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322

한철의 짧은 여름 人生 / 원종린

여름이 다가오면 여러 해 전에 길에서 만난 어떤 제자가 던진 시답잖은 질문이 가끔 머릿속에서 맴돈다. 오랫동안 공주에서 살다가 정년을 계기로 대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해의 여름으로 기억된다. 삼복더위에 무슨 급한 볼일이 생겼던지 나는 낯선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지난날의 여자 제자를 만났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는 그쪽에서 인사를 안 하면 얼굴을 마주쳐도 모르고 지나치는 일도 없지는 않다. 또 헤어지고 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만났던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기가 일쑤다. 그 제자도 그런 경우인 셈인데 다만 그때 나에게 던진 질문 한 토막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는다. 서로 근황을 묻는 인사가 끝나고 나자 그 제자는 나에게 "선생님은 여름하고 겨울하고 어느 쪽이 더 좋으..

수필 2023.07.15

권태/이상

권태(倦怠) 이상(李箱) 一. 어서―차라리 어둬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僻村)의 여름―날은 자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東)에 팔봉산(八峰山).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農家)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덩굴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 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는 백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수필 2023.07.05

태극기, 이스라엘 기, 그리고 출애굽의 데자뷰/백종국

어느 날 우리나라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스라엘 국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정치집회의 참가자들 중 일부가 태극기와 성조기와 함께 이스라엘 기를 흔들고 있었다. 웬 이스라엘 깃발이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뉴스 해설들을 모아 보니 그 결론은 대략 이러했다. 이들은 개신교인들이며 이 정치 집회의 목적이 자신들의 신앙과 일치한다는 표상으로 이스라엘 기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터무니없었지만 이스라엘 국기를 보는 순간 어디에서 많이 보았던 일처럼 강렬한 데자뷰(기시감)가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과거에 어디서 이 장면을 보았을까? 기도의 배반 성경에서 보았던 장면들이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무려 430년 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였다. 잔혹한 파라오의 통치 때문에 그들은 ..

수필 2023.06.15

오월/피천득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실료애정통고) 사랑을 얻음도 고통이요 사랑을 잃음도 또한 고통이다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

수필 2023.05.31

천국과 인간세계 외 짧은 수필 두편/신길우 수필가

천국과 인간세계/신길우 어떤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갔다. 신전 앞에는 여러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느님은 들어오는 사람들을 차례로 맞이하여 그들의 전생의 삶의 선악(善惡)과 공과(功過)에 따라 새로운 삶의 길로 배정해 주고 있었다. 그가 하느님 앞에 서자, 하느님은 그의 전생을 살펴보고는 천국으로 가겠는가 아니면 다시 인간세계로 가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이렇게 되물었다. “천국은 어떤 세상인가요?” 그러자, 하느님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인간세계는 앞일이나 장래를 모르고 사는 곳이고, 또 일을 하고 노력해야만 사는 세상이지. 하지만, 천국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즉각 이루어지는 세상이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저..

수필 2023.05.02

예수님과 피묻은 십자가만 전하자/ 이광수 목사 신앙 수필 '나의 주장'/부암로교회 원로

지난 주일 오전 11시 예배 때 일이다. 설교를 L.A에서 은퇴하신 원로 목사님께서 전하셨다. 젊은이처럼 힘차게 다윗에 대해 설교 하셨다. 설교를 마무리 하면서 모국 정치에 대하여 언급 하시고 끝내셨다. 그 순간 속으로 중얼거렸다.“저 말은 하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라고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에서까지 제자들의 관심은 정치적인 것, 즉 로마로 부터 독립 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오직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 하셨다. 설교는 순수한 말씀만 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설교가 아닐까? 바울 사도는 헬라의 수도 아덴에서 설교 하였다. 그곳에서 에비구레오와 변론 했..

수필 2023.04.29

청에 젖다// 안 희옥(제9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소리를 따라 새떼가 날아오른다. 천변의 갈대들은 중모리로 춤을 추고 만추의 은행잎이 꽃비처럼 흩날린다. 허공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소리가 강물처럼 유장하다. 강이 바라보이는 정자에서 대금연주가 한창이다. 가랑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소리에 취해 하나 둘 모여 든 사람들로 여남은 평 되는 마루가 빼곡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애절한 소리에 듣는 이들의 가슴도 함께 저릿해진다. 무(無)의 공간을 꽉 채운 팔색조 같은 소리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한이 서려 있다. 대금에는 바람을 불어넣는 취구와 음정을 나타내는 여섯 개의 지공이 있다. 취구와 첫 번째 지공 사이에 난 구멍을 청공이라 한다. 이곳에 떨림판 역할을 하는 청을 붙이는데, 갈대 속의 얇은 막을 뽑아내어 만든다. 청은 대금의 소리를 더욱 신비하고..

수필 2023.04.27

외국땅에서 초라하게 살다간 한 여인/정희숙 수필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서 누릴 복이 정해져있는가? 파라다이스의 꿈을 그리며 더 좋은 복, 더 큰 꿈을 그리며 건너온 이곳 미국, 어느덧 3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후덥지근하고 비릿한 바다 냄새를 실은 바람이 탐스럽게 매달려있는 코코넛 열매를 당장이라도 땅바닥에 떨어뜨려 버리려는 듯 주위를 맴돌다가 사라지는 플로리다 한 여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S라는 여인은 자그마한 키에 당차고 바지런 하며 얼굴은 항상 미소를 머금고 활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신앙심도 대단하여 모두들 힘들어 하는 외국생활에 슈퍼 우먼처럼 살아갔다. 하지만 혼자 살기엔 고독하고 외로웠던 S는 아는 분의 소개로 누군가를 알게 되었다 그저 행복하기만 했고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니 지금..

수필 2023.04.23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박완서

신나는 일 좀 있었으면 가끔 별난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고 싶은 충동 같은 것 말이다. 마음 속 깊숙이 잠재한 환호에의 갈망 같은 게 이런 충동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샌 좀처럼 이런 갈망을 풀 기회가 없다. 환호가 아니라도 좋으니 속이 후련하게 박장대소라도 할 기회나마 거의 없다. 으례적인 미소 아니면 조소. 냉소. 고소가 고작이다. 이러다가 얼굴 모양까지 얄궂게 일그러질 것 같아 겁이 난다. 환호하고픈 갈망을 가장 속시원히 풀 수 있는 기회는 뭐니뭐니 해도 잘 싸우는 운동경기를 볼 때가 아닌가 싶다. 특히 국제경기에서 우리 편이 이기는 걸 TV를 통해서나마 볼 때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런 일로 신이 나서 마음껏 환성을..

수필 2023.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