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물론이고 시와 소설, 평론, 논문, 번역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한흑구(본명 한세광韓世光, 1909-1979)는 포항을 대표하는 문인이다. 태어난 곳은 평양이지만 1948년 포항으로 이주한 이후 1979년 별세할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포항에서 흐름회(1967), 포항문인협회(1970),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1979)를 창립하며 포항문학의 토대를 닦았다. 이를 기리는 많은 기념물이 포항에는 남아 있다. 청하 보경사 숲에는 한흑구 문학비가 1983년에 건립되었고, 2012년에는 호미곶 구만리에 한흑구 문학관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두 권의 ‘한흑구 문학선집’이 만들어져, 그의 문학적 자취를 찾아보려는 이들에게 훌륭한 지침 역할을 해준다.
… 식민지 시기 한흑구는 참으로 단단한 정신과 해박한 지성으로 민족의 고단한 현실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통찰한 수필을 남겼다.
그것은 한흑구의 본래 성품에서 비롯된 바도 있겠지만, 식민지라는 시대 상황이 서정보다는 지성을 긍정보다는 비판을 요구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의 아픔을 탁월한 수필로 승화시킨 한흑구는,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 고고하게 떠올라 날카롭게 지상을 응시한 한 마리 검은 갈매기였던 것이다.
포항에서 활동하던 무렵의 한흑구는 “온후하고 은둔적인 사색가”(서정주), “겸허와 달관으로 인생을 값있게 보내신 분”(수필가 빈남수), “겸허와 진실이 체질화된 사람”(손춘익)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평가는 동양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 중 하나인 은자(隱者)를 떠올리게 한다. 한흑구는 부귀공명에 집착하여 자신의 지조와 생명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속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형이었던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유유자적하는 갈매기와 명리를 초월한 한흑구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 흑구(黑鷗·검은 갈매기)라는 필명이 만들어진 계기는 낭만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필명에는 조국 잃은 청년의 짙은 슬픔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인한 신념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청년 한세광이 1929년 3월 대양환(大洋丸: 2만 톤급의 여객선)을 타고 아버지 한승곤이 있는 미국으로 갈 때, 검은색 갈매기 하나가 일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고 한다. 한흑구는 그 검은 갈매기와 자신의 모습이 두 가지 측면에서 같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옛 길을 버리고 새 대륙(大陸)을 찾아서 대양(大洋)을 건”너는 개척자적인 모습이고, 두 번째는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랑”하는 유랑민의 모습이다. 흑구라는 필명에는 당시로는 드물게 시카고의 노스파크대학(North Park College)과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Temple University)에서 각각 영문학과 신문학을 공부한 선구자의 자부심과 조국을 잃어버린 식민지인의 비애가 담겨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흑구의 흑에는 “외로운 색, 어느 색에도 물이 들지 않는 굳센 색, 죽어도 나라를 사랑하는 부표(符表)의 색이라는 생각에서 ‘흑(黑)’자를 택하기로 했다.”(나의 필명의 유래, ‘월간문학’, 1972.6)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변치 않는 애국심과 지조가 아로새겨져 있다.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에 건립된 흑구문학관의 전시물.
해방 이전 한흑구는 필명 흑구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열혈청년이었다. 한흑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한승곤 목사를 빼놓을 수 없다. 기독교적 민족주의자인 한승곤은 미국에 간 지 3년만인 1919년에 흥사단 본부 의사장에 선임될 정도로 흥사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흑구도 미국에서 1930년 3월 흥사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으며, 1934년 귀국한 이후에도 평양에서 동우회 활동을 이어갔다. (한흑구의 흥사단 활동에 대해서는 한명수의 ‘한흑구는 민족시인이다’(포항문학 46호, 2019)를 참고)
일제 시기 민족운동은 크게 무장투쟁론과 실력양성론으로 나눠볼 수 있다. 무장투쟁론을 대표하는 이는 단재 신채호이며, “부지깽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는 명제로 요약되는 그의 사상은 의열단의 투쟁 선언문으로 작성한 ‘조선혁명선언’(1923)에 잘 나타나 있다. 실력양성론은 조선이 식민지가 된 이유를 실력의 부족에서 찾고,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다방면에 걸친 민족계몽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실력양성론을 대표하는 이가 도산 안창호이며, 그의 사상을 실천하는 단체가 바로 흥사단이다. 한흑구가 도산의 사상에 연결되어 있음은 도산의 체포 소식을 듣고 지은 ‘잡혀간 님-도산 선생님께 드림’(新韓民報, 1932.10.6.)이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벌써 벌써 주고 간 님의 뜨거운 맘-아! 나를 어찌 떠나리이까?”라고 절규하는 이 시는 한흑구에게 도산이 거의 육친화 된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1937년에는 아버지 한승곤 목사와 함께 흥사단의 후신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고통을 받는다. 이 때 일제는 도산 안창호를 비롯해 180여명을 검거하였으며, 도산 안창호는 이 사건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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