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권태(倦怠)
이상(李箱)
一.
어서―차라리 어둬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僻村)의 여름―날은 자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東)에 팔봉산(八峰山).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農家)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덩굴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 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는 백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리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서(炎署)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白紙)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記事)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 ― 나는 최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 보다. 최서방의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 ―내가 이참을 먹은 것은 열시나 지난 후니까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최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장기를 한 판 벌이기로 한다. 최서방의 조카와 열 번 두면 열 번 내가 이긴다.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둔다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낫지―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아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조각을 갖다 놓는다. 최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 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놓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思想)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는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서 줄만큼 져 주면, 이 상승장군(常勝將軍)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출물에 가 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 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인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 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자세한 승부(勝負)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이욕(人間利慾)이 다시 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해 버려야 한다.
二.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나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다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불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무슨 제목(題目)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稚劣0한 곡예(曲藝)의 역(域)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 본다.
지구 표면적(表面積)의 백분의 99가 이 공포(恐怖)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彩色)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漂着)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沒趣味)와 신경(神經)의 조잡성(粗雜性)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餘白)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白痴)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巨大)한 구렁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謙遜)이냐.
이윽고 겨울이 오면 초록은 샐색(失色)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루(襤褸)를 갈기갈기 찢은 것과 다름없는 추악한 색채로 변하는 것이다., 한겨울을 두고 이 황막하고 추악한 벌판을 바라보고 지내면서 그래도 자살(自殺) 민절(悶絶)하지 않는 농민(農民)들은 불쌍하기도 화려니와 거대한 천치다.
그들의 일생이 또한 이 벌판처럼 단조한 권태 일색으로 도포(塗布)된 것이리라. 일할 때 는 초록 벌판처럼 더워서 숨이 칵칵 막히게 싱거울 것이요, 일하지 않을 때는 겨울 황원(荒原)처럼 거칠고 구지레하게 싱거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흥분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은 뇌성(雷聲) 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茶飯事)에 지나지 않는다. 촌동(村童)이 범에게 물려가도 그것은 맹수(猛獸)가 사는 산촌에 가끔 있는 신벌(神罰)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전신주(電信柱) 하나 없는 벌판에서 그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흥분할 수 있으랴.
팔봉산 등을 넘어 철골전신주(鐵骨電信柱)가 늘어섰다. 그러나 그 동선(銅線)은 이 촌락에 엽서 한 장을 내려뜨리지 않고 섰는 채다. 동선으로는 전류도 통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방이 아직도 송명9松明)으로 어둠침침한 이상 그 전신주들은 이 마을 동구(洞口)에 늘어선 포플러 나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흉리(胸裏)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勞役)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 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三.
대싸리 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덩이를 만나면 썩는다. 낮닭 우는 소리가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왔으니까 그저 들었달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ㆍ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리나 먼 데서 온 외인(外人),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蓬髮)이 작소(鵲巢)를 이룬 기이(奇異)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도 희귀한 겸손한 겁쟁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旅人)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國道) 연변에 있지 않는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 마을의 김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둑이 없다. 인정 있는 도둑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한 새악시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도둑에게는 이 마을은 도둑의 도심(盜心)을 도둑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地帶)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랜 동안― 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 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은 이곳 견족(犬族)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이제는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이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으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 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가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위(守衛)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良久)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본다., 밤낮 다니던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村民)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개들은 천부(天賦)의 수위술(守衛術)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 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犧牲)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전혀 알 길이 없다.
四.
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소위 승합자동차(乘合自動車)라는 것도 통과하지 않으니, 도회(都會)의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알랴?
오관이 모조리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 가운데서 나는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굴고 싶을 만치 답답해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태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아니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掩襲)하였을 때, 그의 동공(瞳孔)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忙殺)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自意識過剩)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絶頂)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 폐쇄되었다. 이렇게 한산한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躊躇)한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 그것조차가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 뜬 채 졸기로 하자.
더욱 죽겠는데 목욕이나 할까? 그러나 웅덩이 물은 썩었다. 썩지 않은 물을 찾아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 썩지 않은 물이 여기 있다기로서니 나는 목욕하지 않았으리라, 옷을 벗기가 귀찮다. 아니! 그보다도 그 창백하고 앙상한 수구(瘦軀)를 백일(白日) 아래 널어 말리는 파렴치를 나는 견디기 어렵다.
땀이 옷에 배이면? 배인 채 두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더위는 무슨 더위냐.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 도중에서 교미(交尾)하는 개 한 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人工)의 기교가 없는 축류(畜類)의 교마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 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네 동해(童孩)들에게도 젊은 촌부(村婦)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함석 대야는 그 본연의 빛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그들의 피부색과 같이 붉고 검다. 아마 이 집 주인 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세수를 해 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가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례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리고 호박덩굴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덩굴의 뿌리 돋친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너라도 좀 생기(生氣)를 내라고.
땀내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앉았자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하여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일투족을 어찌하였으면 좋을까 당황해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 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 보았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五.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村童)들을 원숭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대싸리 외(外)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는 중(中)의 웅덩이 속을 들여다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도한다. 무수한 오점(汚點)이 방향을 정돈해 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生物)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소택(沼澤) 속에 이런 앙증스러운 어족(魚族)이 서식(棲息)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버러지를 먹겠지. 그러나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버러지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 있지 않는다. 저무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動機)와 같은 모양으로들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下流)를 향하여 군중적(群衆的)으로 이동한다. 저렇게 하류로, 하류로만 가다가 또 어쩔 작정인가. 아니 그들은 중로(中路)에서 또 상류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덩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덩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 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그 웅덩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 ― 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러나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 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학자를 위한 표지이다. 야우시대(野牛時代)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습니다.―하는 마치 폐병(廢兵)의 가슴에 달린 훈장(勳章)처럼 그 추억성(追憶性)이 애상적(哀傷的)이다
암소의 뿔은 수소의 그것보다도 더 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우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反芻)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病人)인가 보다. 내 생명에 위해(危害)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審理)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는 소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렸길래 이미 위(胃)에 들어간 식물(植物)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半消化物)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해 보임이리요?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細菌) 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謙遜)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불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六.
길 복판에서 6ㆍ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赤髮銅膚)의 반나군(半裸群)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眼色), 흘린 콧물, 두른 베 두렁이, 벗은 우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ㆍ6세 내지 7ㆍ8세의 ‘아이들’임에는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遊戱)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온다. 여기는 사금파리도 벽돌 조각도 없다. 이 빠진 그릇을 여기 사람들은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는 풀을 뜯어온다, 풀― 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 간에 다시 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禁制)니까 풀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 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한 10분 동안이나 아무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본다.
10분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동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悲鳴)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중겅중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悲鳴)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박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장난감 하나가 없는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듯 불행하다.
그 짓도 5분이다. 그 이상 더 길게 이 짓을 하자면 그들은 피로할 것이다, 순진한 그들이 무슨 까닭에 피로해야 되나? 그들은 우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 ― 이 권태의 왜소(矮小) 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각각 대변을 한 무더기씩 누어 보았다. 아― 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유희였다. 그러나 그 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 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風景)과 완구(玩具)를 주소서.
七.
날이 어두웠다. 해서(海底)와 같은 밤이 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자기부패자굥ㅇ(自己腐敗作用이나 하고 있는 웅덩이 속을 실로 송사리 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臟腑) 속으로도 나로써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 떼가 준동(蠢動)하고 있나 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 졸임이 관성(慣性)의 법칙처럼 놓여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天文學)의 대상(對象)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詩想)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香氣)도 없는 절대(絶對) 권태의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彼岸)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煙氣)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별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消化)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 갔다 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 나는 이런 실례(失禮)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絶緣)된 지금의 내 생활― 자살의 단서(端緖)조차를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極) 권태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凶猛)한 형리(刑吏)처럼― 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 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懶怠)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火傷)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平床)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以上)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宇宙)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大小)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 [조선일보](1936. 5. 4∼5. 11) -
- 김해경(金海卿) : <이상선집(李箱選集)>(을유문화사.1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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