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누가복음 2장 1절~14절
예수는 누구인가?
이천년전 사람들은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위대한 선지자 또는 탁월한 랍비, 미라클메이커 또는 혁명가, 심지어 마법사나 사기꾼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와 같은 위대한 인류의 스승 쯤으로 여긴다.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서 아예 관심 조차 없다. 왜냐하면, 예수 없이도,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인(크리스천,기독교인)들은 모름지기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자로 고백하는 이들이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예수에 대한 지식을 묻는게 아니다. ‘당신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묻는 질문이다. ‘예수를 믿기 전과 예수를 믿은 후에 당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삶에서 만나는 문제와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예수는 당신이 남과 다른 선택을 하는 분명한 이유가 되는가?’를 묻는 질문이다. 이쯤 되면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이 질문은 예수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당신의 삶에서 체험한 신앙고백을 묻는 까닭이다.
오늘날, 복음이 삶에서 만나는 문제들 앞에서 무기력한 이유는 예수에 대한 막연한 고백 때문이다. 예수에 대한 추상적인 고백은 가진 위기의 순간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맹신이나 광신과 같은 그릇된 신앙에 빠지기 쉽다.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신앙이 주는 참된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머물게 한다는 점이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누가복음의 독자들이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길 바란다. 또,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를 당당히 고백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전하기 원하셨던 영원한 가치를 추구함으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맛보는 삶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가이사 ‘아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
1절~5절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성탄절에 주로 읽혀지는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탄생을 전하는 ‘성탄절 설교용’ 문구가 아니다. 이 말씀은 앞서 언급한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이요, 앞으로 펼쳐질 예수복음의 핵심을 함축해서 미리 보여주는 누가복음의 예고편과 같은 말씀이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오랜 내전을 종식하고 로마를 공화정(共和政)에서 황제정치(帝政)으로 바꾸면서 최초의 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던 ‘아우구스투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Augustus, B.C 63~A.D 14)’를 가리킨다. ‘아구스도’라는 이름은 숭고한 자, 존귀한 자, 곧 신의 대리인이요, 신의 아들을 뜻하는 정치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아구스도’란 ‘그리스도’에 상응하는 호칭이다. 가이사아구스도는 그 이름에 걸맞는 탁월한 리더쉽으로 지중해 연안과 아시아, 영국까지 제국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그는 일명 ‘팍스로마나(Pax Romana)’라고 일컫는 약 이백년 동안 이어지는 로마제국의 태평성대를 열어 놓은 장본인이다. 이천년전 세계는 로마제국의 천하요, 곧 가이사아구스도의 세상이었다. 그가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한 까닭은 식민지의 호구조사를 통해 세금을 원활하게 징수함으로 자신의 통치와 권력를 강화하고 로마의 질서를 온 천하에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그 때에’ 누가복음은 가이사아구스도는 ‘신의 아들’이 아니며 ‘세상의 주권자’도 아니라고 선언한다. 누가복음은 로마제국의 속국 가운데 하나였던 유대 변방의 이름 없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의 주관자’요, 세상을 구원하고 통치할 진짜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고대자본주의'와 '황금만능주의'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가이사아구스도의 천하를 살고 있던 당시에 사람들에게 터무니 없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허무맹랑하게만 들리던 누가복음의 증언은 그리 오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가이사아구스도의 드넓은 영토와 화려한 업적, 그의 강력한 군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멸하고 말았다.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은 무엇일까? 역사학자들은 로마제국주의가 추구했던 식민지를 통한 영토확장과 노예제도를 통한 고대자본주의의 한계를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또한 지나친 부와 사치로 인한 도덕적 타락과 식민지 노예들과 도시국가들의 저항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폭력적인 착취와 정복으로 인간을 노예화시키고 부와 권력을 유지하던 고대자본주의에 한계로 인해 로마의 제국주의는 붕괴하고 말았다. 이와 달리 사랑과 자비를 통한 인류의 형제애를 설파했던 예수의 복음은 지난 이천년 동안 열방을 통치하는 사랑의 왕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를 통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와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천년전 누가복음이 선포했던 ‘가이사’가 ‘아구스도’가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참으로 진리였다.
오늘날 로마의 황제는 사라졌지만 돈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21세기에 우리는 돈이 황제 노릇을 하는 황금만능주의(배금주의, 물질주의 mammonism)시대를 살고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로마제국의 통치방식은 ‘식민지확장’과 ‘노예제도’를 통해 강자가 약자를 폭력으로 약탈하는 ‘고대자본주의(capitalism in the ancient world)’였다. 오늘날, 소위 ‘배금주의’라 일컫는 ‘근대자본주의’는 무한경쟁을 앞세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를 통해서 ‘빈익빈부익부’라는 사회적 불균형을 만들어 냈다. 한마디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힘의 논리가 온 세상을 주름잡고 있다. 따라서, 이천년전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신음한 것과 같이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황금만능주의에 순응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우리는 ‘고대로마제국’과 ‘현대물질주의’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물질과 폭력이 다스리는 세상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참된 주권자(그리스도)는 물질, 폭력이 아니라 ‘예수의 정신’, 곧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삶’이 증거하는 '예수복음'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탐욕과 폭력이 통치하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사랑의 법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무한경쟁의 세상 속에서 나눔과 섬김을 여전히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르는 대명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입술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가이사아우스도’가 추구했던 돈과 명예, 권력과 성장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
삶의 우선순위
6절~7절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쌓아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베들레헴 동네에 아기예수를 잉태한 요셉과 마리아가 쉴 곳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손님들이 너무 많아 숙박시설이 부족한 탓이 아니였다. 그들이 아기예수가 출산할 장소를 제공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따로있다. 그것은 잉태된 아이가 누구인지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했기 때문이다. 만일, 태어날 아이가 장차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새세상을 열어 갈 새희망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아무리 손님이 많고,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비좁더라도 그를 위한 공간을 예비해 두었을 것이다.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라'는 말씀은 이천년이 지난 오늘, 기독교가 세계최대의 종교로 성장한 이 시대에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사관(舍館)은 숙소 곧 집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집이다. 하지만, 탐욕과 경쟁의 황금만능주의를 신봉하는 현대인들에게 '아기예수'를 모실 여유와 공간은 없다. '늘 쫓기는 삶'으로 분주한 현대인들에게 주님과의 관계는 언제나 뒷전이다. 사랑과 평화, 섬김과 나눔은 삶의 우선순위에 항상 밀려난다.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요, 의미와 보람은 나중이다. 옳고 그름 보다는 손해냐 이익이냐를 먼저 계산한다.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 따위는 나의 계획과 사람들의 평판 보다 늘 뒷전이다. 공동체와 타인에 대한 배려는 개인의 문제가 먼저 해결된 후에나 한번쯤 고려해 볼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진실과 정의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들은 늘 '현실적'이라는 명분 앞에 꿈 같은 이상(理想)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경쟁으로 지치고 피곤한 현대인들의 삶에 예수께서 거하실 여유와 공간은 없다. 그래서 예수는 여전히 문전박대를 당하며 문밖에 서 계신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과 예수를 머리로 모시고 있는 교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인들은 마치 장자의 축복권을 밭죽 한그릇에 팔아버린 창세기의 쌍둥이 형 ‘에서’처럼 눈앞에 이익에만 급급하다가 감사와 기쁨, 의미와 보람과 같은 삶의 진정한 가치들을 잃어 버린채 살고 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이 삶의 주관자이시요,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믿는다면, 아무리 바쁘고 급해도 예수를 삶에서 이렇게 박대할 수 있을까, 이미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마음에는 더이상 사랑과 평화와 같은 영원한 가치는 깃들 수 없다.
목자의 경험이 없는 자는 예언자가 될 수 없다
8절~9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는 왜 하필이면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했을까?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유대의 격언 가운데 "목자의 경험이 없는 자는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 만큼 목자란 아주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는 직업이다. 위대한 영도자 '모세'와 위대한 임금 '다윗'이 모두 전직목자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목자의 일을 수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들의 습성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민족의 지도자로써의 자질과 역할을 체득했을 것이 분명하다.
양떼목장으로 유명한 대관령에 가면 양에게 직접 먹이를 주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그곳에서 비로소 양들의 숨겨진 실상을 보게 된다. 푸른 초원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그래서 한없이 온순해 보이는 양은, 사실 집착과 습관이 매우 강하고 고집스러운 짐승이다. 양들은 마시던 물만 마시고 먹던 풀만 먹는다. 광야의 물은 대부분 빗물이 내려 고인 웅덩이라 쉽게 오염되기 십상이다. 해서, 양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오염된 물로 인해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목초지에 있는 풀을 뿌리끝 까지 먹어 치워서 결국 초장을 황패하게 만들고 만다. 그래서, 지혜로운 목자는 적당한 때를 맞춰 맑은 시냇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양들을 강제로 이주시켜야 한다. 목자의 선한 인도로 양무리의 운명이 결정된다. 천사가 밤에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바로 예수께서 탐욕과 착취 세상 속에서 유리하고 방황하던 양무리와 같은 이스라엘을 사랑과 평화의 푸른초장 맑은 물가로 인도해 내실 참된 목자가 되심을 예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양은 아주 특별한 가축이다. 양고기는 최고의 식량이며, 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와 버터는 중요한 영양공급원이다. 양의 털은 광야의 추위를 지켜 주는 의복이 되고, 양의 가죽은 천막의 재료가 된다. 한마디로 양은 유목민들에게 의․식․주를 공급하는 생계수단이요, 생명(삶)자체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양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사에 쓰이는 대속제물이기도 했다. 천사가 양떼를 치던 목자에게 나타나신 까닭은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뚜렷하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다른 삶의 차원으로 양무리를 이끌어 내실 이스라엘의 목자요, 생명을 공급하는 삶의 근원이요, 무엇보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알리는 가장 분명한 ‘표적’이요, 무엇보다 앞으로 펼쳐질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새역사의 시작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과 같다.
길 잃은 목자
10절~11절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목자들에게 전한 천사의 메시지는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증거한다. 천사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한마디로 ‘복음’이다. 복음은 바울이 로마서 1장 서두에 기록한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구원자’라는 뜻이다.(이 복음은...그리스도 예수시라) ‘구세주(the Savior, the Messiah, the Redeemer)’ 라는 말은 ‘물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내다'는 뜻이다. 탐욕으로 통치하는 고대제국주의로 인해 갈등과 전쟁, 수탈과 고통 속에서 살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사랑과 평화가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을 통해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고 마침내 새로운 삶을 얻게 하시리라는 약속이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는 복음의 핵심을 명료하게 증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앞서 살핀대로, 당시 온 세상의 통치자는 '로마제국의 황제'였다. 부와 명예, 성공과 번영이 오직 로마제국 황제의 발 아래 있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누가복음은 천사의 음성을 통해서 세상의 주인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예수라고 선포하고 있다. 비록 현실은 물질과 폭력을 앞세운 로마제국의 황제가 왕노릇하고 있지만, 세상의 참된 주관자는 ‘삶이 된 말씀’이신 예수시라는 놀라운 예언이다.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엄청난 박해와 모진 핍박을 받아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오늘날 물질과 탐욕이 다스리는 무한경쟁의 세상 속에서 사랑과 희생, 나눔과 섬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감내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결코 헛된 꿈이 아니였다. 천년만년 영원무궁할 것 같던 로마제국은 오래지 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소멸되고 말았다. 천사의 증언은 진실이었고 박해과 고난을 감수했던 그들의 믿음이 옳았다.
오늘날 남녀노소, 지위고하, 장소와 여건을 불문하고 너 나할 것 없이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 복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돈’이다. 현대인들의 행복과 성공의 척도는 돈이다. 오늘 우리는 전지전능한 돈(?)을 그리스도로 섬기는 황금만능주의시대를 살고 있다. 이천년전 가이사를 아구스도로 추앙한 것처럼 기꺼이 돈을 그리스도로 섬기며 살아간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돈을 섬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돈에게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으며 돈이 참된 행복과 구원을 준다고 믿는 까닭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시한번 확인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돈이 삶의 주관자이요 물질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온전하게 구현하신’ ‘오직 예수만’을 그리스도로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천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하지만 물질과 탐욕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 깊이 잠들어 있는 ‘길 잃은 목자들’에게 천사의 세미한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희생, 기독교의 본질
12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천사를 통해서 이 말씀을 거듭해서 두 번씩이나 강조한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Bethlehem)은 히브리어로 ‘밥집’이요, 아람어로 ‘푸줏간’이다. 강보는 아기를 감싸는 포대기요. 구유는 말과 소가 먹는 여물통 곧 밥그릇이다. "보따리에 쌓여 밥그릇에 뉘인 아이가 주는 표적"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장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밥으로 오셨다. 익숙한 성경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생명의 양식’, ‘하늘의 만나’, ‘살아 있는 떡’으로 오셨다. 이 말씀은 복음의 핵심을 두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 밥은 ‘생명’(人生, Life, 삶)'이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밥을 먹지 않고 살 길이 없다. 성경은 참된 삶을 위해서는 육체에 떡을 공급하듯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해야 함을 끊임없이 증거하고 있다.(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는 말씀으로 사느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본디 물질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느니라) 해서, 사람은 반드시 밥과 더불어 의미와 가치를 먹고 살아야 한다. 말씀대로 살아 갈 때, 비로소 참된 삶이 따라 온다.
둘째, 밥은 '희생'(犧牲, sacrifice)이다. 밥의 희생으로 생명은 유지된다. 기독교의 본질은 ‘희생’이다. 예수께서 몸소 보이신 ‘십자가’의 정신을 생활언어로 바꾸면 '희생'이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출생하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만물의 모든 삶은 ‘희생’을 통해서 비롯된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야만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게 되듯이, 생명은 반드시 희생을 요구한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 ‘너죽고, 나죽자’가 있다. 요즘은 ‘너죽고, 나살자’가 대세다. 한마디로 타인을 희생시켜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이러한 시대정신과 정반대의 길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죽을테니, 네가 살아라’, ‘나’를 죽여서 ‘우리’를 살리는 삶을 온 몸으로 사셨다. 한국감리교회가 부끄러운 감투싸움이 그치지 않고, 한국교회가 맛을 잃은 소금되어 길바닥에 버려져 짓밟히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복음, 기독교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삶의 목적이 변화된 사람이다. 내가 얼마나 더 유명하고 더 위대해지느냐가 아니라, 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유익과 평화를 안겨 주었는가를 물으며 사는 삶으로의 전환이다.
피흘림 없이 죄사함도 없다
'피흘림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이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잘 읽혀지지 않는 책, 구약성경 레위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구약의 제사는 ‘희생제사’다. 드려진 제물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고기는 각이 떠져 먹기좋게 발라져야 한다. 드려진 곡식은 고운 가루로 부서져야만 했다. 희생제사의 본질은 바쳐진 동물과 드려진 곡식으로 인해 죄사함을 받는 차원을 넘어서 철저한 ‘자기부인’을 예표한다. 바쳐진 제물은 나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대용물(代用物)’이 아니라, ‘자신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레위기가 증거하는 희생제사는 예배의 본질을 가르쳐 준다. 바울의 통찰대로 예배란 나의 자랑과 고집, 판단과 계획, 세상을 향한 헛된 탐욕과 이기심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산제물이 되는 행위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의 삶을 온전히 드리는 희생과 헌신이 바로 예배의 본질이다. ‘내 주여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잘게 부서진 고운가루가 되어 국수를 만드시든지 빵을 만드시든지 주님 뜻대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한마디로 탐욕과 이기심에 붙들려 살던 나는 죽고, 주님으로 다시 사는 것이 예배다.
하지만, 오늘날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예배자 중심의 예배로 변질되었다. 자기부인을 통한 희생은 없고 예배가 도리어 이기적인 탐욕과 세속적인 영광만을 추구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통해서 개인의 소원성취, 세상적인 성공과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고 있다. 오늘날 하나님께 ‘더빨리, 더높이, 더크게’를 간구하며 살아가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천년전 말 밥그릇에 누인 아기는 자기부인과 헌신을 통한 희생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대속'의 교리와 '희생'의 복음
얼마전 라디오에서 세계최대의 교회를 자랑하는 조용기목사의 방송설교를 들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저주, 질병, 죄악이 씻겨 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많이 듣고 쉽게 접하고 있는 설교내용 가운데 하나다. 앞서 언급한대로 ‘대속(atonement redemption)’의 본질은 자기부인을 통한 ‘희생’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대속을 타인의 희생시켜서 자신의 유익과 안위를 누리는 수단으로 왜곡하고 있다. 대속은 타인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는게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자신의 희생으로 타인과 공동체를 살리는 희생의 복음이다.
한국교회는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주는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면서, 스스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주님의 희생에 감격하고 그 은혜를 찬양하면서 정작 자신의 희생을 통해 타인에게 받은 은혜를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부인과 희생이 없는 예수님의 속죄만을 강조하는 신앙은 ‘십자가’가 본래 증거하는 복음의 전체가 아니라 반쪽짜리 복음일 뿐이다. 십자가의 온전한 의미는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고 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나도 내 몫에 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 십자가의 완성이요, 십자가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타인의 희생과 헌신을 쉽게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조금도 희생하지 않는다. 타인의 희생과 헌신은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다고 핑계하면서, 자신의 눈꼽만한 헌신은 생색을 내고 싶어 안달을 한다. 하지만,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고난 없이 영광도 없다. 또한, 희생 없이 생명은 없다. 과연, 희생 없이 맛볼 수 있는 삶의 열매가 있을까? 오늘날 현대인들이 삶에서 감사와 기쁨, 감동과 만족 같은 삶의 열매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고 없이 소중한 것을 얻으려는 불로소득이나 대박의 신화를 마치 하늘의 축복으로 여기는 무지가 그 원인이다. 십자가복음의 본질, 그것은 희생이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저마다 타인을 희생시키고 자기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세상에 결코 평화는 없다. 교회 공동체와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누가복음은 천사의 음성을 통해서 가이사아구스도가 지배하는 물질과 폭력의 원리와 대비되는 예수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은혜와 사랑의 원리를 증거하고 있다. 오늘날, 세상과 교회 그리고 가정과 영혼 가운데 왜 이토록 ‘평화’가 없을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은 여전히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곧 힘과 물질의 논리가 다스리고 있다. 그 결과가 바로 전쟁과 갈등, 다툼과 분열, 1%의 풍요와 99% 빈곤의 불균형이란 현실이다. 타인의 희생을 강요한채 자신은 조금도 희생하지 않고 오직 이기적인 탐욕만을 추구하는 왜곡된 복음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예수께서는 ‘폭력과 착취’가 아니라 ‘희생과 공존’의 새세상을 온 몸으로 선포하셨고 마침내 승리하셨다. 다석(多夕) 유영모는 ‘영광’이라는 모호한 단어의 뜻을 ‘뚜렷함’이라 풀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들에게는 평화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만천하에 뚜렷하게 드러났음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수천년간 이어져 온 야만의 시대가 끝나고 비로소 사랑과 평화가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장엄한 선언이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으로 폭력과 착취의 세상을 끝내고, 희생과 공존으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겠다는 비장한 선전포고다.
이러한 선포가 시작된지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 군사력을 앞세운 약탈과 정복으로 세상의 통치하던 고대제국들과 같은 심각한 정글의 법칙이 다스리는 무한경쟁과 물신주의로 치닫고 있다. 그런 세상 한 가운데서 사랑과 정의, 평화와 희생을 믿고 실천하는 삶은 한없이 무기력하고 초라하게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의 밥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라서 말씀을 삶의 양식으로 삼고 세상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탐욕의 세상 속에서 자기부인을 통해 희생과 헌신,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나는 누가복음을 통해서 폭력과 착취의 세상에서 희생과 공존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선택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를 본다. 나도 예수님을 쫓아서 가정과 교회에서, 사회와 세상에서, 사랑과 희생의 밥이 될 때, 이천년전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길이 열리고 완성된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나를 통해서 오늘 우리의 가정과 교회, 사회와 세상에도 마침내 구원의 길이 열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어떠한 절망과 상황 속에서도 이 사실을 변함없이 믿고, 탐욕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따라 기꺼이 하나님의 자녀로 오늘을 살아내는 사람들이다. 그들로 인해서 오늘도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가 임하게 될 것이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강릉예향교회 김명섭목사)
'설교, 기독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주는 영적 의미 (0) | 2022.06.13 |
---|---|
[이경섭 칼럼] 천국 지향적인 신앙은 염세주의인가? (0) | 2022.01.02 |
데이비드 플랫 목사 “예수 따르면 편안? 성경의 가르침 아냐” (0) | 2021.11.20 |
가장 복된 삶(전도서 3장 11절-15절) 9월19일 2021년 뉴욕열방선교교회 주일예배 설교 요약/방봉균 목사님 (0) | 2021.09.28 |
순전한 그리스도인/갈라디아서 3장28절/2021년 9월 16일 애틀란타 제일장로 교회 /아침 열기 말씀 요약/서삼정 목사님 (0) | 2021.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