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은 ‘천국 지향적’이다. 전 장(障)이 ‘천국과 종말’에 관한 내용으로 일관된 ‘요한계시록’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 그것에 대한 가르침이 배어 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이 대대에 잊지 않고 지켜야 할 3대 절기에 ‘유월절(그리스도의 구속)’, ‘맥추절(성령강림)’과 함께 천국을 예표하는 ‘수장절(출 23:14-16)’을 포함시킨 것도 의미심장하다.
신약에서도 소위 ‘천국 윤리’라고 일컫는 ‘산상수훈(마 5-7장)’을 비롯해 예수님의 가르침 중 다수가 천국에 대한 내용들이다.
이 가르침들은 천국이라는 보물을 사기 위해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치우고(마 13:44), 천국 들어가는데 손, 발, 눈이 장애가 된다면 그것들을 제거하고(막 9:43-47),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eunuch, 鼓子, 마 19:12)가 된다는 말씀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인간의 공로, 극기(克己)와 고행(苦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천국을 ‘재산, 보물, 손, 발, 눈, ’만큼이나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 것처럼, 천국은 예수를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가 들어간다.)
특별히 그가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 가르친 모든 내용이 천국에 관한 것들이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유컨대 이는 세상을 하직하는 자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천국 지향적인 그리스도인
이렇게 ‘천국 중심의 신앙’을 가르침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천국 지향적’이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의 종착지를 ‘육체의 죽음’이 아닌 ‘천국’에 두며, 그들의 지상 생애는 그곳을 목적지로 한 ‘나그네 여정(旅程)’으로 인식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 11:13).”
그들에겐 ‘땅을 위한 천국(Heaven for earth)’이 아니라 ‘천국을 위한 땅(earth for Heaven)’이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지상(至上) 소원이 ‘육체를 벗고 속히 그곳으로 가는 것(고후 5:8)’이라고 한 데서도 그리스도인의 천국지향의 강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천국 지향적 신앙’을 몽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곧 염세주의자의 망상 혹은, 세상의 경쟁에서 뒤진 열등가들의 도피처쯤, 아니면 생존 소망이 끊어진 임종자(臨終者)들의 피안(彼岸)정도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천국(Heaven)’은 ‘저 너머의 곳(beyond this world)’이 아닌 지금 이 땅에서 구현돼야 할 이상이며, ‘천국 신앙(Faith In Heaven)’은 그것을 위해 이바지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천국’은 그들에게 있어 기껏 ‘현세의 삶을 고양하는 하나의 기호(symbol, 記號)’일 뿐이다.
그러나 ‘천국’은 염세주의자의 도피처도, 경쟁에서 뒤쳐진 열등가들의 피난처도 아니고, 소망 없는 자들의 피안도 아니다. 더더구나 현실의 삶을 고양시키는 ‘기호’일 수 없다. ‘천국’은 ‘현세’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현실(reality)이다.
날마다 그곳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지며, 또한 그들은 믿음과 기도로 그곳을 호흡한다. 천사들은 지상과 그곳을 오르내리며 하나님의 명령을 이 땅에 시행하며(창 28:12, 단 9:21; 10:13 마 18:10, 눅 1:26) ‘구원얻을 후사들(heirs of salvation)’을 섬긴다(히 1:14).
◈천국 지향은 염세주의가 아니다
성경이 ‘천국 중심의 신앙’을 말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염세주의(pessimism, 厭世主義)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지상의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그것을 소홀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천국’은 언제나 ‘지상’과 긴밀히 연결돼 있으면서, 둘이 서로를 구축해 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 곧, ‘그리스도의 구속 예정’이 이 땅에서 성취된다(마 6:10)는 점에서 그렇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요일 4:14)”,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 10:7).”
그리스도인의 ‘지상의 삶’ 역시 ‘하늘의 소명(召命)’을 실현하는데 목적이 있고, 그 엄중한 소명의식이 그를 나태하게 하거나 사사로운 삶에 매이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 내심 고생스런 그의 ‘지상 생애’를 속히 마감하길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복음을 위해 자신을 세상에 남겨두길 원하신다는 것을 안 후 그런 자신의 갈망을 기꺼이 회수했다(고후 5:8-9).
이 역시 그가 ‘하늘의 소명’에 충실히 응답한 결과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출생마저도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고 믿었으며, 그 일에 투신하는 것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삼았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갈 1:15-16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이러한 그의 ‘천국 지향성’에는 공격자들의 주장처럼, ‘염세주의(pessimism, 厭世主義)’의 그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가 없다. 오히려 그것이 그의 지상의 삶을 더욱 근면하고 활기차게 만들었다.
특히 ‘위로부터의 상급에의 초대’는 그로 하여금 더욱 그의 삶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천국 상급’에로 우리를 초대하며 우리를 분발시킨다. 여기엔 ‘염세주의’ 따위는 깃들 곳이 없다.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눅 19:16-19).”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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