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의 1940년 작품인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난, 고통과 재난에 대한 신학적 수상록이다. 저자는 “왜 사랑이 많으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과 고난을 겪도록 허용하실까?”라는 보편적인 문제에 대해 논리적이고 기독교적인 대답을 제공하려고 시도한다. 그동안 영국의 신학사에서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해결책은 이신론(theism)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계를 자율적인 자영 체계로 만드신 후에 세계로부터 자신을 철수했다고 보는 사상이다. 따라서 이신론에서 고통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문제이고 세계 내적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이신론의 공격을 봉쇄해 보려고 분투했다. 그러나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20세기 최대 논리학자이자 수학자 중에 한 사람인 영국의 버트란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세상의 경험으로 추론할 수 있는 신은 적어도 둘 중에 하나의 신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전능하지만 도덕적으로 악하고 애매모호한 신이 존재하거나, 아니면 선하지만 전능하지 못한 신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는 이런 이신론적 명제와 러셀 류의 무신론적 명제에 대한 기독교적 변증서라고 볼 수 있다. 「고통의 문제」는 머리말과 서론을 제외하고 10장으로 구성돼 있다. 끝 부분에 임상 경험을 통해 고통의 효과를 묘사한 하버드(R. Harvard)의 임상 보고서가 부록으로 첨부돼 있다.
고통의 방정식 서론인 1장에서 루이스는 고통에 대해 우선 해결해야 할 하나의 방정식 같은 문제라고 규정한다. 고통을 신비라고 정의하면서 섭리론으로 너무 일찍 도피하지 않는다. 저자는 “고통을 느끼는 의식의 소유자 인간”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고통, 죽음, 전쟁과 테러, 범죄)로부터 창조자의 선함과 지혜를 추론하기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한다(21쪽). 이런 점에서 “우주의 배후에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거나, 선과 악에 무관심한 이가 존재하거나, 악한 영이 존재하거나 셋 중에 하나”만이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선택들처럼 보인다(19쪽).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기이하게도 “우주를 자비롭고 전능한 신의 작품으로 믿는” 외로운 선택을 한다. 하나님의 전능을 다루는 2장에서 루이스는 고통의 존재와 선하신 하나님의 공존이 주는 난해한 방정식을 풀 수 있는 가능성을 다룬다. 여기서 저자는 “왜 전능하신(almighty)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들이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당할 때 간섭해 주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다룬다. 그 대답은 하나님이 피조물 자신들의 선택과 자연적 법칙에 의해 당하는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 마음대로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 질서 및 자유 의지와 맞물려 있는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49~50쪽).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 의지와 자연 법칙을 정지시키고 무효화하면서까지 당신의 전능을 구사하거나 과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고통이 없고 인간의 자유와 선택의 존엄도 사라진 세상보다, 고통은 있지만 여전히 인간의 자유 의지와 판단의 엄숙성이 존재하는 그런 세상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그릇된 판단이 하나님의 전능에 의해 저지되지 않아 악행과 고통이 발생하는 현상은 분명히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의 전능성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행동할 권리를 박탈해 가면서까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전능성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만일 미국의 군사 행동처럼 발휘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살벌할까?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길은 영원히 막혀버릴 것이다. 악행 창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심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인간의 자유 공간을 창조하기 위한 억제된 전능성이다. 뒤따라 나오는 3~9장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경험하는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루는 3장에서 루이스는 고통을 인간의 유한한 지성에 대해 “고통이 없는 삶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주장한다. 고통의 유무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유무를 결정하려는 주장은 그릇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은 본질상 사랑받는 대상의 완전성을 요구한다. 사랑받는 대상의 어떤 행위나 상태(고통을 제외하고)도 참아주는 친절은 이런 의미에서 사랑과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저자는 ‘사랑’과 ‘무조건적이고 무원칙적인 친절’과 혼동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그는 인간의 고통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순전히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할 때는 해소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70쪽).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주된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다(74쪽). 하나님은 사랑의 본성상 지금 우리의 인격에 있는 흠들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그분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71쪽). 그렇다면 현재 사람의 모습은 왜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완전하고 흠집이 많은 존재로 되었는가? 인간의 악함을 다루는 4장은 인간 고통의 대부분이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해 발생한 것으로 진단한다(84~85쪽). 이 장의 주요 논지는 죄의 신학적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친절과 무조건적(무원칙적인) 사랑만이 가치 있는 덕목으로 간주하는 현대 문화의 전반적인 풍토와 개인적인 차원의 죄의 의미를 희석화시킨 정신분석학과 사회학 등은 개인의 죄책감을 고취시키려는 기독교에 드세게 저항한다. 비록 루이스가 전적 타락 교리에 반대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끔찍할 정도로 망가진 존재임을 인정한다.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인간의 타락을 다루는 5장은 타락 교리를 옹호하는데, 루이스는 일원론과 이원론 모두를 배격한다. 기독교의 정통적인 교리를 아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고, 모든 것들을 그분의 유익을 위해 선하게 만드셨으며, 그분이 만든 선한 것들 중에 하나 즉 이성적인 피조물의 자유 의지에는 본질상 악의 가능성이 내포돼 있고, 피조물들은 그 가능성을 틈타 악해졌다. 아담의 타락을 죄 없는 ‘순수 인간’이라는 종(種, species)의 지위를 박탈당한 사건으로 파악하며, 아담의 죄는 유전되지 않는 획득형질 이상의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악한 욕망에 의해 지배받는 인간성이라는 유전 인자를 획득하게 되었고, 그것은 유전에 의해 모든 세대에게 전달된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일탈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선’(善)이란 본질적으로 우리를 치료하며 바로 잡아주는 것을 의미한다(132쪽). 이 바로잡아 주는 선은 자주 고통과 시련을 통해 경험하게 된다.
인간을 치유하는 고통의 창조적 기능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6장에서 루이스는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의 일탈 상태를 회복하게 하는 선은 사람이 자신을 창조자에게 지적, 의지적, 감정적으로 양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통은 반역적 인간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창조적인 역할을 맡는다. 만사가 잘 되어 간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 고통의 첫 번째 효력이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본질적으로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전부 우리의 것이며 그 이상은 필요치 않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 두 번째 효력이다. 고통의 세 번째 효력은 자아 양도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성적인 피조물은 창조자에게 순종함으로써 피조물 본연의 역할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며 우리를 타락시킨 행위를 뒤엎고 아담의 반역을 역전시킴으로써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고통과 시련을 맛본다. 루이스는 고통의 구속적(救贖的) 효과와 기능을 다루는 7장에서 하나님이 반항하는 피조물들이 만들어내는 순수 악을 구원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와 그 결과로 만들어진 복합적인 선 즉 고난을 받아들이고 죄를 회개하는 데 이르는 과정을 논증한다. 저자는 한마디로 고난이 가져다주는 구속적 효과는 반항 의지 감소 속에서 경험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고난과 시련은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안주시킬 장애물을 제거하며 우리 영혼의 나침반을 하나님 나라를 향해 고정시켜 준다. 지옥의 실재성과 필연성을 다루는 8장에서 저자는 고통이 악인을 일깨울 수 있지만 악인이 끝내 자신의 반역 사실을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지옥의 불가피성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그는 지금 있는 그대로, 즉 하나님을 향한 반역 의지를 철회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용서하시라고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은 묵과와 용서를 혼동하는 데서 나온 태도임을 설파한다. 동물의 고통을 다루는 9장에서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동물들에게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주실까?”라는 질문에 답변한다. 저자는 아담의 타락 이전에 먼저 타락한 영적 세력들에 의해 동물들이 이미 타락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개진한다. 따라서 저자는 아담의 창조에 대해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타락해 야수성을 한껏 발산하는 동물들에게 구속자적 책임을 염두에 둔 창조주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론을 펼친다. 그는 동물 구원도 기독교의 우주적 구원론의 일부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사 11:6). 천국의 실재성을 다루는 10장에서 루이스는 천국을 자기 드림, 자기 양도가 완벽하게 구현되는 곳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반역적이고 자기 주장적 의지를 펼치는 영혼들의 마주침 속에서는 고통과 고난, 시련과 환난은 회피할 수 없지만 완벽한 자기 드림과 자기 양도가 일어날 천국이 고통 너머의 미래가 된다. 천국은 가장 높은 존재로부터 가장 낮은 존재에 이르기까지 자아는 드려지기 위해 존재하며 그렇게 드려질수록 진정한 자아가 되고 그 결과로 더 드리는 과정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이다(232쪽). 고통과 시련은 천국에서 완벽하게 구현될 자기 드림과 자기 양도를 연습하는 계기가 된다.
실존적 고통의 경험 이 책은 아주 논리적이고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1장에서 10장까지 저자의 논지는 일관성과 견고성을 유지하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루이스는 여러 주제들을 대화체 어조의 논리적인 흐름 속에 잘 배열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장들을 잘 이해하고 따라오도록 돕고 있다. 책 전체의 논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고통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고통스럽다. 나는 오직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된다는 케케묵어 보이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루이스는 약 20년 후인 1960년에 사랑하는 아내(Joy Davidman)를 잃어 상심하고 슬퍼하는 남편으로서 또 하나의 작품을 남긴다. 곧「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이다. 고통에 대한 경험적이고 내적인 그의 성찰록이다. 여기서 루이스는 실제로 고통과 함께 공존하는 용기 및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성찰하며 음미하는 정직성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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