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첫 장/권여원 봄의 첫 장/권여원 매화나무 아래 서면 허공에 불이 켜진다 겨우내 하늘을 마시며 자란 꽃잎들 가볍고 여린 실핏줄로 터지고 있다 살점을 떼어내듯 분홍빛 지문들이 떨어지는 언덕 위의 붉은 잔 나무는 피를 흘려도 아프다 소리치지 않는다 산자의 어깨에 내리는 저 핏방울 창공에 붉은 물결 넘치는 동안 바람은 꽃망울을 넘어가기 위해 가벼워진다 차디찬 땅끝, 언약을 바라본 이들에게 온기가 돈다 꽃잎의 살점은 우리의 허물을 갚아주신 은총의 무게 내 몸 어딘가 당신을 향한 연분홍 촉수가 켜진다 권여원 시인 서정산책 2021.10.09
8월의 기도/임영준 8월의 기도/임영준 이글거리는 태양이 꼭 필요한 곳에만 닿게 하소서 가끔씩 소나기로 찾아와 목마른 이들에게 감로수가 되게 하소서 옹골차게 여물어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하소서 보다 더 후끈하고 푸르러 추위와 어둠을 조금이라도 덜게 하소서 갈등과 영욕에 일그러진 초상들을 싱그러운 산과 바다로 다잡아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서정산책 2021.08.12
우리 생명 있기 전/김대원 우리 생명 있기 전/김대원 우리 생명 있기 전 그 전, 그때 저 하늘 저 품안에 저 별 저 달 있었던가 그 시절 그때에서 솔바람, 꽃숨결이 지금처럼 불었던가 푸른 솔 흰 두루미 뭉게구름 꽃무지개 청아한 산새 노래 푸른 바다 흰 갈매기 철썩철썩 파도 소리 그 시절 그때에도 지금처럼 있었던가 우리 생명 있기 전 그 전 그때도. 서정산책 2021.08.06
8월의 시/오세영 8월의 시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하는 달이다. 서정산책 2021.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