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산책 392

봄의 첫 장/권여원

봄의 첫 장/권여원 매화나무 아래 서면 허공에 불이 켜진다 겨우내 하늘을 마시며 자란 꽃잎들 가볍고 여린 실핏줄로 터지고 있다 살점을 떼어내듯 분홍빛 지문들이 떨어지는 언덕 위의 붉은 잔 나무는 피를 흘려도 아프다 소리치지 않는다 산자의 어깨에 내리는 저 핏방울 창공에 붉은 물결 넘치는 동안 바람은 꽃망울을 넘어가기 위해 가벼워진다 차디찬 땅끝, 언약을 바라본 이들에게 온기가 돈다 꽃잎의 살점은 우리의 허물을 갚아주신 은총의 무게 내 몸 어딘가 당신을 향한 연분홍 촉수가 켜진다 권여원 시인

서정산책 2021.10.09

8월의 시/오세영

8월의 시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하는 달이다.

서정산책 2021.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