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편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샤할에 맞춘 노래〕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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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편 강해: 메시아의 고난
1-21절, 메시아의 고난
[1-2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여’라고 반복해 부르며 낮에도, 밤에도 부르짖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고난 중에 버려두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멀리하여 돕지 않으셨고 그의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않으셨고 그가 밤낮 부르짖어도 응답지 않으셨다.
다윗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표이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비슷하게 부르짖으셨다. 그의 십자가 고난은 택한 백성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의 고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깊은 뜻 가운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버려두셨고 구원하지 않으셨다.
[3절]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원문은 “그러나 주는”이라는 말(웨앗타)로 시작된다. 다윗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고난 중에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자이심을 고백하였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시편 33: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고 말한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스스로 계신 자이시며 세상과 구별되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시다.
[4-5절]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신앙의 열조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였다. 믿음은 창조자, 섭리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그의 지혜와 능력과 선한 목자 되심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로 나타난다. 신앙의 열조들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기도는 믿음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또 하나님을 의뢰하고 간구한 그들은 그의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환난에서 건지셨고 그들로 수치를 당치 않게 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과 구원하심을 체험할 것이다.
성경은 믿음의 열조들의 많은 체험들을 기록한다. 유다 왕 아사는 구스 군사 백만의 침략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도우심을 간구하였고 그의 도우심으로 구스 군대를 패배시켰다(대하 14:11).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셨다(대하 32:20-21).
[6-8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믿음의 열조들과 달리, 다윗은 지금 큰 고난 중에 있고 그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자신을 ‘벌레’라고 표현한다. 욥도 사람을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라고 표현했고(욥 25:6), 또 이사야서에도 “지렁이[벌레] 같은 너 야곱아”라는 표현이 나온다(사 41:14). 고난이 많은 인간의 삶을 생각하면 인간은 벌레같이 천해 보인다. 죽은 몸에 벌레가 생기는 것을 보면, 사람과 벌레의 차이가 적어 보인다.
다윗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고 멸시를 받는다고 고백한다. 그가 당한 고난은 메시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실 고난을 예표한다. 원수들은 다윗을 보며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조롱했다. 그들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거라고 놀린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의 백성을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가운데 버려두신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지나가는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그를 모욕하였다(마 27:39-43).
[9-11절] 오직[그러나]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벌레같이 천해진 상황에서도 다윗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였음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출생케 하셨고 모친의 젖을 먹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른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어린아이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그는 자기의 택한 영혼들을 갓난 아이 때부터 돌보신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은 커서 그가 신앙고백을 할 때부터가 아니고, “모태(라캄)로부터,” “어머니의 배(베텐)로부터”이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신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 전에는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침례교회의 생각과 다르다. 장로교회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 생명들이 그 출생 때부터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믿는다. 그들은 집안에 있는 이방인이 아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남자 아이에게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베푼 이유요, 신약시대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근거이다.
믿음의 열조들을 도우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며, 어릴 때 우리를 도우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리고 늙어 쇠약할 때에도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한다. 지금 다윗은 환난 중에 아무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는 어렵고 절박한 상황에 있지만, 그를 도우실 자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굳게 믿고 있다.
[12-18절]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거칠고 힘센 황소같이 또 잔인하고 위협적인 사자같이 그를 둘러쌌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심신으로 약해져 그의 생각, 감정, 힘, 그리고 용기가 다 쏟아져 버린 것 같고 그의 모든 뼈가 어그러진 것 같았다. 또 다윗의 마음은 초같이 녹았고 그의 힘은 질그릇 조각같이 말랐으며 그의 혀는 이틀에 붙었다. 그는 거의 죽음 앞에 있는 자, 혹은 거의 죽은 자와 같았다.
또 다윗의 대적자들은 물고 뜯는 개들과 같이 인정이나 도덕성이 없이 다윗을 둘러싸 그의 손과 발을 찔렀다. 육신의 고통이 심하여 모든 뼈들이 다 이탈되어 그 수를 셀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그를 주목하며 심지어 그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고 그의 속옷까지도 제비뽑아 취하였다. 겉옷과 속옷까지 취하는 것은 사람에게 아마 가장 큰 모욕과 수치일 것이다.
실제로 다윗이 언제 이런 고난을 당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메시아의 고난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작은 인정도 자비도 없는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에 찔림을 받으셨고 로마 군병들은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가졌고 그의 속옷을 제비뽑아 가졌다(요 19:23-24).
[19-21절]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다윗은 극심한 고통의 현실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힘이 되신다.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고통의 현실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요청한다. 성도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끝으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다는 말씀은 기도 응답의 확신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간구를 응답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도 택자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악인들의 개가를 그치게 하셨고 자신의 의로우심을 증거하셨고 우리의 의와 구원이 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큰 고난 중에라도 낙심치 말고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바라보고 또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기대하자.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성도들의 믿음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며 그들을 여러 가지 고난 중에서도 구원해주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자.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찬송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찬송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올려야 할 일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의 대속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감사하자. 또 우리는 진리와 의를 위한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즐거이 동참하자. 주를 위해 고난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2-31절, 하나님을 찬송하고 전함
[22-24절]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형제들]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이는]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들으셨음이로다].
다윗은 회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다. ‘회중’(카할)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감사치 않고 찬송치 않을 것이지만, 성도들의 회에서는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 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권한다. 찬송은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의무이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24장로들과 천만 천사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께서 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고 찬송하였다(4:10-11; 5:12).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믿고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난 당하는 자들의 고난을 멸시치 않으시고 그 얼굴을 숨기지 않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다윗의 체험과 찬송이 이유는 모든 성도들의 체험이며 찬송의 이유이다.
[25절]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대회’(카할 라브)라는 원어는 ‘많은 회중’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많은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는 그가 성도들과 함께 부르는 찬송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 대한 찬송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과 힘을 가져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15:10).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찬송은 참된 찬송이다.
다윗은 또한 그의 서원을 경건한 자들 앞에서 갚겠다고 고백한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결심하고 약속하는 것이다. 다윗은 큰 환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간구하며 서원하였던 것 같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으므로, 그는 그 서원한 바를 그대로 갚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서원은 꼭 갚아야 한다. 옛날에 입다는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그에게 붙여주셔서 승리케 하시면 돌아올 때 집 문에서 제일 먼저 그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하였고 그것을 이행하였다(삿 11:30-31).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를 하나님의 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였고 그것을 이행하였다(삼상 1:10-11).
[26절]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본절은 고난에서 건짐 받은 성도를 ‘겸손한 자,’ ‘여호와를 찾는 자’라고 표현하며 그가 받는 복을 말한다. ‘겸손한 자’(아나윔)라는 원어는 ‘고난 당한 자, 겸손한 자’라는 뜻이다. 성도는 고난을 통해 겸손한 인격이 되며 또 이제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된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에서 건짐 받은 성도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먹고 배부르게 하신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했다(시 23:1- 2). 이사야 55:1-2,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또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다. 성도는 평소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지만, 특히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고 구원을 체험하며, 그 후로는 더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된다. 구원받은 체험을 한 자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그는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를 것이다.
또 하나님을 찾는 자의 마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마음은 영혼의 활동이다. 마음이 죽는다는 말은 마음이 슬픔과 절망 가운데 낙심되고 침체되는 것을 말하고, 마음이 산다는 것은 마음이 기쁨과 소망 가운데 힘을 얻고 활기를 찾는 것을 말한다고 보인다.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구원 얻은 성도는 마음에 힘과 기쁨과 활기를 얻을 것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슬픔과 근심, 환난과 고난이 많지만, 하나님을 찾는 자의 마음은 영원히 기쁨과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27-28절]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땅의 모든 끝 곧 만국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은 예언이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우리나라는 그 ‘땅끝’에 속한다. 우리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들어온 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단지 100년 전의 일이었다.
열방의 모든 족속, 즉 세상의 모든 족속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것이 세계복음화이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즉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는 약속에서 이미 암시되었다(창 12:3; 18:18). 이것은 이사야 45:22에서도 암시되었다: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주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고(마 28:19),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7).
세계복음화의 이유는 나라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열방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이시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되어진다. 창조도, 타락도, 구속도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있다. 의인의 고난도, 악인의 핍박도 그렇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도 만세 전에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이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온다(롬 11:36).
[29절]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풍비한’이라는 원어(다쉔)의 뜻은 ‘살찐, 부유한, 힘있는’이다. 이 말은 육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존귀하고 힘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과 돈을 의지하며 살았을지도 모르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에게로 돌아오며 영의 양식을 먹고 하나님께 경배할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지만, 부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또 본문에 ‘진토(아파르)[즉 흙]에 내려간다’는 말은 ‘풍비한’이라는 말과 대조되며 죽음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면 ‘진토에 내려가는 자’는 가난하고 가련하고 힘이 없어 죽어가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 즉 거의 죽을 지경에 떨어졌으나 스스로 자신을 건지거나 회복시킬 힘이 없는 자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복된 새 생명을 얻는다. 옛날부터 이런 자들이 많이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을 받았다(고전 1:26).
이와 같이, 본문은 각양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을 암시한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권세자도 평범한 시민도, 용사도 가련한 자도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굴복할 것이며(빌 2:10-11) 택함 받은 모든 사람이 구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할 것이다.
[30-31절]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구원받은 자들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구원의 복음과 바른 신앙생활은 경건한 모든 사람에게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전해져야 한다(신 6:6-7; 엡 6:4). 또 구원받은 성도는 특히 하나님의 의를 전파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마 5:17), ‘다 이루셨다’고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고(요 19:30), 우리의 의(義)를 위해 율법의 완성이 되셨다(롬 10: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른 신앙의 계대(繼代)가 주님 오실 때까지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고린도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디모데후서 2:1-2,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를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세상에는 고난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신다.
셋째로,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27-28절,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구원의 복음을 만방에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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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편
〔다윗의 시〕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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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편 강해: 하나님께서는 나의 목자
[1-2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시며 우리는 그의 양이다. 목자는 양을 먹이고 보호하며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에스겔 34:15,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지라.” 요한복음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하나님의 양인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소유자로서 부유하시고 전능자로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신명기 8:4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였으나 그 의복이 해지지 아니했고 그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다고 증거하였다. 마태복음 6:33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풍족히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쉴 만한 물’이라는 원어(메 메누코스)는 ‘잔잔한 물’이라는 뜻이다.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잔잔한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의 양식이며(마 4:4)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흘러 넘치는 생수의 강이시다(요 7:37-39). 그것은 푸른 풀과 잔잔한 시냇물 같은 만족한 은혜이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소생시킨다’는 원어(예슈베브)는 ‘회개시킨다, 회복시킨다, 새 힘을 준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리셨고 또 시시때때로 죄와 실수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연약해지고 피곤해질 때 우리의 영혼을 회개시키시고 회복시키시며 새 힘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자이시다(사 40:27-31).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향은 의(義)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롬 10: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로마서 3:22-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것이 구원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실제로 의로운 인격이 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애쓴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의로운 인격이 되고 의롭게 사는 것이다(살전 4:3).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그의 이름 때문이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님의 이름, 그리스도의 이름이 붙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고 우리에게 존귀한 이름을 주셨고 또 그 이름 때문에 우리를 의의 길, 거룩한 길로 더욱 인도하시는 것이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환난 많은 세상을 가리킬 것이다. 세상에는 곳곳에 죽음의 위협과 공포가 있다. 각가지 질병과 사고가 있고 지진,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있다. 또 세상에는 영적인 무지와 부도덕의 어두움도 가득하다. 세상에 참된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지만, 심지어 교회들 안에도 거짓된 목사들과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교인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또 마귀는 세상 곳곳에서 성도들을 넘어뜨리고 삼키려고 두루 다니며 찾고 있다(벧전 5:8).
그러나 성도는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해’는 영적인 혹은 육적인 죽음을 가리킬 것이다. 성경은 성도에게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고 교훈한다. 여호수아 1:6, 7, 9,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성도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도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고 산다.
성도가 세상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기 때문이다. ‘지팡이’(쉐베트)는 사나운 짐승들을 물리치는 무기이며, ‘막대기’(미쉬안 ן는 양들을 인도하는 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신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물과 불 가운데서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셨다(사 43:2). 또 그는 그의 품안에 거하는 자들을 무서운 질병과 재앙에서 건지시겠다고 말씀하셨다(시 91:1-10). 이 세상이 악하고 험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고 인도하신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에 ‘상’은 밥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의 일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먹는 즐거움도 주실 것이다. 그것도, 그의 원수 앞에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이 실패하고 망하기를 바랐겠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에게 기쁜 일을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다윗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의 원수들 앞에서 증거하실 것이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다고 말한다. ‘기름을 바른다’는 원어(디쉔)는 ‘기름을 바르다, 기름지게 만들다, 기쁘게 받다’는 뜻이 있다. 옛날에 잔치 자리에서 주인은 귀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었다고 한다.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림을 받았던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할 때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었다(요 12:3). 잔치에 초청을 받아 참여한 손님들은 기름의 좋은 향기로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귀한 손님처럼 대우하셨다. 얼마나 큰 은혜이었는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실 것이다.
또 다윗은 자신의 잔이 넘친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상은 풍성한 식탁이었다. 음식도, 포도즙도 풍성했다. 부유한 주인이 손님들에게 기쁨의 포도즙을 잔에 넘치게 부어주듯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를 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종 다윗을 은혜로 택하셨고 구원하셨고 인도하신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1:9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그를 따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과거에 우리와 함께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또 남은 날들도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28:20). 성령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보혜사이시다(요 14:16).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5, 38-39).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그가 성전 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대답인 동시에 영원한 천국의 소망과 확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 천국 중심으로 살 것이다. 그는 주의 재림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를 더 힘쓸 것이며(행 2:42; 히 10:25), 장차 영광의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의 삶을 누릴 것이다(계 22:5).
시편 23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자는 영육의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지혜롭고 능력이 많으시고 선하신 목자이시다. 그는 자기의 양들을 지키시고 영육의 좋은 것으로 공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진실히 믿고 섬기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로 의의 길을 가게 하신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또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의롭고 선한 삶을 힘써야 한다.
셋째로,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지만, 우리는 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과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깨닫고 감사하자.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의 평생에 함께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기를 소원하자. 우리는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고 영원한 영광의 천국만 사모하며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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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편
〔다윗의 시〕
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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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편 강해: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
[1-2절]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건설하셨음이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다. 이 광대한 지구와 거기에 가득한 것들과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산들과 골짜기들, 나무들과 풀들, 꽃들, 새들, 짐승들, 곤충들, 벌레들, 땅 속의 금은보석의 광물들, 바다들과 강들과 물고기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여러 피부색들과 여러 언어들과 다양한 풍습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 곧 우주만물과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참된 주인이시요 소유자이시다. 우주는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성경은 이런 진리를 여러 곳에서 밝히 증거한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신명기 10: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욥기 41:11,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역대상 29:11,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시편 50:12,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소유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의 터를 바다 위에 세우셨고 강들[혹은 물들] 위에 건설하셨기 때문이다. 즉 천지만물과 모든 생물과 사람을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들의 주인이신 것이다. 시편 89:11도,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 즉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천지만물의 소유자이신 것이다.
[3-4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여호와의 산’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 성막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곧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와 교제할 수 있는가?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또한 도덕적인 하나님이시므로 경건하고 도덕적인 자만 하나님을 섬기며 그와 교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치에도 맞고 성경적이다.
첫째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손이 깨끗해야 한다. 손은 사람이 일을 하는 주된 도구이다. 손은 사람의 행동을 나타낸다. 사람의 손은 나쁜 일도 할 수 있고 좋은 일도 할 수 있다. 악한 자는 손으로 살인, 간음, 도적질 등을 행한다. 그러나 선한 자는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며(딤전 2:8) 그 손으로 의와 선을 행한다. 사람은 손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섬기며 교제할 수 있다.
둘째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 첫 사람이 범죄한 이후, 모든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되어 있다(렘 17:9).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비방 등이 나온다(마 15:19). 그러나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그 마음이 깨끗케 된다(행 15:9). 이렇게 마음이 깨끗케 된 자만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마 5:8). 사람은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섬기며 교제할 수 있다.
셋째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아야 한다. 허탄한 것은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 죄악된 것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물질적인 것을 썩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재물은 허무하게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잠언 23: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을 이런 것에 두지 말고 믿음의 일(요 6:29), 주의 일(고전 15:58), 선한 일(딤전 6:17 -18)에 두어야 하나님을 섬기며 교제할 수 있다.
넷째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아야 한다. 사울 왕은 맹세하고(삼상 14:39; 19:6) 그가 한 맹세를 쉽게 저버렸다. 그러나 사사 입다(삿 11:30-39)와 사무엘의 모친 한나(삼상 1:10-11, 24-28)는 그들이 맹세한 바를 그대로 지켰다. 사람은 거짓 맹세하지 않아야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요 그와 교제할 만한 자이다.
[5-6절]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본문의 ‘저’는 앞절에 말한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치 않는 자를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자이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사람이 참으로 회개할 수 있다. 베드로의 증거대로, 이방인 고넬료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기 때문이었다(행 11:18).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며 그의 구원의 하나님께 의(義)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중의 복은 구원의 복이며 그 구원의 내용은 의(義)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했다(롬 3:23-24). 또 그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했다. 사람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가장 귀한 복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부패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만세 전 선택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자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님을 믿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의를 받는다. 우리가 바로 그들이다.
[7-10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들지어다](원문, KJV, NASB).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본문에 5번이나 반복하여 언급된 ‘영광의 왕’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신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마귀와 모든 악령들을 물리치시는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영광의 왕’은 특히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가리킨다. 메시아께서는 시편 22편에 고난의 종으로, 시편 23편에 선한 목자로, 본 시편에 영광의 왕으로 증거되셨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장사한 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셨고(행 2:36) 영광 가운데 승천하셨다.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이제 다윗은 “영원한 문들아, 네 머리를 들라”고 외친다. ‘영원한 문’은 ‘옛부터 있는 문’(NASB, NIV)이라고도 번역된다. 그것은 천국문을 가리킬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오셨다가 부활 승천하심으로 천국에 들어가실 때 천국문은 그를 위해 활짝 열려야 할 것이다. ‘옛부터 있는 문’은 인류 초기부터 있는 교회(계 13:8)의 문을 가리킬 수도 있다. 지상의 교회들, 곧 주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영접해야 하며 또 그가 장차 만왕의 왕과 이 세상의 심판주로 세상에 재림하실 때에도 그러해야 한다.
“너희 머리를 들라”는 말씀은 영광의 왕을 즐거이 환영하라는 뜻이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승천하시는 메시아를 환영해야 한다. 또 지상에 있는 교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도 마음문을 활짝 열고 영광의 왕이신 주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영접해야 할 것이다.
시편 24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과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참 소유자이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순종하자.
둘째로,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 즉 회개하고 죄씻음 받은 자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교회의 참 회원이 될 수 있고 장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셋째로,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구원의 복, 곧 의를 얻게 된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복과 같다.
넷째로, 이제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은 주님의 천국 입성을 환영했을 것이다. 이제 땅에 있는 교회들도 그러해야 하며, 또 장차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대망해야 하고,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해야 한다.
묵상
시편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길 바란다. 그만큼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믿음의 고백과 더불어 예수님의 고난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도 절실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던 때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나의 고통을 호소하는 기도를 하곤 한다. 기도 중에도 다윗은 22편부터 24편으로 점점 더 그 마음이 성령 충만하여져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어떠한가? 잘 생각해 보고 더욱 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의로우심에 감사드리며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이렇게 다윗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 것을 본 받아 주님께서 영광의 왕이 되심을 감격하며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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