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리나라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스라엘 국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정치집회의 참가자들 중 일부가 태극기와 성조기와 함께 이스라엘 기를 흔들고 있었다. 웬 이스라엘 깃발이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뉴스 해설들을 모아 보니 그 결론은 대략 이러했다. 이들은 개신교인들이며 이 정치 집회의 목적이 자신들의 신앙과 일치한다는 표상으로 이스라엘 기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터무니없었지만 이스라엘 국기를 보는 순간 어디에서 많이 보았던 일처럼 강렬한 데자뷰(기시감)가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과거에 어디서 이 장면을 보았을까?
기도의 배반
성경에서 보았던 장면들이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무려 430년 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였다. 잔혹한 파라오의 통치 때문에 그들은 신음하고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자유와 정의를 달라는 울부짖음이었다. 단순히 목소리로만 울부짖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족 독립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을 것이며 많은 자유 투사들이 파라오의 군대에 의해 처형당했을 것이다. 이러한 울부짖음과 희생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마침내 자유를 선물하셨다. 상상할 수 없는 기적들을 동원하시면서….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광야에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권력욕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자유의 상징인 모세를 돌로 때려죽이고 이집트로 가서 다시 종이 되자고 선동하였다.
영화 이집트왕자 중.
한국인들은 1960년 초부터 1990년 초까지 무려 30여 년을 군사독재체제 하에서 지냈다. 국민 중 일부는 독재와 영합하였지만 다수는 자유와 정의를 꿈꾸고 있었다. 자유민주체제를 향한 수많은 투쟁과 피 흘림이 있었다. 한국인들 특히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앞장서서 자유롭고 정의로운 체제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다. 놀라운 것은 자유민주체제가 들어서자마자 군사독재체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옛 군사독재자를 찬양하고 군복을 입고 행군하며 공공연히 군사 쿠데타를 선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무리의 상당수가 개신교인들이며 그들이 부르는 찬양곡과 앞에서 휘날리는 이스라엘 기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들이 알아야 할 정치적 상식이 있다. 자유민주체제 하에서 군사독재체제로의 회귀를 부르짖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반역이다.
자유민주체제뿐 아니라 평화통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인들은 1945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73년 동안 남북분단의 고통으로 신음하였다. 남북이 강제로 분단되었고 이로 인한 전쟁과 독재는 한국인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한국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더욱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 그리고 평화통일로 가는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그토록 간절히 통일을 기도하였던 사람들 중 일부가 돌연 남북 화해를 비방하고 평화통일을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온갖 모략과 음해와 집회와 거짓 뉴스로, 어렵게 평화통일을 추진하는 정부와 지도자들을 비방하고 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황당해 하실까?
외세 의존
이스라엘 기를 보면서 느끼는 데자뷰 중 하나는 외세 의존이다. 하나님을 의존하기보다 강대국을 의존하는 경향이다. 이스라엘의 비극이었으면서 동시에 한국의 비극이다.
기원전 10세기경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하에서 주변 강대국과 능히 어깨를 겨눌 만큼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선택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 분단을 겪게 되었다. 남북 분단 이후 이스라엘의 두 약소국에 공통으로 나타난 것은 외세의존이었다. 남쪽의 강대국 이집트, 혹은 북쪽의 강대국인 앗수르나 바벨론에 국가의 생존을 의지하려는 사대 외교가 진행되었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민족 자주를 호소하고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촉구했지만 소용없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사대 외교에 몰두하였고 두 번 다시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을 되찾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한국의 처지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열악하다. 조선 왕조가 다윗 왕조처럼 융성했던 적도 없고 일본 제국으로부터의 독립도 한민족이 자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 남북 분단 후 남한, 즉 대한민국은 미국의 호의로 수립되었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러한 미국 의존은 더욱 강해졌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국의 군사 작전권을 외국에 맡기고 이를 아직도 회수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처량하다.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미국의 호의에 의존하는 모습도 매우 한심하다. 한반도의 통일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 상충할 수 있다. 어느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훼손해 가면서 타국의 이익을 만족시켜주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집회에서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이 우리 내정에 개입해 주기를 바라는 사대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중 상당수가 정치 집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무분별한 개신교인들이라는 게 더욱 한심하다. 우리의 운명을 강대국에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의지하라는 예언자의 호소를 무시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생각해 볼 때이다.
거짓 예언자
한국 상황을 통해 보는 이스라엘 데자뷰 중 가장 뚜렷한 것은 거짓 예언자의 존재이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아람과 전쟁을 벌이려 할 때 무려 400명의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모두 아합 왕의 승리를 예언하였다. 지금으로 치면 번영 신학 설교의 전형이다. 그러나 오직 미가야 예언자만은 아합의 실패와 죽음을 예언하였다. 이때 400명의 대표자격인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며 말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왕상 22:24). 엘리야의 시대에도 그랬지만 말세의 특징은 바로 이 뻔뻔하고 무례한 거짓 예언자들이 득세하고 이들이 성직자의 다수가 된다는 점이다.
박근혜탄핵반대집회에 등장한 십자가
한국교회는 지금 거짓 예언자들의 가르침으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 예수교를 목사교로 만들고자 하는 배교자들이 주의 종 혹은 주의 사자라는 이름으로 교회의 인간적 통치를 강화하고 있다. 세습의 예를 들어보자. 상식적인 일반 시민들조차 교회 세습을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거짓 예언자들은 이렇게 대꾸하고 있다. “그래 우리 세습이다. 왜? 뭐 어쩌라고?” 대형 교회의 부와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이 갖가지 조직을 만들고 각 분야의 전문가를 자처하면서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의 배교적 행동에 부역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과 이단 세력들과의 간격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하나님의 진노
기도의 배반, 외세 의존, 거짓 예언자들의 범람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스라엘의 노예민 세대가 보여주는 기도의 배반에 질려버린 하나님께서 마침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출 32:9-10).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기의 순간이 닥쳐온 것이다. 이 첫 번째 진노는 모세의 중보로 간신히 해소되었다. 그러나 약 900년 후 발생한 하나님의 두 번째 진노는 진실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실천되었다.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훼파되었고 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눈을 뽑힌 채 맨발로 끌려갔다. 북방의 끓는 가마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경고를 조롱하고 그들을 살해함으로써 얻게 된 결과였다.
2016년경 한국의 모습도 이와 매우 유사했었다. 가진 자들의 불의가 극에 달하고 억울하게 고통받는 자의 호소가 하늘에 닿고 있었다. 곧 북방의 끓는 가마가 기울어지리라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행히도 2018년 봄을 고비로 사태는 호전되었다. 모세처럼 나라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의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이 데자뷰에서 나타나는 확실한 차이는, B.C. 500년경 이스라엘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A.D. 2016년의 한국은 돌이킬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킨 배후에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불신과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강대국 이집트의 부와 권력을 목격했던 노예민 세대는 죽을 때까지 그 추억을 잊지 못했다. 노예민 세대를 다룰 줄 아는 소수의 가진 자들은 부와 권력을 독점할 욕심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를 뒤집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 음모의 희생자들은 노예민 문화에 물든 나이든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참다못해 이들을 광야에서 소멸하시고 오로지 광야에서 자유민으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만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분란을 일으키는 세력을 보면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군사독재체제에서 부와 권력을 독점했던 소수의 음모자들이 군사독재의 추억을 극복하지 못하는 일부 대중을 끈질기게 동원하고 있다. 각종 여론 조사를 보면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가난할수록 군사독재에 대한 향수가 강하다. 그리고 자유와 민주와 복지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교회 내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기도의 배반이며 공의의 하나님을 경멸함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감당할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돌이킬 기회가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사고 많이 나는 교차로”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사고가 많이 나는 교차로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조치를 해야 할까? 첫째는 긴급 구난이다. 교통사고가 나면 무엇보다 먼저 119를 불러 피 흘리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응급센터로 이송해야 한다. 추돌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삼각대를 설치하고 불꽃 신호기를 터트려야 한다. 사고의 이유를 따지는 것은 그 다음이다. 둘째는 제도 개선이다. 사고 잘 나는 교차로를 방치하고 계속 긴급 구난만 하는 것은 위선이다. 신속하게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이를 개선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는 의식 개혁이다. 사람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말짱 도루묵이 된다. 군사독재체제가 30여 년 동안 뿌리를 박았으니 자유민주체제를 만드는 것도 30년 이상 걸릴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 즉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실천하는 다양한 운동도 한 세대 이상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어야 한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바로 그러한 노력 중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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