다. 그중에서 움직임이 조용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곳이 계단이다. 나에게 세종문화회관은 정신세계의 중심이었다. 화재로 소실된 시민회관의 명맥을 이어 예술의 통로가 되었던 세종문화회관의 계단은..

수필 2023.10.20

인연/이강순

인연 - 정직한 시간 / 이강순 숨이 턱에 차다 못해 끊어질 것 같은, 급기야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퍽 주저앉았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기댔는지 누웠는지 분간이 안 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였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는지조차 스스로 분간할 수 없는 무념의 상태라 해야 할까. 최악의 순간을 모면하는 그 순간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앞서 간 일행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뒤따라오던 낯선 이들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은 거지요?” 멀뚱멀뚱 바라만 볼 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괜찮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괜찮다는 표현은 슬며시 일어나 배낭에 있는 물을 찾는 일이었다. 내가 미처 물을 꺼내기도 전에 앞을 가..

수필 2023.10.12

한철의 짧은 여름 人生 / 원종린

여름이 다가오면 여러 해 전에 길에서 만난 어떤 제자가 던진 시답잖은 질문이 가끔 머릿속에서 맴돈다. 오랫동안 공주에서 살다가 정년을 계기로 대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해의 여름으로 기억된다. 삼복더위에 무슨 급한 볼일이 생겼던지 나는 낯선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지난날의 여자 제자를 만났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는 그쪽에서 인사를 안 하면 얼굴을 마주쳐도 모르고 지나치는 일도 없지는 않다. 또 헤어지고 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만났던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기가 일쑤다. 그 제자도 그런 경우인 셈인데 다만 그때 나에게 던진 질문 한 토막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는다. 서로 근황을 묻는 인사가 끝나고 나자 그 제자는 나에게 "선생님은 여름하고 겨울하고 어느 쪽이 더 좋으..

수필 2023.07.15

권태/이상

권태(倦怠) 이상(李箱) 一. 어서―차라리 어둬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僻村)의 여름―날은 자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東)에 팔봉산(八峰山).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農家)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덩굴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 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는 백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수필 2023.07.05

태극기, 이스라엘 기, 그리고 출애굽의 데자뷰/백종국

어느 날 우리나라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스라엘 국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정치집회의 참가자들 중 일부가 태극기와 성조기와 함께 이스라엘 기를 흔들고 있었다. 웬 이스라엘 깃발이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뉴스 해설들을 모아 보니 그 결론은 대략 이러했다. 이들은 개신교인들이며 이 정치 집회의 목적이 자신들의 신앙과 일치한다는 표상으로 이스라엘 기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터무니없었지만 이스라엘 국기를 보는 순간 어디에서 많이 보았던 일처럼 강렬한 데자뷰(기시감)가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과거에 어디서 이 장면을 보았을까? 기도의 배반 성경에서 보았던 장면들이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무려 430년 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였다. 잔혹한 파라오의 통치 때문에 그들은 ..

수필 2023.06.15

오월/피천득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실료애정통고) 사랑을 얻음도 고통이요 사랑을 잃음도 또한 고통이다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

수필 2023.05.31

천국과 인간세계 외 짧은 수필 두편/신길우 수필가

천국과 인간세계/신길우 어떤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갔다. 신전 앞에는 여러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느님은 들어오는 사람들을 차례로 맞이하여 그들의 전생의 삶의 선악(善惡)과 공과(功過)에 따라 새로운 삶의 길로 배정해 주고 있었다. 그가 하느님 앞에 서자, 하느님은 그의 전생을 살펴보고는 천국으로 가겠는가 아니면 다시 인간세계로 가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이렇게 되물었다. “천국은 어떤 세상인가요?” 그러자, 하느님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인간세계는 앞일이나 장래를 모르고 사는 곳이고, 또 일을 하고 노력해야만 사는 세상이지. 하지만, 천국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즉각 이루어지는 세상이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저..

수필 2023.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