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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3장- 15장

헤븐드림 2021. 8. 26. 00:27

 

 

13장: 욥--너희는 다 쓸데없는 의원들이다

[1-12절]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거짓말로] 지어내는 자(토펠)[바르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궤휼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그를 위해 편벽됨을 보이려느냐?](NASB, NIV)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만일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편벽됨을 보일진대] 그가 정녕 너희를 책망하시리니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土城)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진리를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바른 말, 좋은 말이라도 잘못 적용하면, 그것도, 계속 잘못 적용하면, 그는 거짓말로 바르는 사람이 되고 쓸데없는 의원과 같이 될 것이다. 또 그의 말은 불의하고 거짓된 말이 되고, 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재 같은 속담’이 되며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될 것이다.

[13-19절]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MT, ASV).10)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변호]하리라. 사곡한[불경건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혹은 ‘그는’](KJV) 나의 구원이 되리라. 너희는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설명을 너희 귀에 담을지니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욥은 친구들의 지적과 책망에 대하여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한다. 18절,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그는 앞에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었다. 욥기 9:21, “나는 순전하다마는.” 10: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또 12:4에서, 그는 자신을 “의롭고 순전한 자”라고 표현하였다.

욥은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실지라도 자신은 하나님을 의뢰하겠다고 말한다. 15절,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 그러나 나는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호하리라.” 또 욥은 자신의 구원을 기대한다. 16절, “불경건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혹은 ‘그는] 나의 구원이 되리라.” 그는 자신이 불경건한 자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이 되시리라고 믿고 있다.

[20-28절]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나는(웨후)[그는](KJV)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욥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알고 그가 그의 손을 자기에게 대어 죽게 하지 마시고 그의 위엄으로 자기를 두렵게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면서(21절) 자기에게 주신 고난의 이유를 알기를 원한다.

욥은 자신의 죄 문제를 생각한다. 그는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하며(23절), 또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라고 말한다(26절).

욥은 또한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을 ‘날리는 낙엽’과 ‘마른 검불’이라고 표현하고(25절), 자신이 ‘썩는 물건의 후패함’과 같고 ‘좀먹은 의복’ 같다고 말한다(28절). 사람은 병으로 죽음의 문앞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바른 가치 평가를 한다.

욥기 1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읽고 기도 중에 묵상함으로써 바르게 해석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자신에게와 이웃에게 적절하게, 바르게 잘 적용해야 한다. 성도가 비록 진리를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잘못 적용한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와 같고 병도 고치지 못하는 쓸데없는 의원과 같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자책할 것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계속 주장했다(9:21; 10:7; 12:4).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바르고 선하게 살았음이 분명하다. 비록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와 부족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제사로 상징된 중보자의 의를 의지하며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았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자책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 고린도전서 4: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셋째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난 중에 자신을 성찰하고 우리의 죄를 살피고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고 오직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오래 참고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가자. 우리가 범죄치 않고 믿음으로 바르게만 살면 우리는 고난의 회복을 곧 경험할 것이다.

 

 

 

 

14장: 욥--허무한 인생을 쉬게 하소서

[1-2절]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욥은 인생의 삶이 짧다고 말한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다. 인생은 짧다. 욥은 또한 인생의 삶이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모세도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시 90:10). 욥은 또한 인생의 삶이 꽃과 같이 쇠한다고 말한다. 이사야 40:6, 8,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욥은 또 인생의 삶이 그림자같이 신속하다고 말한다. 성경은 다른 곳들에서도 인생이 그림자와 같이 머무름이 없다고 말한다(대상 29:15; 시 39:6; 144:4). 시편 90:10,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3-4절]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허무한 존재인 인생을 눈을 들어 살피시며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는가라고 묻는다. 또 그는 인생이 다 죄로 인해 더러워진 존재이며 이런 인생에게서 어떻게 깨끗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엄격히 심판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모든 인류가 다 깨끗지 못하며 죄성을 가진 죄인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바이다. 창세기 8:21,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레위기 12장에 의하면, 여인은 출산 후 속죄제물로 자신을 속죄해야 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죄 가운데 출생하는 죄인임을 나타낸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로마서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5-6절]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 하사 품꾼같이 그 날을 마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일생을 다 정하셨다. 그는 우리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을지를 다 정하셨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제한된 날들 동안 우리는 세상에 살고 그 날이 끝나면 죽는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제한을 아무도 넘어가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벨사살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고 주장하셨다(단 5:2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언제든지 그의 정하신 때에 불러가실 수 있다(눅 12:16-20).

이제 욥은 하나님께서 품꾼 같은 삶을 사는 자신에게 생이 마칠 때까지 평안 주시기를 소원한다. 평안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였다(시 4:8).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참 평안을 주셨다(요 14:27).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16에서,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7-12절]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강]가 잦아서 마름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나무는 찍힐지라도 소망이 있어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를 내지만,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는 것 같다. 시냇물이 말라 버림같이 사람이 죽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의 때가 있다. 사람은 죽고 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하늘이 없어지고 잠자는 자들이 잠을 깨듯이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다(요 5:28-29).

[13-15절] 주는 나를 음부[무덤]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고난의]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변화가 오기까지](KJV, NASB) 기다렸겠나이다[기다리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겠나이다[사모하시리이다].

욥은 사람의 죽음을 음미하면서도 몸의 변화의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몸의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16-17절] 그러하온데[‘이는’(KJV, NASB) 혹은 ‘그러나’(ASV)]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세시오며 주는]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KJV)[살피지 아니하시나이다](NASB)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고난 중에 자신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세상에서 걷는 걸음들 즉 그의 행위들을 다 살피시고 의와 불의, 선과 악을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18-22절]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욥은 사람의 일생과 죽음을 묘사한다. 그것은 마치 산이 무너져 흩어지고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이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이 땅의 흙을 씻어버림 같다. 사람의 일생이 긴 것 같지만, 결국 산이 무너지고 바위가 옮겨지듯이, 무너지고 옮겨진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하신다. 사람은 임종이 가까우면 얼굴빛이 변하여 창백해지고 그의 아들이 존귀하든지 비천하든지 알아 보지 못하고 자기 살이 아프고 자기 마음이 슬플 뿐이다. 사람은 그렇게 임종을 맞는다.

욥기 1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짧고 괴로움 많고 쇠해지고 신속히 가는 삶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천국을 얻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거기에 인생의 참 가치가 있다.

둘째로, 모든 사람은 더러운 죄인이다. 죄는 사람들의 불행의 근본 원인이며 죄 문제의 해결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밖에 없다. 사람의 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님의 보혈로만 씻음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를 감사하자.

셋째로, 사람의 일생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길임을 알고 죽음을 염려하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써 일하고 또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자. 우리는 죽을 때 죽을 것이지만, 그때까지 충성해야 한다.

넷째로, 사람은 죽지만, 장차 몸의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 욥은 자신의 변화의 날, 곧 몸의 부활의 날을 소망한다. 신약성경은 우리의 몸의 변화의 날 곧 몸의 부활의 날을 밝히 증거한다. 고린도전서 15:42-44, 51-5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

 

 

 

 

15장: 엘리바스--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

1-16절, 가증하고 부패한 인생

[1-6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어찌 유조(有助)치 아니한[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 하나님 앞에 묵도(黙禱)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너를 쳐서 증거하느니라.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여러 말로 잘못된 비난을 쏟아내었다. 그는 욥의 말이 ‘헛된 지식,’ ‘무익한 말,’ ‘불경건한 말,’ ‘간사한 자의 혀’라고 비난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죄의 형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고 욥은 자신의 고난이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 아니라고 변호했던 것인데, 엘리바스는 계속 욥을 정당하지 않게, 그릇되이 비난한 것이다.

참된 성도도 친구들에게 이런 오해를 당할 수 있다. 욥의 고통은 경제적, 가정적,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친구들의 비난까지 겹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욥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요 욥기의 중심적 교훈이다.

우리는 친구에게 바른 조언을 주어야지 잘못된 조언을 주거나 그를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경우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잠 25:11). 또 잘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주관적 판단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한 판단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전 4:5).

[7-10절]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謀議)[은밀한 회의](NASB)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깨달은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에게는 없겠느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엘리바스는 욥의 확고한 지식과 신념에 대해 반박하면서 그 친구들 가운데는 나이 많은 자도 있고 심지어 욥의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으며 나이 많은 자들은 젊은 자보다 지혜와 지식이 더 많은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레위기 19:32는,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말했다. 욥도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고 말했다(욥 12:12). 르호보암은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의 조언하는 바를 버리고 그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의 조언을 따라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하며 행함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을 초래하였다(왕상 12:6-20).

그러나 진리의 지식과 바른 판단력은 반드시 연령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시편 119:100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지키는 자가 노인보다 더 명철하다고 말했다. 주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마 11:25).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나이가 많고 세상 경험도 많은 자들이었지만, 그 심령이 무지하고 완고하고 부패하였으며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다.

[11-13절]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네 눈을 번쩍여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네 입으로 말들을 내느냐?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말씀하시는 말씀’은, 친구들이 욥에게 한 충고들, 즉 그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엘리바스는 자기들의 충고를 하나님의 위로와 온유한 말씀이라고 말하며 욥이 왜 그것들을 무시하느냐고 꾸짖는다. 그러나 사실상 욥의 친구들의 충고들은 하나님의 위로나 온유한 말씀이 아니었다.

또 ‘네 눈을 번쩍여’라는 표현은 불쾌하고 적대적인 마음을 눈으로 표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욥이 그런 눈빛을 하면서 그의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의 입으로 말들을 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 욥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친구들의 잘못된 조언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던 것뿐이다. 욥의 말은 친구들을 반대한 것이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바스가 욥의 말들을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불경건한 말로 이해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바르게 알지 못할 때 이런 실수를 하게 되고 상대방을 잘못 평가하거나 정죄하게 된다. 다윗은 그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 종일 그의 말을 곡해하였다고 말했었다(시 56:5). 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하셨다(요 16:2).

[14-16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不淨)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엘리바스는 사람이 깨끗하지 못하며 악을 짓기를 물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수아 사람 빌닷도 그와 비슷하게 욥기 25:4-6에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고 하였다. 사람은 그 죄성과 그 결과로 인한 심한 비천함과 불행을 볼 때 가히 벌레와 구더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전적 부패성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실패에서, 또 사사시대의 반복된 범죄에서, 또 구약의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특히 선지자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했고 선을 행하기에 무능함을 증거하였다(렘 17:9; 13:23).

욥은 절대적 의미에서 자신이 깨끗하고 의롭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욥은 자신의 죄악됨에 대해 욥기 14:4에서,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 큰 벌을 받을 만한 어떤 특정한 죄가 없다는 것을 뜻하였다. 평소에 욥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엘리바스가 증거한 사람의 부패성은 진리이지만, 그가 그것을 욥에게 적용하려 한 것은 무리하였고 적절치 않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친구들에게 바른 조언을 주는 자가 되자. 엘리바스는 욥의 다른 친구들과 같이 욥에 대해 잘못된 비난을 쏟아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남에 관해 잘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자. 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치 말자.

둘째로, 우리는 평소에 노인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조언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기고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지키자. 노인들은 보통 오랜 삶의 경험 속에서 상당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바른 성경 지식과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또 오직 사실에 근거하여 사람과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자. 또 그런 판단에 근거해서 친구들에게 바른 조언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알자. 사람은 깨끗지 못하며 물마심같이 악을 행하며 가증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충성하자.

 

17-35절, 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함

[17-19절]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나를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그 열조에게서 받아 숨기지 아니하고 전하여 온 것이라.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

엘리바스는 지혜자들이 그 열조로부터 받아 숨기지 않고 전해준 것, 곧 사람의 전통적 지혜의 말을 욥에게 말하고자 한다.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는 말은 그 열조들의 지혜가 외부의 것과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고 전달되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전통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것은 좋은 것도 있으나 좋지 않은 것도 있다. 심지어 교회적 전통도 그러하다. 교회 역사는 교회의 부패를 증거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떡 먹을 때에 손을 씻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켰으나 부모 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주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다고 그들을 비난하였다. 그때 주께서는 책망하시듯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3-6).

[20-24절]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미스콜렐)[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 되었으므로(니츠페누)[혹은 ‘저장되었으므로’] 그 귀에는 놀라운(페카딤)[두려움의, 두려운 일들의](KJV, NASB, NIV) 소리가 들리고 그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하리니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자신이 어두운 데서 나오리라고 믿지 못하고] 칼날의 기다림이 되느니라. 그는 유리하며 식물을 구하여[양식을 위해 방황하며]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한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환난과 고통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니.

엘리바스가 전하는 열조들의 지혜의 말은 악인이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악인은 일평생 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강포자는 그 죽음의 날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나 다 작정되어 있다. 악인의 귀에는 두려운 일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할 것이다. 악인은 자신이 그 환난에서 회복될 것이라고 믿지 못하며 칼날을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을 것이다. 또 그는 양식이 부족하여 그것을 얻으려 방황하며 재앙의 날이 가깝다는 것을 안다. 환난과 고통은 그를 두렵게 하고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이길 것이다. 악인에게 질병, 기근, 전쟁 등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 재앙이 있다는 것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이다.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57:21). 단지, 이 진리가 욥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25-27절]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니라. 그는 목을 굳게 하고 두터운 방패로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나니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본문은 악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들며 전능자를 향해 거만하게 행하기 때문이다. ‘교만하여 배반한다’는 원문(이스갑바르)은 ‘거만하게 행한다’는 뜻이다(BDB, NASB). 고의적 불경건은 대단히 큰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와 선의 근거이시며 이유이시다.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떠난다(잠 16:6).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고 의지하며 거기에서 모든 죄가 나온다. 사람이 창조주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본문은 또 악인이 목을 굳게 하며 자기 방어물로 무장하며 하나님을 향해 달려들듯이 대적한다고 표현한다. 27절은 악인이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까닭을 말한다. “[이는](원문)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음이니라.” 악인이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그가 몸이 건강하고 물질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몸이 아프고 물질적 어려움이 있으면 겸손히 하나님을 찾지만, 몸이 건강하고 물질적 여유가 있으면 자기 만족에 빠지고 영적으로 둔해지고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창조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28-30절] 그는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하였음이니라[거하는도다].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항상 있지 못하며 그 산업(민람)11)이 땅에서 증식하지 못할 것이며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에 그가 떠나리라.

‘흑암한 데’는 환난과 재앙을 가리키며, ‘불꽃’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을 가리키며, ‘가지’는 사람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엘리바스는 악인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할 것이다. 그가 사는 도시와 성읍이 황폐할 것을 말한다. 또 악인은 비록 지금 부요함을 누리고 상당한 재산과 소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의 부요함은 끝나고 그의 재산은 항상 있지 못하며 그의 소득도 땅에서 쇠하여질 것이다. 즉 그의 경제적 유여함이 끝나고 궁핍이 찾아올 것이라는 뜻이다.

악인은 환난과 재앙을 떠나지 못하며 그것이 항상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은 그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쇠잔케 할 것이다. 그리고 악인은 마침내 하나님의 입김, 곧 그의 진노의 입김으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악인의 보응은 확실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말씀하신 바이다. 그것은 또한 사람이 양심으로 느끼는 바이며 또 삶 속에서 때때로 경험하는 바이다.

[31-35절]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허망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룰 것인즉 그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포도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사곡한(카네프)[불경건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그들은 악한 생각을 배고 불의(아웬)[헛된 것]를 낳으며 마음에 궤휼[거짓]을 예비한다 하였느니라.

엘리바스는 계속 악인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본문은 악인이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다가 허망한 결과를 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가 가졌다고 생각한 것은 결국 다 공허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다. 만일 그가 처음부터 그것의 헛됨을 깨달았다면 그는 세상 것들에 대한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크게 여기며 사모하였을 것이다.

악인은 ‘그의 날’ 곧 그의 번창하고 성공하는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 곧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은 잘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포도나무에서 익지 않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고 감람나무에서 감람 꽃이 떨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악인은 잘되는 것 같다가 멸망할 것이다.

악인들은 불경건하고 뇌물을 받는 자들인데 결실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복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또 그들의 장막, 그들의 집과 가정은 불탈 것이다. 그들은 악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헛된 것을 행하며 또 거짓된 것을 마음에 준비할 뿐이다. 의인과 악인의 삶은 판연히 다르고, 악인은 공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의 전통들은 완전치 못하다. 심지어 교회의 전통도 완전치 못하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은 오직 신구약성경뿐이다. 하나님의 말씀만 완전하다(시 19:7-8).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전통이나 교회의 전통을 너무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만 굳게 지켜야 한다(살후 2:15). 

둘째로, 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 악인에게는 질병, 기근, 전쟁 등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 재앙이 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구원받은 우리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알고 악인에게 고통과 두려운 일이 따름을 알고, 모든 악을 버리고 의와 선만 구하며 행해야 한다.

셋째로, 악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해 교만하게 행하며 목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교만과 거만을 버리고 자신이 피조물이며 늘 부족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과 교훈을 힘써 배우며 실천해야 한다.

넷째로, 악인은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다가 허망한 결과를 당하며 그의 거처하는 곳은 황폐해지고 그의 경제적 유여함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악인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보응을 받을 것이며 그와 그의 가족과 그의 산업은 쇠잔해지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악인의 심판받음과 그의 환경적, 경제적 환난과 재앙을 알고, 그의 현재의 일시적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불평하거나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에 큰 가치를 두지 말고 모든 욕심과 악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과 영생에 큰 가치를 두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며 장차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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