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솔직한 신앙생활/김윤환

헤븐드림 2024. 2. 18. 10:25



솔직한 신앙생활/김 윤 환


우리는 흔히 솔직하다는 것과 정직하다는 것과 진실하다는 것의 차이를 모호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때로 솔직하니까 정직한 것이고, 정직하니까 진실된 사람으로 오해하는지도 모르죠.
그러한 오해는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종종 발견됩니다.
교회모임이나 봉사활동에 소극적인 교우들에게 모임에 참여를 권유하다보면 대개 바쁘거나 아직 때가 아니라고 둘러댑니다. 물론 진짜 긴요한 용무가 있을 수는 있겠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빠지는 사람이 늘 빠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을 탓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매우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또 그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솔직한 심정은 대체로 이러합니다
'솔직히 일요일은 좀 쉴 필요가 있지 않느냐?'
'솔직히 주일은 예배가 우선 아니냐?'
'솔직히 교회 일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피곤하다'
'솔직히 집사 권사 장로들이라고 다 잘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솔직히 기도와 예배참석과 찬송이면 신앙생활에 기본은 하는 것 아니냐? '
'솔직히 교회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괜히 구설수나 논쟁에 휘말리기 일수다'
'솔직히 조용한 신앙생활이 좋지 않느냐?'
'솔직히 밖에서는 그리 경건하지 못한데 교인들과 봉사니 성경공부니 모임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솔직히 모든 것이 귀챦다'

자, 이제 위의 언급한 솔직함 들에게 물어보죠. 과연 이 솔직함들이 진실로 정직한 걸까요,  
교회 제반 활동에 소극적인 교인들의 대다수 솔직한 변명은 거의 한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사람들과 별로 구분되지 않는 육적인 감정의 솔직함이라는 것입니다.  
육(肉)적인 자기감정의 솔직함은 사실 본능에 가까운 자기방임이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고 직분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귀한 약속이자 자기변화에 대한 선언입니다.
자기(자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에 충실하겠다는 당시의 결단을 육적인 솔직함에 묻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자기감정, 즉 자기 육신에 솔직하다는 것은 어쩌면 영적으로 거듭나고자 자신의 결단을 망각하는 일이고, 이는 결국 신앙성장의 정체를 빚어 거듭남의 기회를 잃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주님이 그 육신의 옷에 가려진 영을 살리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자기 외투에만 온갖 신경을 쓰는 자녀에게 정신적 깨우침을 주는 좋은 책과 좋은 친구를 소개하기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육적인 본능에 솔직하기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인격과 이성에 솔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영에게 솔직해봅시다. 당당해 보자구요, 그리하여 자신의 신앙적 성숙을 가로막는 육신의 거추장스러운 솔직함을 과감히 털어버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정직하고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말할 때, 행동할 때, 오늘도 나는 육에 충실한가, 영에 충실한가 숨을 고르며 돌아보고 하나님이 원하는 가장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솔직함은 반드시 주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함으로서 열매맺는 자를 우리 주님은 칭찬하시는 거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마7:19)"라고 경고하시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니라(마7:21)"라고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열매맺는 영에 솔직해질 때입니다.  
작은 실천이 곧 구원의 첩경입니다.
이번 주부터 우리 교회의 엔돌핀 에너지는 자신이 책임진다는 각오로 각종 모임에 열심을 냅시다.
우리 모두 신앙적 이성에 솔직해질 것을 제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