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1-5절]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차바)[군대, 전쟁, 봉사, 힘든 노동](BDB, NASB, NIV)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군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야르케 솨웨)[헛된 달들 동안]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合瘡)되었다가(라가)[굳었다가] 터지는구나.
세상에는 평안이 없다. 모세는 시편 90:10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사람들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마 11:28). 욥은 여러 달 동안 혹독한 고난을 경험하고 있었다. 욥이 고난 당한 기간은 여러 달이었다고 보인다. 세상에 고난이 있는 까닭은 첫 사람의 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해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3: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또 하나님께서는 장차 참된 안식의 세계인 천국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롬 14:17).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린다. 히브리서 4:9-10,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6-10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무덤]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천을 짜는 베틀의 북은 쉴새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욥은 자신의 날들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고 표현한다. 인생의 삶은 쏜살같이 빠르고 흐르는 물같이 신속하다. 모세는 7, 80년의 일생이 날아가듯이 신속히 간다고 말하였다(시 90:10). 한 주간이 빨리 지나가고 한 달이 빠르게 가고 한 해가 빨리 가며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가 찾아온다.
또 욥은 자신의 삶이 소망이 없고 한 호흡 혹은 바람(루아크) 같고 복된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짧고 허무하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시 39:5-6). 야고보서 4:14는 우리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표현하였다.
욥은 자신이 조만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 짧고 덧없이 빠르기 때문에, 사람이 죽고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지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죽음으로 사람의 땅 위의 삶은 끝난다.
[11-16절]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용[큰 바다 짐승]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침대]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愁心)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異像)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에쳄)[아마 ‘뼈의 쑤심’](BDB)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욥의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었다. 그는 ‘내 마음의 아픔’ ‘내 영혼의 괴로움’에 대해 말한다. 그는 육체의 고통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알지 못할 때, 또 믿음이 약해지거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 생기는 고통이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품는 바다인가, 또는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큰 바다 짐승인가라고 묻는다.
또 욥은 침상에서도 평안치 못했다. 침상은 하루하루 피곤한 인생에게 휴식의 공간이지만, 욥은 침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서운 꿈으로 인해 놀라고 이상(異像)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졌다.
이러한 고통 중에서 욥은 죽는 것을 소원하여 말한다. 그는 이미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었다(욥 3:1).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기를 기뻐하시고 그 손을 들어 그를 끊으시기를 사모했었다(욥 6:8-9). 이제 그는 몸의 고통보다 숨이 막혀 죽는 것을 원한다.
[17-19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파카드 ד������������)[살피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마음을 두신다. 시편 8:4도,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말하며, 시편 144:3도,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라고 말한다. 사람은 죄가 많고 부족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중하게 여기시고 선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침마다, 분초마다 살피시고 시험하신다. 그는 사람을 잠시라도, 침 삼킬 동안이라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포괄적이다. 그는 우리의 모든 삶,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 121:4). 시편 139:1-4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말씀하셨다(마 10:30). 요한계시록 2:23에서, 주께서는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하셨다.
[20-21절]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내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이시다. 그는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고 우리의 혀의 말을 다 아신다(시 139:2-4).
20절 중간의 원문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이다(MT, KJV).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욥은 자신의 부족과 죄를 인정한다. 또 그는 죄의 보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낀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다. 욥기 34:21은,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4:12-13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진심의 순종으로 조금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고 그를 주목하셔서 그의 심령으로 무겁고 피곤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자신의 죄들에 대해 아무 해결책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간청한다.
욥기 7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수고로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평안을 누리자.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참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요 14:27). 천국은 영원하고 충만한 참된 안식의 세계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헛된 세상일에 시간을 다 쓰지 말고 세월을 아끼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엡 5:15-17)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에 힘쓰자. 그것은 전도, 참 교회 건립, 바른 신학교 건립, 교회 내의 구제 등의 일들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죄인이며 무익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중히 여기시고 우리를 잠시라도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살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천국의 복을 주셨음을 감사하며, 평안할 때, 즉 심령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침상에서의 평안이 있을 때, 구주 예수님을 확신하고 또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과 도덕적 온전함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지만, 그때에라도 우리는 욥을 기억하고 또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잘 참고 감당하자.
8장: 빌닷--네 자녀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다
[1-7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만일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고 주께서 그들을 그 죄(죄책 혹은 죄의 형벌)에 붙이셨다면](KJV, NASB),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그는]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여 데려가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빌닷의 말은, 욥의 가정에는 해당되지 않으나,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벌하여 데려가신다는 것은 일반적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사람의 죄에 대해 벌하신다. 그는 사람이 범죄할 때 그나 그의 자녀를 죽이기도 하신다. 주께서는 요한계시록 2:23에서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사람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받으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또 회개하는 자는 현재 미약할지라도 장차 심히 창대케 되는 복을 누릴 것이다.
[8-10절]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이는]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없으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같음이니라].)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지 아니하겠느냐?
옛시대 사람의 말과, 열조의 터득한 일은 옛길, 검증된 길이며 선한 길이다. 신명기 32:7에서, 모세도,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는 에녹에게,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다윗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며 그의 음성을 들었던 경건한 선조들의 증언과 지혜는 유익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렘 6:16). 옛적 길, 선한 길이 있다. 그것이 옛신앙, 보수신앙이다.
그것은 과거에 매이거나 미래지향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며 어느 시대에나 가감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시대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변질을 경계해야 한다.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7-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보수신앙은 귀한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15에서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해진 내용]을 지키라”고 말했다. 성경은 옛날부터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저장소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보수해야 한다.
[11-13절] 왕골(고메)[파피루스 나무]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카네프)[불경건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빌닷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불경건한 자를 파피루스 나무나 갈대에 비교한다. 그것들은 진펄이나 물에서 왕성히 자라지만 아직 푸르를 때 다른 풀보다 일찍 말라버린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불경건한 자는 하나님 대신 사람이나 돈이나 세상 권력을 의지하는데, 사람은 악하고 연약하고 변하며 돈은 있다가 없어지고 세상 권력도 허무하다.
[14-19절]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식물이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그 가지가 동산에 벋어가며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감기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그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악인들의 믿는 것은 거미줄 같다. 또 그들은 한때 왕성한 것 같아도 곧 자취를 찾을 수 없이 뽑히는 식물과 같다. 그래서 이사야 2:22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했고, 또 잠언 23:5는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고, 시편 20:7은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고 했다. 하나님 대신에 사람과 돈과 재물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0절]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즉.
‘순전한 사람’이라는 원어(탐)는 ‘완전한 자, 온전한 자,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과 계명대로 사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가 ‘의인’이다. 성경은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을 ‘의로운 자’라고 부른다(창 6:9; 욥 1:1; 겔 14:14, 20). 하나님께서는 그를 재앙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를 도우시고 건지시고 그에게 능력을 베푸신다. 시편 34:19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하고, 또 시편 37:25는,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는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다. 그는 악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그를 재앙에서 건져주지 않으신다.
[21-22절]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풍성히 주신다. 시편 4:7에서 다윗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창 12:3).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시고 그런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다. 그는 그런 악인들의 장막을 없어지게 하실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알고 죄를 심각히 여기며 죄를 회개하기를 힘쓰자. 범죄치 않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어야 한다. 범죄하는 부모와 자녀들은 망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다. 이것은 옛날부터 검증된 진리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식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옛길을 주목하고 참조하고 연구하되 성경을 힘써 읽고 연구하고 믿고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 것을 의지하는 불경건한 자가 되지 말고 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살고 그와 교제하자.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정직하게, 즉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이 살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자.
9장: 욥--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
1-15절,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하자
[1-2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욥은 친구들이 옳은 말을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진리이지만, 단지 그 적용이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욥은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겠느냐고 반문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도덕적 표준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 3:10).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3:20-22).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0). 그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뿐 아니라, 성도들의 성심의 율법 준행도 포함한다.
[3-4절]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사람은 하나님과 변론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유한한 죄인인 인생이 어떻게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말로라도 다툴 수 있겠는가? 인생은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하며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고 실천하려고 힘써야 할 뿐이며, 하나님과 다투며 변론하려 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그는 결코 형통한 자가 될 수 없다.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와 오는 세상에서 결코 아무 좋은 것도 기대할 수 없다.
[5-7절]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리며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시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 노하시면 지진을 주셔서 산을 무너뜨리시고 옮기시며 땅을 움직이실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 종말의 징조들 중의 하나로 지진을 말한다(마 24:7; 계 16:17-20).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앙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기도 하신다. 그는 낮에도 어두움을 주실 수 있고 역사상 그런 일들이 있었다. 출애굽기 10:23에 보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들 중 아홉 번째 재앙에서 하나님께서는 애굽 온 땅에 3일 동안 캄캄한 흑암을 주셨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었다(마 27:45).
[8-11절]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홀로 창조하셨고 바다도 주장하신다. 또 그는 북두성(곰 자리)과 삼성(오리온 자리)과 묘성(황소 자리)과 남방의 밀실(밀집된 별 자리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그는 하늘의 별들을 주관하는 자이시며 또 기적을 행하는 자이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계시고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지만 영이시므로 그의 지나가심과 활동을 사람들이 알 수 없다.
[12절]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는 천지만물을 주셨고 우리의 생명을 주셨고 우리의 가족을 주셨다. 그는 우리의 건강을, 재물을, 우리나라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좋은 환경여건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빼앗으시기도 하신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물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주신 모든 것을 빼앗으실 수 있다. 그는 주로 사람들의 죄를 징벌하실 때, 주신 것을 빼앗으신다. 그러나 간혹 성도들의 훈련을 위해 무엇을 빼앗기도 하신다. 그는 생명을 빼앗아 죽게도 하시고, 가족을 빼앗아 고아와 과부가 되게도 하시고, 건강을 빼앗아 아프게도 하시고, 재물을 빼앗아 가난하게도 하신다. 그는 국가를 빼앗아 나라 없는 설움을 당케도 하시고, 좋은 환경을 빼앗아 고난을 당하게도 하신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빼앗으시는 것, 곧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을 피하거나 막아낼 수 없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죽이시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고 가족을 취하시면 고아와 과부가 될 수밖에 없고 건강을 취하시면 아플 수밖에 없고 재물을 취하시면 가난할 수밖에 없고 나라를 취하시면 방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의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다. 그는 신명기 32:39에서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11에서 하나님을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13-15절]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큰 바다 짐승]을 돕는 자들[라합의 동류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는 참으로 두렵다. 큰 바다 짐승과 그 동류들이라도 하나님 앞에 다 굴복할 것이다. 하물며 연약한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그 위엄 앞에 어떻게 서서 감히 하나님 앞에 무어라고 대답하며 변론할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가 의로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대답할 수 없고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 엄위하신 그에게 간구할 수 있을 뿐이다. 욥은 하나님의 엄위하심, 하나님의 능력, 특히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를 알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들의 의(義)가 내세울 것이 없는 의(義)임을 인정하고 있다.
사람의 의는 하나님 앞에 보잘것없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의 의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지 못한다. 신약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빌립보서 3:9는,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했다. 또 히브리서 10:19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랑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이며 우리의 담대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뿐이다. 물론 순종의 삶은 더욱 평안과 담대함을 줄 것이다(요일 3:21-2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엄위하신 절대주권자이심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힘이 강하시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엄위하신 심판자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를 거역할 수 없고 그와 다툴 수 없다. 그가 빼앗으시면 막을 자가 없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의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뿐임을 알자. 욥은 친구들의 말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한다. 사람의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족투성이이며 완전하게 의롭지 못하다.
셋째로, 비록 우리의 의가 구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은 의이지만,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말씀들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얻은 의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16-24절, 고난 중에 하나님만 바라보자
[16절]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욥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눅 18:1).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했고(살전 5:17) 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했다(빌 4:6-7).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영적 호흡과 같다.
또 욥은 기도 응답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 기도는 응답을 받는 데 가치가 있다. 시편 65:2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고 증거한다. 주께서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마 7:7-8), 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셨다(요 14:14).
욥의 말은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을 때 교만치 말아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특히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비천한 피조물이며 부족하고 누추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을 받았어도,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생각하면 감히 무엇을 자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겸손과 두려움으로 감사해야 할 뿐이다. 기도 응답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영적 교만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7-19절]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
욥은 자신이 당하는 큰 고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중에라도 불평하거나 낙심치 말고 그 고난이 하나님께로서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를 호출한다’는 원어(요이데니)는 ‘나를 호출한다’는 뜻이다(MT, BDB, KJV).9) 본문은, 내가 호출을 당하여 엄위하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20절]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느낀다. 엄격한 기준으로 보면, 나는 죄인이며 내 속에는 사악함과 부패성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항변할 자격도, 항변할 담력도 없는 인생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라 할지라도 그것을 달게 받고, 또 훈련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 베드로전서 4:12-13은,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신다.
[21절]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멸시하리로다].
“나는 순전하다마는”이라는 말은 문맥상 “나는 순전할지라도”라는 뜻 같다(KJV, NIV). ‘순전함’이라는 원어(탐)는 ‘완전함, 흠 없음’이라는 뜻이다. 욥은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없는 순전한 삶을 살았다. 욥기 6:10,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욥기 6:29,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욥기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로 에다 나프쉬)라는 원문은 “나는 나의 영혼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지금 왜 이런 처지에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 결말이 어떨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든지, 혹은 앞절과 더불어 그가 자신의 온전함과 의를 하나님 앞에서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든지, 혹은 뒤따르는 구절과 함께, 고난 중에 심히 피곤해서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며 존중할 힘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욥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가망성이 없고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살고 싶은 의욕도 버리고 있었다. 욥은 욥기 6:8-9에서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고 말했고, 7:15-16에서는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뼈의 쑤심]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22-24절]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쇼트 )[매, 채찍]이 내려 도륙될[사람들을 죽일]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맛사)[절망(BDB, KB, NASB, NIV) 혹은 시련(KJV)]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그가 그 재판관들의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의인에게도 고난과 재앙을 내리신다. 그는 악인에게 주시는 것과 비슷하게 의인에게도 고난을 주신다. 의인도 자연적 재해나 교통사고 등을 당한다. 또 악한 세상에서 의인이 불의한 재판을 받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또 보통은 그 재난이 욥의 경우처럼 일시적이지만, 어떤 경우는 순교의 죽음으로 끝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성도에게 닥친 이런 고난은 이해하기 어려운 불행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또는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큰 일이나 큰 불행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성도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믿음을 증거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그를 믿는 것이, 그리고 진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며 순수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그러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악인들을 공의로 심판하신다. 그는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평안과 복을 주시고, 불의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재앙과 화를 주신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선악을 심판하시고 보응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시편 58:11은,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기도 응답을 믿어야 하지만, 기도 응답을 받았을 때에 자신이 누추한 존재임을 알고 자랑치 말고 교만치 말고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때때로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으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을 달게 받고 자신에게 어떤 부족과 죄가 없는지 살피고 생각 나는 죄가 있으면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하며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와 힘과 구원을 구해야 한다.
25-35절, 고난의 해결책
[25-26절] 나의 날이 체부(遞夫)(루츠)[달리는 자](NASB, NIV)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욥은 고난 중에 자기의 날들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날들이 달리는 자보다 빠르며 빠른 배와 같고 먹이를 낚아채려 내려오는 독수리와 같다고 말한다. 시편 39:5는 사람의 일생을 손넓이 만하며 없는 것 같다고 말했고, 시편 90:5는 그것을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는 풀 같다고 했다. 시편 90:10은 사람의 날들이 날아가듯이 신속히 간다고 말한다. 세월은 화살 같고 흐르는 물과 같다. 야고보서 4:14는 우리의 일생을 잠깐 보이다고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했다.
욥은 그 고난의 날들의 빠른 흐름 속에서 행복한 일들을 볼 수 없었다. 사람의 일생은 고난의 길이다. 우리의 세월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 빠른 세월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인간의 정로(正路)요 복된 삶인가? 에베소서 5:15-17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의 뜻이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다. 성경의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경에 명하신 선한 일들에 힘쓰는 것이다. 그것은 전도와 구제를 포함하여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한 선한 봉사의 일들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함이다(딛 2:14).
[27-28절]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욥은 고난에 대하여 두 가지 가능한 대책을 언급한다. 하나는 그의 원통함 혹은 불평을 잊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얼굴빛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 즉 마음을 기쁘게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대책은 잠시 도움이 되거나 많이 수련하면 약간은 도움이 될지 모르나, 참된 대책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대책일 뿐이다.
계속 그의 몸이 아프고 계속 그의 환경이 심히 어려운데, 어떻게 그것이 참된 대책이 되겠는가? 그는 그의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무죄(無罪)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죄인처럼 고통 가운데 버려두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망각이나 인위적 기쁨은 대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참된 대책, 완전한 대책은 어디에 있는가? 참되고 완전한 대책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심령에 참된 평안과 위로를 주셔야 가능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의 환경을 회복시켜 주셔야 그의 고통이 그칠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참 대책, 완전한 대책이 되신다. 주께서는 친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원하였다(살후 3:16).
[29-31절] 내가 정죄(定罪)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욥은 본문에서 인간의 죄책(罪責)의 문제를 말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정죄(定罪)하심이라고 표현한다. 죄인에게 고난의 징벌을 주시듯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난을 벗어나려는 모든 수고, 예를 들어 망각하는 것이나 마음과 얼굴을 기쁘고 즐겁게 가지는 것 등이 헛될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이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 즉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을지라도 주께서 그를 개천에 빠지게 하실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가지는 죄악된 생각, 죄악된 감정, 죄악된 말, 죄악된 행위들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 같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 그것을 증거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옷을 더러운 몸에 입지 않듯이, 그의 옷이라도 그의 죄악된 몸을 싫어할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사람의 고난의 해결책, 사람의 죄책의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람 속에나 사람의 행위나 노력에 있지 않다. 사람의 고난의 해결책은 오직 평안의 하나님 안에 있고, 사람의 죄책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에 있다. 사도 바울은 담대히 말하기를,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다(롬 8:33-34).
[32-33절]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은 하나님께서 육신이 아니시고 영이시며 크신 위엄을 지니신 영이시므로 단지 육신적으로 대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위엄 앞에서 감히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질하여 재판할 수 없다’는 말은 ‘함께 법정에 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원고가 되시고 욥이 피고가 되든지, 아니면 욥이 원고가 되고 하나님께서 피고가 되시든지 간에, 그가 법정에 가서 자신의 고난의 정당성을 따져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 둘 사이에 판결할 자도 없다고 말한다.
[34-35절]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
35절 후반절의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는 원문(키 로-켄 아노키 임마디)은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구나”라는 뜻이다(MT, KJV, NASB).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의 막대기로 그를 치셨고 그를 누르시며 그 위엄으로 그를 두렵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그에게 감히 무슨 말씀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 막대기를 그에게서 떠나게 하시면 그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으나 지금 그의 처지는 그렇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욥의 심적 고통과 방황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 고난과 징계의 막대기를 거두시는 데 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와 평강을 주시는 데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지혜롭게 살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 또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 선한 일들을 힘쓰는 것이다.
둘째로, 고난 중에 망각이나 심리적 노력은 참된 해결책이 못 된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만 참 해답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참된 평안과 위로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인간의 고난의 해결은 오직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 안에 있고, 인간의 죄책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거두어주셔야 우리가 평안을 얻을 수 있으며 모든 고난의 근본 원인인 우리의 죄책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해결되었다.
넷째로, 성도는 고난 중에 참으며 겸손히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기도해야 한다. 시편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복이다.
말씀 묵상
이 말씀을 묵상하며 마음에 눈물이 차오름을 어쩔 수 없었다.
욥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나를 감동케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완전하심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당하는 고난조차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을 받아들이고
죽기를 바라는 의연함에 꽤 놀랐다.
더우기 말씀 중에 나오는 삶의 허무감과 빠르게 지난가는 시간들, 의인이라도 당하여할 고난의 날들을 생각하여 나의
삶을 반추해 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삶을 보는 거룩한 습관을 기르자.
그러면 욥의 믿음이 이해로 배우는 것이 아닌 감사와 찬양으로 배우는 은혜가 될 것이다.
친구들의 말 역시 지혜로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을 기록해 놓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에 경탄해 마지 않는다.
욥기를 전체적 흐름으로 보자면 더 읽고 묵상해야겠지만 왜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방향과 믿는 자의
고백을 제시하였는지 알 것 같다.
'성경큐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욥기 13장- 15장 (0) | 2021.08.26 |
---|---|
욥기 10장-12장 (0) | 2021.08.22 |
욥기 4장-6장 (0) | 2021.08.15 |
욥 1장-3장 (0) | 2021.08.11 |
에스더 7장-10장 (0) | 2021.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