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은발의 단상/최기춘

헤븐드림 2021. 11. 21. 09:35

 

거울에 비친 은발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60세까지만 해도 흰머리가 서릿발 같아 감추고만 싶었는데 고희를 넘긴 지금은 은발이 인생의 계급장 같아 빛나 보인다. 고희란 두보의 ‘곡강시’에서 비롯된 말로 옛날부터 70세까지 살기가 드문 일이라는 뜻에다. 두보가 활동하던 1200년 전에는 70세면 오래 산 나이지만 지금은 평균 수명에도 훨씬 못 미치는 나이다. 그래도 70이 넘으면 달마다 늙는다고 한다. 갈 길이 그리 멀지 않은 나이다.

고희는 인생 4계절 중 가을이다. 해 질 녘의 저녁노을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잎과 비교된다. 가을 산에 올라 일렁이는 황금들판을 바라보면 이른 봄부터 농부들이 씨 뿌리고 가꾼 땀의 결실들이 풍요롭다. 가을은 수확의 기쁨도 크지만 왠지 마음 한편이 허전해지는 계절이다. 가을밤에는 유난히 구슬프게 우는 풀벌레 소리, 귀뚜라미 울음소리, 가랑잎 구르는 소리들이 가슴을 파고들며 옛 추억을 떠 올리게 한다.

그래서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며 홀로 사는 사람들의 옆구리를 더욱 시리게 하는 계절이다. 붉게 물든 가을의 저녁노을은 한낮의 태양보다 더 뜨겁게 이글거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에 묻힐 것을 생각하면 허망하다. 아름답게 물든 단풍도 머지않아 나무와 작별을 하고 뿌리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가을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단풍잎들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봄부터 같이 지내던 어미나무와 이별의 아쉬움이 있을 법한데 아쉬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이미 이별의 약속이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즐거운 파티에라도 가려는 모습으로 곱게 차려입고 소슬한 가을바람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며 작별한다. 그간 꼼짝 못하고 한곳에서 매달려 지낸 한을 풀려는 듯 사방으로 너울너울 춤을 추며 유유자적 한다.

낙엽의 모습은 마치 여행을 떠나는 방랑자를 연상케 한다. 고추잠자리와 경쟁이라도 하듯 공중제비를 돌다가 어디론가 가버리는 녀석들도 있다.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자동차기 범람하는 도로 위를 뒹구는 처량한 녀석들도 있다. 얌전한 새색시마냥 한눈도 팔지 않고 사뿐히 뿌리로 내려앉아 효심을 다하려는 듯 알몸이 된 나무의 뿌리를 감싸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다.

낙엽들이 바람에 날려 뿔뿔이 흩어지는 것 같아도 제 뿌리에 내려앉은 낙엽들이 참 많다. 그래서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 했나 보다. 계절마다 낙엽과 나이 들어가는 내 인생을 동일시하며 때로는 울적해 한다. 하지만 시들어 떨어지는 낙엽의 몸짓은 얼마나 고맙고 성스러운 것인가. 그 몸짓을 생의 소멸로만 읽어온 내 사색이야말로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낙엽은 봄과 여름엔 푸르름과 녹음으로 산에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린다. 가을이면 노랑, 빨강으로 멋진 수를 놓기도 한다. 그리고 뿌리에 내려앉은 낙엽들은 뿌리를 감싸주고, 알몸으로 엄동설한을 외롭게 보내는 나무들에게 따뜻한 이불이 되어 준다. 또한 내년 봄이면 새싹을 틔우는 데 필요한 영양을 공급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낙엽이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 찬사를 보낸다.

어린 시절에는 곱게 물든 단풍잎을 책갈피에 끼워 두었다가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넣어 보내기도 하고 창문을 바를 때 같이 붙여 놓았던 생각이 난다. 나도 낙엽처럼 살고 싶다. 멋있고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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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머슴들에게 영혼을〉이 있다. 현재 대한문학작가회, 영호남수필, 전북수필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