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322

동해/백석

- 백석 동해여, 오늘밤은 이렇게 무더워 나는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닙네.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닐면 어데서 닉닉한 비릿한 짠물 내음새 풍겨 오는데, 동해여 아마 이것은 그대의 바윗등에 모래장변에 날미역이 한불 널린 탓인가 본데 미역 널린 곳엔 방게가 어성기는가, 도요가 씨양씨양 우는가, 안마을 처녀가 누구를 기다리고 섰는가, 또 나와 같이 이 밤이 무더워서 소주에 취한 사람이 기웃들이 누웠는가. 분명히 이것은 날미역의 내음새인데 오늘 낮 물기가 쳐서 물가에 미역이 많이 떠들어 온 것이겟지.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날미역 매음새 맡으면 동해여, 나는 그대의 조개가 되고 싶읍내. 어려서는 꽃조개가, 자라서는 명주조개가, 늙어서는 강에지조개가. 기운이 나면 ..

수필 2023.04.21

수필의 눈/정목일

수필의 눈 / 정목일 평생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언젠가 문리文理라 트이지 않을까 싶다. 한 늙은 석공石工의 얘기로는 바위를 정으로 두드려보면 소리가 다르다고 한다. 만 년 침묵을 지닌 바위들도 깨달음의 깊이가 달라 영혼에서 나는 소리가 각각이라는 것이다. 평생을 나무만을 다뤄온 소목장小木匠은 나무의 겉모습을 보고서 속에 품고 있는 나이테의 무늬, 목리문木理紋을 짐작한다. 석공이나 목공이 한 점의 명품을 남겨놓기까진 일생을 통해 터득한 솜씨와 집중력을 기울였을 것이지만, 먼저 좋은 돌과 나무를 만나야 한다. 어떤 소재를 만나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자신만의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한 가지 일에 정성을 다한 끝에 마음이 열려 영감이 우러난 게 아닐까. 좋은 인생이어야 좋은 수필이 나올 수 있..

수필 2023.04.19

추억, 집필실/안도현

추억 / 안도현 ‘추억’이라는 말은 죽은 말이다.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만 언어로서 숨이 끊겨버려 내다 버릴 곳도 없다.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이나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키치’라고 하는데 ‘추억’이야말로 키치 문화의 대표적인 언어다. 시골 이발관 벽에 걸린 그림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실제 생활에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때가 있다. 여행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곧잘 이 말을 듣게 된다. “좋은 추억 만들어 가고 싶어요.” 나는 이따위의 예쁜 척하는 말로 인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대체 추억을 어떻게 만든다는 건가. 여행지가 추억을 생산하는 공장이라도 되나? 추억이란 아련하고 어렴풋해서 불투명 유리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뚜껑을 자세히 열어보면 온갖 구질..

수필 2023.04.16

길을 걷는다는 것/나태주

오늘도 길을 걸었다. 오전에도 걸었고 오후에도 걸었다. 오후에는 동학사 쪽에 약속이 있어 택시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 한동안 걸어서 갔다. 아직은 여름 햇살이라 따가왔지만 그래도 걷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도로를 버리고 논둑길로 걷고 밭둑길로도 걸었다. 모처럼 그렇게 걸어 보니 느낌이 아주 새롭고, 보고 듣고 하는 것들이 달랐다. 단연 우리는 어디를 갈 때 주로 자동차를 이용한다. 자동차를 타면 시간이 단축되고 몸이 편하다. 그래서 아예 걷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걷는다 하더라도 그 걷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애쓴다. 그러면서도 운동 부족을 호소하고 러닝 머신 같은 운동 기구로 시간을 따로 들여 가면서 운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들의 조금은 모순된 일면이다. 걷는 것이라 하더라도 길을 ..

수필 2023.04.13

수필의 눈/정목일

평생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언젠가 문리文理라 트이지 않을까 싶다. 한 늙은 석공石工의 얘기로는 바위를 정으로 두드려보면 소리가 다르다고 한다. 만 년 침묵을 지닌 바위들도 깨달음의 깊이가 달라 영혼에서 나는 소리가 각각이라는 것이다. 평생을 나무만을 다뤄온 소목장小木匠은 나무의 겉모습을 보고서 속에 품고 있는 나이테의 무늬, 목리문木理紋을 짐작한다. 석공이나 목공이 한 점의 명품을 남겨놓기까진 일생을 통해 터득한 솜씨와 집중력을 기울였을 것이지만, 먼저 좋은 돌과 나무를 만나야 한다. 어떤 소재를 만나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자신만의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한 가지 일에 정성을 다한 끝에 마음이 열려 영감이 우러난 게 아닐까. 좋은 인생이어야 좋은 수필이 나올 수 있다. 인격에서 향기가 ..

수필 2023.04.11

4월/홍연숙

벚꽃 축제가 이제 잠잠해지는 듯하다. 인터넷에도 벚꽃 사진들로 넘쳤고 서로의 인사가 벚꽃 구경 갔댔냐가 먼저다. 어디 가나 벚꽃을 벗어 날 수 없다. 벚꽃나무가 온 울산을 점령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하지만 벚꽃의 절정은 길지가 않다. 물고기 비늘이 말라붙은 것 마냥 동네의 길바닥에 온통 벚꽃 잎들이다. 작은 바람에도 후르르 쏟아져 내리는 벚꽃 잎들이 돌돌 구르다가 아무 데나 벌러덩 드러누워 쌓이기도 한다. 벚꽃은 피는 것도 빠르고 지는 것도 순간이다. 그렇다고 우울할 필요는 없다. 4월이 봄꽃들의 계절이지 않은가? 내가 사는 동네는 유독 빨간 벽돌 집들이 많다. 집집마다 자그마한 꽃밭을 가지고 있어 지나다가 보면 빨강, 노랑, 보라, 흰색의 튤립이나 수선화, 히아신스, 할미꽃,..

수필 2023.04.08

부끄러운 장로 대통령

2020년 11월 2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받고 구치소에 재수감되었다. 대법원은 그에게 뇌물죄로 징역 17년과 벌금 130억 원, 추징금 58억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였다. 패가망신하게 된 개인으로서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를 “장로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우고 지원해왔던 한국교회로서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대통령 중에 세 분의 장로가 있었는데 이승만 장로는 독재와 부정선거로, 김영삼 장로는 무능과 외환위기로, 마지막 이명박 장로는 저급한 뇌물수수 범죄로 사회의 지탄을 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우리가 양심이 있다면 마땅히 한국사회에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처럼 부끄러운 장로 대통령들을 갖게 된 데에는 장로라는 직분에 대한 ..

수필 2023.04.04

새로운 신의 등장을 기다리는가 / 박종형

명색이 주간신문의 칼럼니스트인 필자가 자식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할라치면 세상 돌아가는 실정에 대한 예리한 이해나 평가에 있어 뒤짐을 실감한다. 어느 날 전문경영자인 아들이 최근에 재미있게 읽었다면서 ‘사피엔스’라는 화제작을 주고 갔는데 다른 날 문안을 온 대학교수인 둘째 아들도 그 책을 읽었다면서 그 후속 책처럼 나온 화제작이 ‘호모데우스 Homo Deus’라고 소개했다. 시대 패러다임이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데우스로 변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놀란 것은, 인간이 신의 영역이 허물리고 신의 역할이 무력해짐으로써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하는 것도 모자라 ‘새로운 신 데우스’의 등장을 믿고 고대한다는 시대적 사조의 풍미였다. 이른바 니체가 기독교 전통과 가치를 쇠망치로 박살을 내고 대신에..

수필 2023.03.31

이방인이 되어 시 읽기/최와온

기차를 타고 혼자 군산을 다녀왔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카페에 앉을 수도 없어 기차에 몸을 의탁하기로 하고 역으로 향했다. 물과 카스테라를 크로스백에 넣고 자유로운 나의 두 손과 두 발을 위해 집 밖을 나가니 가을 햇볕도 환하니 지금이 내 세상이구나! 여기에서 나는 이방인이 되어 군산 기차길과 경찰서 앞을 지나 걸었다. 메밀 비빔면을 먹고 군산 시외버스터미널 상가 신문 판매대에서 ‘시’가 눈에 띄어 신문을 샀다. 이름으로 나온 시집은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시 69편을 담아 소개하는 기사였다. “꿈을 낳으려고 노동의 감옥에 갇혔지만 그들은 시를 짓고, 모여 낭송하고, 시집을 묶었다”고 시를 소개한다. 기계와 함께 소음의 작동으로 외국인과 현장 근무하는 노동자인 나는 거리에서 이 시를..

수필 2023.03.28

수필은 청자연적이다/피천득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pavement)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만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이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

수필 2023.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