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아이는 자전거와 함께 나타났다. 너울거리는 아지랑이 사이로 굴러오는 은빛 바퀴살을 보았다. 바퀴에 감겨 굴러오는 날렵한 햇살은 눈이 시리도록 밝았다. 꿈인가. 하늘에서 툭, 떨어져 내린 햇살 한 줌이 이곳까지 잘못 굴러온 게 아닐까. 너무 환한 둥근 빛살로 그렇게 그 아이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순정, 남자의 눈물, 남자의 고독이 써내려간 지독한 사랑 노래.
그 아이는 자전거와 함께 나타났다. 너울거리는 아지랑이 사이로 굴러오는 은빛 바퀴살을 보았다. 바퀴에 감겨 굴러오는 날렵한 햇살은 눈이 시리도록 밝았다. 꿈인가. 하늘에서 툭, 떨어져 내린 햇살 한 줌이 이곳까지 잘못 굴러온 게 아닐까. 너무 환한 둥근 빛살로 그렇게 그 아이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순정, 남자의 눈물, 남자의 고독이 써내려간 지독한 사랑 노래.
1. 아팝나무가 있는 우체국
2. 우리가 열여섯 살이었을 때
3. 내 안으로 달리는 기차 하나
4. 침묵으로 사라지는 것
5. 그녀가 내게 가르쳐준 외로움
6. 젖은 사랑은 다시 젖지 않는다
7. 그대에게 이르는 먼 길
8. 가시나무
9. 그대, 교활한 사랑아
10. 창백한 청춘의 그늘 밑
11. 이별이 어디 그리 쉬운가
12. 눈물 젖은 편지
'한마디만 할게. 만난다는 건.....미로 찾기 게임 같은 거야. 만났다는 건, 너무 일찍 만나버렸다는 건, 많은 이별들이 거기에 담겨 있다는 뜻이야. 오히려 저 무더기 속에 새롭고 싱싱한 만남이 부활하고 있을지도 몰라. 너희들도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미로들을 만나게 될꺼야'
선생님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미로를 찾으려면 밝은 눈을 가져야 해. 손에 진한 연필심을 쥐고 밝은 눈으로 바라봐야 해. 막히면 돌아갈 줄도 알고..... 다른 길도 찾을 줄 알아야 해. 막혀있다고 주저 앉으면 안 돼.....명심해. 돌아올 시간이 없다는 걸, 너무 늦어 있다는 걸....'--- p.43
별들도 잠들어가고 있었다. 상은은 장작더미에 몸을 기댄 채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상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몸을 만져서 그녀의 마음을 열리게 할 수만 있다면, 감추고 있는 그 암구호를 읽어낼 수만 있다면, 나는 스스럼 없이 가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세상의 반은 다른 절반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상은은 모르고 있었다.--- p.183
내가 아는 것이라곤 아픔 없는 사랑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사랑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흘린 눈물은 얼마나 많은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면서 흘린 눈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강둑에 닿은 산등성이 아래쪽으로 능금밭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능금나무 아래 앉아 붉게 젖어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p.99
내 안에 상은의 이름이 자리잡게 되면서, 나는 한 여자를 잊었다. 상은의 이름을 가슴에 채워넣기 전까지, 내가 연모했던 여자는 영어 선생님이었다. 나는 2년 동안이나 그녀를 연인으로 삼았다. 밤새 꽃봉오리를 모으고 잠이 들었다가 아침바람에 눈을 뜬 수련처럼, 맑고 고운 눈매를 가진 여자. 읍내에서 들어오는 이른 새벽의 첫 버스에서 조심스레 내려서던 흰 양말 목, 바람이 빗어주었을 긴 머리칼이 덮어주던 가느다란 목선, 힘찬 구령 한마디에도 힘없이 꺾여 넘어갈 것만 같던 허리…….
지난해 여름, 내가 화장실 당번을 맡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그날 오후, 나는 교무실에 딸린 화상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자루가 달린 물걸레를 들고 닫힌 문을 두드렸을 때 화장실 안에서 여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한 번 노크를 했을 때, 여자의 가느다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교무실 청소를 맡았던 여학생일 것이나. 나는 인내심을 갖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학교에 남아 있는, 그 여학생이 남겨 놓았을지도 모를 오물을 닦아놓지 않으면, 나는 성실하지 못한 학생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 p. 37
'감꽃이 피었어.'
내 허리를 감고 있던 그녀의 손이 감나무 가지를 가르켰다. 새하얀 감꽃은 푸른 이파리 속에 수줍게 숨어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땅에 떨어진 감꽃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건 뭘 하려고?'
나는 옷자락에 감꽃을 담고 감나무 아래까지 뻗어 있는 칡넝쿨을 끊어냈다. 희기도 하고, 노랗기도 하고, 때로는 푸르게 보이는 감꽃은 갈래 하나 없는 통꽃이었다.
'목걸이야'
나는 칡넝쿨에 꿴 감꽃을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녀는 잠시 탄성을 내지르고 나서 하와이 처녀가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pp.76-77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구두 한 켤레를 간직했어. 처녀 적에 아버지가 사준 구두였지. 아마…… 첫 선물이었을 거야.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엄마는 그 구두를 꺼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구두코를 닦았어.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까짓 구두…….”
“…….”
“엄마는 왜 그까짓 구두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몰라.”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겠지.”
“그럴까? 엄만 나를 낳은 이후에 아버지의 옷깃 한 번 만져보지 못했을 거야.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버진 오래 전에 엄마를 잊었을지도 몰라.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어?”--- p.94
“너도…… 편지에…… 읽어줄 사람의 이름을 적었니?”
붉어진 얼굴을 숨기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을 때, 나는 상은의 입가에 번져가는 엷은 미소를 보았다.
“그래, 네 이름을 적었어. 이름을 아는 남학생은 너뿐이었거든.”
차라리 묻지 말 것을 그랬다.
“그래서…… 내 이름을 적은 거야?”
“아무렴 어때, 난 내 편지가 혼자 묻히는 게 싫었어.”
혼자 있으면 유리병 속에서 숨이 막힐 거라고, 상은은 말했다.
1. 겨울 숲으로 가자
2. 함께 떠나는 밤
3. 내 기억의 가장 따스한 곳, 그 오두막
4. 등 푸른 생선을 먹는 아침
5. 상은의 일기
6. 녹색의 시간
7. 세월의 푸른 낫
8. 망각의 숲, 서른 살의 식목일
9. 종이로 지은 집
10. 이별이 시작될 때
11. 열한 번째 사과나무
12. 눈물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나 한 채의 집을 짓는다. 그러나 언젠가 그는 떠나고, 결국엔 다음 사람에게 집을 넘겨준다. 집을 넘겨받은 사람은 그 위에 다시 집을 짓는다. 그리하여, 그 집을 완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226
아, 이젠...너무 힘이 들어. 놓아버리고 싶어. 내가 죽으면... 하얗게 태워서... 이곳에 뿌려줘. 거기에 붇혀 있다가.. 가장 먼저, 피어나는, 꽃이 될 거야. 그땐, 날 기억해줘... 안녕, 안녕, 내사랑.
울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내 곁에서 영원히 안식을 취할 수 있으므로.--- p.258
살아있을때,
살아갈 시간이 남아있을때,
난 깨달았어야 했어
사랑은 양보하는게 아니라는걸,
사랑은 누군가에게
대신 짐 지울 수 있는게 아니란걸.--- p.239
나도 이젠 넘어졌으면 좋겠어.
내 안에 길러온 죽음들을 꺾어버리고 편안하게 누웠으면 좋겠어.그래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오랫동안 잠을 잘 수 있었으면..
단 한 번 사랑을 하고,
단 한 번 꽃을 피우기 위해
수천만 년을 화석 속에 갇혀 지낸 씨앗처럼...--- p.69
끝까지 바라고보 있을께.
네가 천국의 계단 앞에 이를 때까지
바라보고 있을게.
걱정하지 마.
네가 내 이름을 잊어도,
언젠가...네가 그곳에 가면
네 이름을 목놓아 부를게
반드시 널...찾아갈게.--- 머리말 중에서
"솔직하게 말해 봐. 아직도 상은이 생각해?"
나는 아내의 느닷없는 물음에 놀라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내의 입가에는 희미한 냉소가 서려 있었다.
"아직도 사랑한다고? 이 세상 끝까지 달려가서라도 찾아내겠다고? 이거, 네가 쓴거 맞아? 내 남편이 쓴거 맞아?"
"그건 결혼 전에 쓴 일기야!"
나는 일기장을 빼앗으며 짐짓 아내의 무례한 행동을 무시했다. 어쨌든 아내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처지였다. 내가 변명을 하거나 대꾸는 하면 오히려 지루한 말싸움으로 버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나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계속 내 신경을 건드렸다.
"왜 이 일기를 아직도 책꽂이에 꽂아두는 거지? 그건…… 나보고 읽어보라는 뜻 아냐? 읽고 깨달으라는 거 아냐?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상은이라는 걸 알아달라는 뜻 아냐? 말해 봐. 네가 내 옆에서 상은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들어줬어. 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어. 네 진심을 솔직하게 말해 봐. 네가 정말 그 여잘 사랑한다면 붙잡지 않을게. 그냥 보내줄게."--- p. 180
"솔직하게 말해 봐. 아직도 상은이 생각해?"
나는 아내의 느닷없는 물음에 놀라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내의 입가에는 희미한 냉소가 서려 있었다.
"아직도 사랑한다고? 이 세상 끝까지 달려가서라도 찾아내겠다고? 이거, 네가 쓴거 맞아? 내 남편이 쓴거 맞아?"
"그건 결혼 전에 쓴 일기야!"
나는 일기장을 빼앗으며 짐짓 아내의 무례한 행동을 무시했다. 어쨌든 아내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처지였다. 내가 변명을 하거나 대꾸는 하면 오히려 지루한 말싸움으로 버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나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계속 내 신경을 건드렸다.
"왜 이 일기를 아직도 책꽂이에 꽂아두는 거지? 그건…… 나보고 읽어보라는 뜻 아냐? 읽고 깨달으라는 거 아냐?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상은이라는 걸 알아달라는 뜻 아냐? 말해 봐. 네가 내 옆에서 상은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들어줬어. 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어. 네 진심을 솔직하게 말해 봐. 네가 정말 그 여잘 사랑한다면 붙잡지 않을게. 그냥 보내줄게."--- p. 180
미칠 것 같은, 죽을 것만 같은 사랑, 다음 생에는 나, 사랑을 받기만 하리
순수하고 영롱하며 모든 것이 눈부신 열여섯의 푸른 4월, 사과나무 아래에서의 운명적인 마주섬으로부터 이 소설의 가슴 시린 이야기는 시작된다. 4월의 햇살, 숨막히도록 향긋한 사과나무 향기, 속이 들여다보이는 깨끗한 유리병. 친구들의 재잘거림, 진흙밭에 선명하게 찍히는 발자국 같은 설레임. 이 속에 불멸의 지고한 사랑을 꿈꾸는 순수한 영혼의 씨앗이 숨죽이며 웅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었을까.
이 소설은 '사랑의 소멸'을 통해서 오히려 '사랑의 회복'을 모색하는 매우 이채로운 작품이다. 작가의 섬세한 눈과 예리한 손길은 '신화'로 멀어져가고 '신파'로 전락해 가는 위태로운 사랑의 부조를 실감있는 부피로 우리 앞에 되살려 놓는다. 우리는 그 앞에서 사랑의 극적인 속성이 영속적으로 지니고 있는 감동에 가슴 흠뻑 젖어들 수 있다.
거듭된 이별, 엇갈림, 망각, 질투, 욕망, 재회 그리고 죽음, 우리는 이처럼 낯익은 소품들이 소품들이 작가의 예리한 손끝에서 얼마나 특별하며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로 다시 만들어지는지를 새삼 깨닫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사랑'이 가지고 있는 마술 같은 힘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어져갈수록 더욱 견고해지고 갸륵해지는 사랑을 확임하면서, '나'는 사랑이 '결과'가 아닌 과정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가슴 저미도록 통렬하게 깨닫는다. 그 사실이 '나'는 아프다. 때문에 사랑에 대한 순수한 갈망이 사랑 자체로 완성되어지는 사랑의 오묘한 섭리 앞에서 눈물 흘리며 몸서리치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눈앞에서 사랑이 무참하게 무너져내려도, 사랑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결코 그 사랑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
이 소설은 '사랑의 소멸'을 통해서 오히려 '사랑의 회복'을 모색하는 매우 이채로운 작품이다. 작가의 섬세한 눈과 예리한 손길은 '신화'로 멀어져가고 '신파'로 전락해 가는 위태로운 사랑의 부조를 실감있는 부피로 우리 앞에 되살려 놓는다. 우리는 그 앞에서 사랑의 극적인 속성이 영속적으로 지니고 있는 감동에 가슴 흠뻑 젖어들 수 있다.
거듭된 이별, 엇갈림, 망각, 질투, 욕망, 재회 그리고 죽음, 우리는 이처럼 낯익은 소품들이 소품들이 작가의 예리한 손끝에서 얼마나 특별하며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로 다시 만들어지는지를 새삼 깨닫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사랑'이 가지고 있는 마술 같은 힘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어져갈수록 더욱 견고해지고 갸륵해지는 사랑을 확임하면서, '나'는 사랑이 '결과'가 아닌 과정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가슴 저미도록 통렬하게 깨닫는다. 그 사실이 '나'는 아프다. 때문에 사랑에 대한 순수한 갈망이 사랑 자체로 완성되어지는 사랑의 오묘한 섭리 앞에서 눈물 흘리며 몸서리치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눈앞에서 사랑이 무참하게 무너져내려도, 사랑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결코 그 사랑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의 자각은 곧 사랑에 대한 도저한 확신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아파도 '나'는 그 아픔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을 꿈꾸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아름답고 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사랑의 완성이라는 애틋하며 간절한 희망을 가슴 속에 슬그머니 밀어 넣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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