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인연/이강순

헤븐드림 2023. 10. 12. 00:25

 

 

인연 - 정직한 시간          /    이강순 

 

   숨이 턱에 차다 못해 끊어질 것 같은, 급기야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퍽 주저앉았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기댔는지 누웠는지 분간이 안 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였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는지조차 스스로 분간할 수 없는 무념의 상태라 해야 할까. 최악의 순간을 모면하는 그 순간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앞서 간 일행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뒤따라오던 낯선 이들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은 거지요?”
   멀뚱멀뚱 바라만 볼 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괜찮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괜찮다는 표현은 슬며시 일어나 배낭에 있는 물을 찾는 일이었다. 내가 미처 물을 꺼내기도 전에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젊은 여자는 먼저 물병을 내밀었다. 높은 산에서의 물 한 잔은 생명수라고 하는데, 주춤하는 내게 그녀는 선뜻 물병을 내밀며 얼른 마시라고, 마셔도 된다고 눈짓했다.


   버려진 제라늄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나를 좀 바라봐 주세요, 나를 여기 이대로 두고 가지마세요, 소리치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식물을 버리다니, 나쁜 사람이라고 나는 속으로 나무라고 있었다. 재활용함 곁에 내놓았다는 건 다른 누군가가 다시 들고 들어가 키워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모서리에 금이 간 화분과 바싹 마른 흙을 봐서는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이미 다른 식물은 다 말라버렸고 제라늄만 겨우 살아있었다. 누군가 키워주길 바랐다면 잎이 다 타서 바스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텐데.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꽃송이를 매달고 있었다니, 제라늄의 안간힘이 보였다. 화분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마른 흙을 파고 제라늄을 뽑아냈다. 너를 잘 보살펴줄게. 멋지게 키워줄게. 가냘픈 가지 두 촉을 손에 들고 나는 어느새 속삭이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그녀를 만난 건 여름 산 중턱에서였다. 그녀가 내게 건네 준 물 한 모금이, 걱정스런 눈빛이, 나를 향해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 고마움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저 미소만으로도 나의 어색한 고마움이 전해지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그녀와 나는 동행인이 되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서로 미소만으로도 든든했고 의지가 되었다.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해지기 전에 내려오지 않아도 되는 하룻밤의 여유는 많은 것을 허락했다. 내게 맞는 보폭을 유지할 수 있었고, 꾸준히 쉬엄쉬엄 오를 수 있게 해 주었다. 오르는 동안 나무와 바위와 꽃에 마음 다해 인사할 수 있었다. 나무를 안았고 바위를 만졌고 꽃에 눈을 맞추었다. 급하지 않아도 되었고, 좀 늦어도 괜찮았다.


   멋지게 키워주겠다던 약속에 부응하듯 제라늄이 꽃을 활짝 피웠다. 심었고 물을 주었고 마음을 다하였더니 한파에도 묵묵히 제할 몫을 해내었다. 느닷없이 인연이 되어 우리 집 베란다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제라늄과 여름 산 중턱에서 느닷없이 만나 내 삶의 한 켠을 차지한 그녀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그녀와는 SNS로 소통하고 근황을 파악한다. 그녀가 가끔 바꿔놓는 프로필 사진을 보며 안부를 묻고 그녀도 내가 올려놓는 사진을 보며 안부를 묻기도 한다. 그녀도 나도 관계에 대한 표현력이 부족한 사람인 것은 맞는 것 같다. 말없이 내게 물을 건넨 것처럼 그렇게 묵묵히 안부를 나눌 뿐이었다. 서로에 대한 호감을 절제하며 안부를 나누는 것이 미덕인 것 마냥 그녀와의 인연은 SNS를 통해 무덤덤하나 아주 긴요하게 이어가고 있다. 어느 날 또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난다 해도 우리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깊은 만남을 나눌 수 있을지 모른다. 제라늄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치고 꽃을 피워냈던 그간의 정직한 시간만큼 그녀와 내가 묵묵히 나눠왔던 과장되지 않은 그간의 정직한 날들도 언젠가 꽃을 피워낼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