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음
1-5절, 의인 욥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우스 땅’은 에돔 지역이었던 것 같고(애 4:21), 욥은 아브라함 시대 사람이거나 그의 몇 대 자손이었던 것 같다.
본문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한다. ‘순전하다’는 원어(탐)는 비교적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을 가리킨다.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증거할 때(창 6:9), ‘완전한’이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또 성경이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도(딤전 3:2) 같은 뜻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에 비추어 또 자기 양심에 비추어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4에서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간증하였고,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2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고 말했다.
또 욥은 정직하였다. ‘정직함’은 올바름, 기준에 맞음이라는 뜻이며 의롭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경건의 본질이요(잠 1:7) 그럴 때 사람이 악을 떠날 수 있다(잠 16:6). 노아나 다니엘도 그러했다.
[2절]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욥은 많은 자녀들을 두었다.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뜻이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물론, 자녀를 안 주시는 경우도 있다. 노아는 500세 이후에 세 아들을 낳았다(창 5:32). 아브라함도 100세에 한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일반적 뜻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시 127:3). 자녀 출산과 양육은 비록 힘든 일이지만 복되고 보람 있는 일이다.
욥은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우리는 수고롭고 복잡한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에녹도 그러하였다. 창세기 5:21-22,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독신(獨身)은 신앙생활하기에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정상적 신앙생활은 현실도피적 생활이 아니다. 정상적 신앙생활은 현실 속에서 수고하면서 사는 생활이다. 그것은 결혼한 사람들이 자녀들을 낳아 기르며 가정을 이끌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성도의 일차적 경건 훈련의 장소이다. 자녀는 가정에서 경건한 부모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법을 배운다. 성도는 가정에서 믿음과 사랑, 겸손과 인내, 순종과 용서 등을 연습한다. 가정에서 잘 생활하는 자가 바르고 좋은 인격이 된다.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교훈했다(엡 6:1, 4).
[3절] 그 소유물은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1천]요 암나귀가 5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욥은 물질적 부요함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물이며 재물의 복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복을 주시므로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巨富)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었다(창 26:12-14).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몸의 소생과 토지 소산과 가축들의 새끼의 복을 약속하셨다(신 28:4).
그러나 물질적 부요는 신앙생활에 큰 방해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24). 왜냐하면 부자는 마음이 해이해지고 교만해지고 하나님 대신 돈을 의지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딤전 6:9-10).
그러나 욥은 부자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교만치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고 재물에 종노릇하지 않았다. 그는 욥기 31:24에서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욥은 동방 사람들 중 가장 큰 자이었다. 동방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처의 자손이나(창 25:1-6),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이나(창 25:12-18), 에서의 자손을 가리킬 것이다(창 36장).
[4-5절]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의 자녀들은, 아마 다 성장한 후에도,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누이들까지 청하여 함께 먹고 마셨다. 그들은 형제들 간에 우애가 좋았다. 욥의 가정은 부모와 자녀 간에 또 형제들 간에 사랑과 순종과 우애가 있는 모범이 되는 가정이었다.
그런데 욥은 그 잔칫날이 지나면 자기 자녀들이 혹시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집으로 불러 성결케 하였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하나님게 번제를 드렸다. 욥은 죄의 심각성과 성결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건과 거룩함과 온전함뿐 아니라, 자녀들의 경건과 거룩함과 온전함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육신적 차원에서 자녀들을 위할 뿐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자녀들을 위했다. 그는 자녀들의 구원과 신앙 인격을 위해, 죄 짓지 않게 하기 위해, 혹 지은 죄를 씻음 받게 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부모로서 열 명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그러했다.
본문은 “욥의 행사는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말한다. 그는 한두 번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의 행사가 항상 그러하였다. 그것은 참된 자녀 사랑이다. 부모에게 주는 성경 교훈의 핵심은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라는 것이다. 잠언 22:6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교훈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의인 욥은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된다.
첫째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온전하였고 정직했고 악을 떠났다.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전하고 정직하고 악을 떠나야 한다.
둘째로, 욥은 많은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도 하나님을 잘 섬겼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잘 기르면서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
셋째로, 욥은 물질적 부요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잘 섬겼다. 물질적 부요는 많은 경우 신앙생활에 시험거리가 되지만, 욥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도 물질적 여유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
넷째로, 욥은 자녀들의 경건함과 온전함과 거룩함을 위하여 힘썼다. 부모의 첫 번째 의무는 자녀들을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인격이 되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가르치자.
6-22절, 욥이 재산과 자녀들을 잃음
[6-7절]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가리킨다. 욥기 38:7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고 말한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들 중 하나이다. 그의 죄는 교만이었다(딤전 3:6). 사탄은 실재(實在)한다. 그는 에덴 동산에서 뱀 속에 들어가 하와를 범죄케 하였다. 요한계시록 12:9는 그를 ‘큰 용, 옛 뱀’이라고 불렀다.
사탄은 땅에 두루 돌아다니며 활동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죄 짓게 하고 성도들과 하나님의 일들을 대적하고 어지럽히며 파괴시킨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이며(요 8:44)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조사를 하게 하였고(대상 21:1)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였다(슥 3:1). 그는 예수님을 시험한 자요(마 4장)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하며(고후 4:4) 세상의 죄악된 유행과 풍조를 조장한다(엡 2:2). 그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그는 온 천하를 꾀는 자이다(계 12:9).
사탄의 권세는 크다. 그는 이 세상 임금(요 12:31),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엡 2:2)라고 불리우며 요한일서 5:19는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사탄은 마침내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은, 세상 나라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최종적으로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운다고 예언하였다.
[8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순전하고 정직하고 경건하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이었다. 사람의 판단과 평가는 완전치 못하다. 사람은 다른 이의 중심을 알지 못하고, 그의 외모만 보기 쉽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을 비난하고 욕하고 악평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평가이다. 잠언 16:25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한다. 구약성경은 열왕들의 역사를 기록할 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이었는지, 악한 자이었는지를 기록하였다. 솔로몬은 늙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였다(왕상 11:4). 아사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고(왕상 15:11), 오므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16:25), 아하시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22:52). 열왕기상하에는 29번, 역대하에는 11번, 총 40번 ‘하나님 보시기에’ 혹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표현이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지 말고 정직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남을 볼 때도 외모만 보지 말고 그의 중심을 살펴보려 하고 그의 신앙 인격을 유의해 보아야 한다.
[9-11절]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탄의 비난은, 욥이 까닭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물질적 복 때문에 섬긴다는 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적 복 때문인가? 그러면 물질적 복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중단될 것이다. 그가 물질적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도 버릴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받거나 순교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런 신앙은 고난을 견디기 어렵고 순교는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성경은 순수한 신앙을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씨 뿌리는 비유 중에, 돌밭에 떨어진 씨는 환난과 시험에 넘어지는 경우를 가리켰다(마 13:20-21).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다(행 14:22). 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고 말하였다(롬 14:7).
[12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주관하는 권세를 주셨다. 손은 힘을 상징한다. 사탄은 세상의 것을 상당히 주장한다. 그는 욥의 모든 재산을 없애고 모든 자녀를 죽이기도 하였다. 누가복음 4:6에 보면, 사탄은 예수께 말하기를, 나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내가 나의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준다고 하였다. 사탄은 상당한 권세를 가졌다.
그러나 사탄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또 하나님의 허락하신 한계 안에서만 그 권세를 가지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유일한 주권자이시다. 그는 사탄과 악령들도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귀신들은 심지어 돼지 속에 보내시기를 그에게 간구하였었다(마 8:31). 세상 끝에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악령들을 지옥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계 20:10).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은 유익케 하시는 깊은 뜻이 있다. 사람은 평안할 때 교만해지고 해이해지고 범죄하거나 탈선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천국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세상의 헛됨을 알고 죄를 멀리하고 더 거룩해지며 하나님만 더 사모하고 의지하며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또 무엇보다 겸손해진다(시 119:67, 71; 고후 1:8-9; 12:7).
[13-22절]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赤身)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하루아침에 큰 재앙을 당했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들이 욥에게 와서 스바 사람이 습격하여 소와 나귀을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고 말했고, 또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양과 종을 불살랐다고 말했고, 또 갈대아 사람들이 습격해 약대들을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거친 들에서 대풍(大風)이 와서 집이 무너져 자녀들이 다 죽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때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하였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가 주관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다. 그는 이 모든 일에서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원망치 않았다. 열 정탐꾼의 불신앙적 보고를 받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던(민 14:1) 이스라엘 백성과는 너무 달랐다. 욥의 신앙과 의로운 인격은 고난 가운데서 더욱 빛났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사탄과 악령들과 싸운다. 사탄과 악령들은 이 세상을 주관하며 때때로 성도들에게 시험과 고난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이 오직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우리에게 고난을 줌을 알고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물질적 복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를 섬기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고 그의 뜻과 계명에 순종하여 그 앞에서 바르게 살자.
셋째로, 우리는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으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라고 말한 욥처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원망치 말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가 주시기도 하고 취하시기도 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찬송과 영광을 돌리자.
2장: 욥이 자기 건강까지 잃음
[1-3절]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에게 닥친 재앙은 사탄이 준 것이지만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된 것이며 욥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그의 순전함과 믿음을 굳게 지켰다.
[4-5절]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람은 생명이 귀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희생해도 자기 생명이 보존되면 만족하지만, 몸이 병들어 죽을 지경이 되면,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께 욕할 것이라고 사탄은 주장한다. 사탄은 끝없이 변론하고 반론하고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송사쟁이이다.
[6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깊으신 뜻 가운데서 사탄의 활동 범위를 정해 어느 정도 허용하신다. 그는 사탄에게 욥의 건강을 치도록 허락하셨다.
[7-9절]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악한 피부병으로 욥을 쳤다. 심각한 악창이 그의 온 몸에 났다. 욥은 몸이 너무 가려워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그때 욥의 아내는 남편을 동정하거나 위로하기는커녕 그를 몹시 구박하였다. 그러나 욥은 믿음 없는 아내의 구박에도 낙망치 않고 더욱 믿음으로 나아갔다. 참 신자는 돛단배와 같다. 돛단배는 바람이 있어야 앞으로 잘 나아간다. 참된 신자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그의 믿음이 더욱 빛난다. 그는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의지하고 그의 계명을 지킨다.
[10절]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그가 앞에서 말한,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1:21)보다 더 진전된 고백이다. 욥은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전제하고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거저 받았으면 재앙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 복 받는 것을 좋아한다면, 재앙 받을 때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자기 중심적이며 심히 이기적인 태도일 뿐이다. 욥의 고백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처분에 겸손히 순응해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크신 지혜와 의와 선으로 사람의 모든 일을 섭리하심을 믿어야 하고, 고난 중에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11-13절]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相約)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7일 7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의 친구 세 사람은 욥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러 서로 약속하고 왔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에서의 자손이며(대상 1:45), 수아 사람 빌닷은 아마 아브라함의 후처(창 25:2) 혹은 첩(대상 1:32) 그두라의 자손일 것이다. 그들은 경건하고 존귀한 자들이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욥의 고난이 심각함을 알았다. 욥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했다. 그들은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겉옷을 찢었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렸다. 사람이 괴로움이 심하면 겉옷을 찢는다. 르우벤은 구덩이에 요셉이 없음을 보았을 때 겉옷을 찢었었다(창 37:29). 또 욥의 친구들은 7주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한 말도 못하였다. 욥의 큰 고통은 이렇게 묘사되고 증거되었다.
그러나 욥의 고통의 기간은 긴 것 같지 않다. 첫 번째 재앙은 하루에 되었고(13절) 두 번째 재앙은 첫 번째 후, 몇 일 안 되어서이었고, 친구들의 방문도 두 번째 재앙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욥기 3장부터 42장까지의 내용은 방문하여 7일 후, 하루 동안의 일이라고 본다. 그러면 욥의 고난은 몇 달 정도이었던 것 같다(욥 7:3).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탄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사탄은 하나님께 나아와 욥을 비난하면서 그의 몸의 건강을 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구하였다. 사탄은 끊임없이 성도들을 비난하고 시험하며 오늘날도 세상을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그러나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들까지도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오직 우리 자신을 살펴 회개할 바를 찾으며 입으로라도 범죄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 벗은 몸으로 와서 죽을 때 벗은 몸으로 간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과 같이 때때로 하나님의 재앙을 받는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3장: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함
[1-10절]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男兒)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어둠]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자들]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자들]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그 새벽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욥의 친구들이 욥을 방문한 지 7일 후에, 욥은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다. 그는 차라리 그 날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또 그 날의 새벽이 밝아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평안할 때 자기의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며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각한 고통 중에서는 생일이 결코 기쁜 날이 아니다. 생일의 저주는 이 세상의 삶의 헛됨을 잘 보여준다.
8절의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은 마술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은 욥이 그들을 인정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11-19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counselors)[모사들, 조언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사림)[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버려진] 낙태한[낙태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은 또 그가 어찌하여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았고 살아서 엄마의 젖을 빨며 살았는가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거기에는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의 임금들과 모사들이 있고 금은으로 집에 채운 존귀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며 또 자신이, 태어날 때 죽어서 난 아이들처럼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거기에는 악한 자들의 소란스러움도 없고 수고하고 피곤한 자들에게 평안이 있고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도 평안이 있을 것이며 종들에게는 자유함이 있다고 말한다.
[20-26절]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이는]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이는]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미쳤음이로다].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로게즈)[격동, 소동]만 임하였구나.
욥은 몸의 극심한 고통 중에서 죽음과 무덤을 심히 사모한다. 사람은 극심한 고난 중에 죽음을 사모하게 된다. 욥의 처지는 매우 고통스런 처지이었다. 그는 음식을 먹기 전에 탄식소리가 나며 그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그에게 임했고 그의 무서워하는 것이 그의 몸에 미쳤다. 그에게는 평안이나 평온함이나 안식이 없고 격동과 소동만 있었다. 사람은 고난 중에 죽음을 사모한다. 선지자 엘리야도 그러했다. 그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갈멜산 대결에서 승리하고 그들을 다 죽였으나, 엘리야가 한 일을 아합 왕에게서 들은 왕후 이세벨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고 통보하자, 두려워 자기 목숨을 위해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며 말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고난이 많고 허무한 세상을 사랑하지 말자.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상 헛되다(전 1:2; 12:8).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천국만 소망하자. 시편 39:5-7, [다윗도]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천국은 이 세상보다 더욱 사모할 만하다. 고린도후서 4:18, [바울도]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우리가 천국의 복됨을 안다면, 우리는 돈과 명예와 쾌락에 이끌려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 수 있다.
묵상
욥에게 닥친 고난을 묵상하며 나 역시 욥 못지 않게 고난을 많이 받은 인생인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던 욥처럼 나도 그렇게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사랑했던 자식들을 열이나 잃어야 했던 그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안다.
몸이 아프고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그의 날들에 공감한다.
무엇보다 친구들의 방문에 힘들어 했던 그의 자존심과 계속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눈여겨 보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는 중에도 우리에게는 환란이 임한다.
그것은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당대의 의로운 욥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하물며 나는 어떠하겠는가?
좀 더 힘을 내자.. 어차피 살아가야 할 날이 살아온 날 보다 짧을 것이니..
슬픔과 회한을 가슴에 묻고 하나님의 영광을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