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편: 악인에 대한 심판을 호소함
[1-2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窘迫)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시편 저자는 지금 큰 환난 가운데 있다. 그는 자신을 ‘가련한 자’라고 표현하며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핍박한다고 말한다. ‘가난한’ 혹은 ‘가련한’이라는 원어들(아니 혹은 아나우 )은 ‘가난한, 겸손한, 고난 당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동의어로 성도를 묘사하는 말로 쓰인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악하고 교만하지만, 성도는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때때로 고난과 핍박을 당한다.
시편 저자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지 않으시고 멀리 서 계시다고 느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깊으시고 높으신 뜻 가운데 성도를 환난에 버려두신다(시 13:1; 35:22; 38:21). 그가 환난 때에 우리의 산성이시요 피난처시며 큰 도움이시지만(시 9:9; 46:1), 성도는 때때로 그의 즉각적 도우심을 경험치 못한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악인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호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으실 것이다. 그 어렵고 답답한 시간은 그에게 결코 손해가 아니고 영적인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 시간은 그의 믿음을 더 순수하고 강하게 만들 것이다.
[3-4절]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다시 번역하면, “이는 악인이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탐욕자들을 축복함이니이다. 악인은 그 얼굴의 교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나이다”(KJV). 이 본문은 악인으로 그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 이유를 나타낸다. 악인은 세상적 욕심을 자랑한다. 성경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다(요일 2:16). 또한 악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탐욕자들, 즉 불의의 이익을 취하는 자들을 축복한다. 악인은 세상을 사랑하고 또 세상에 속한 자들을 사랑한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그의 삶의 목표요 가치 기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유일한 주인으로 선택하였다. 성도는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갈 5:24). 아직도 돈을 사랑하는 자는 헛된 신앙의 집을 짓는 자이다.
악인은 또한 교만하며 무신론적이다.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의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면 모든 악을 회개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악을 떠날 수 있다(잠 16:6). 교만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는 악을 버리지 못하며 돈 사랑과 육신의 쾌락 사랑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5-7절]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악인의 길은 때때로 견고해 보인다. 악인이 장수하고 세력이 강하고 건강하고 형통하기도 한다(욥 21:7-13; 시 73:3-12; 렘 12:1).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은 높아서 악인의 눈에 미치지 못한다. 악인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또 모든 대적자를 멸시하고 자신의 평안과 형통을 확신하며 자신의 실패나 고난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패기와 용기같이 보이지만, 실상 헛된 자만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자신의 미래를 자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일 뿐이다.
또 악인의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다. ‘죄악’이라는 원어(아웬)는 ‘허탄함’(KJV)이나 ‘사악함’(NASB)이라는 뜻이다. 말은 인격을 나타낸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하지만,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한다(마 12:34-35). 악인은 남을 저주하고 속이고 포학하고 해치고 헛되고 사악한 말을 한다.
[8-11절]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그의 강한 것들]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시편에서 성도는 ‘무죄한 자’ ‘외로운 자’ ‘가련한 자’ ‘가난한 자’ 등으로 묘사된다. 악인은 이런 성도를 해치려 한다. 악인은 한적한 곳에 앉으며 은밀한 곳에서 성도를 엿본다. 그는 사자가 그 굴에 엎드림같이 은밀한 곳에 엎드린다. 악인이 공공연히 악을 행하지 못하고 은밀히 하는 것은 양심 때문일 것이다. 악인은 또 의인을 향해 강포하다. ‘그 강포’라는 원어(아추마우)[그의 강한 것들]는 ‘그의 강한 수족(手足)’을 가리킨 것 같다. 악인은 폭력적이다. 세상에서 의인들은 핍박과 고난을 당한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악인은 또 무신론적이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사고 때문에 악을 담대히 행한다. 시편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하였다.
[12-15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악인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께서 감찰치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실상 그는 무신론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잔해와 원한을 다 보셨고 감찰하셨다. ‘원한’이라는 원어(카아스)는 ‘괴롭힘, 분노’ 등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무시한다고 무시를 당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오히려 모든 일을 다 감찰하시고 판단하시며 그 손으로 악인의 악행에 대해 갚으신다.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근본 진리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징벌하심으로 성도를 도우시고 돌보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자(신 10:18)이시며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시 68:5)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많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지만 이 세상에서 악한 자 때문에 핍박을 당하여 외롭고 가련하기까지 한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그러므로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기도는 믿음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고 손을 드시고 가난한 자를 잊지 마시고 악인에게 합당한 징벌을 내리시기를 구하였다.
[16-18절]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왕, 곧 세상의 영원한 통치자이시며 심판자이시다. 그는 성도의 호소를 들으신다. 17절의 ‘겸손한 자’라는 원어(아나임)는 ‘가난한 자, 핍박당하는 자’라는 뜻으로 성도 자신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핍박당하는 성도의 간구를 들으신다. 또 그는 성도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그는 성도가 악을 버리고 의와 선에 굳게 서도록 준비시키신다. 그는 특히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자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 하나님을 모르고 부도덕한 이방인들은 그의 땅 곧 이 세상으로부터 멸망을 당할 것이다(16절). 악인은 새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성밖에 있을 것이다(계 21:27; 22:15).
시편 10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상은 악하며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한다. 세상 사람들은 교만하여 순진한 자들을 핍박한다. 그들은 이익을 탐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며 부정한다.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학이 가득하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그들은 가련한 자(2, 9절), 외로운 자(9, 10, 14절), 가난한 자(12절), 겸손한 자(17절)라고 표현된다. 악한 세상의 사람들은 성도를 미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시며 통치자시요 심판자이시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온 세상을 홀로 통치하신다. 16절,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보시고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고 선악간에 공의로 보응하신다.
셋째로, 성도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아뢰어야 한다. 시편에는 성도가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내용, 특히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과 보응을 호소하는 내용이 많다. 12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14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한다.
11편: 하나님께서 인생을 감찰하심
[1-2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이는]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함이로다].
다윗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도망하라고 권면하였다.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표현은 새가 사냥꾼을 피하여 산 속으로 날아 숨듯이 도망하라는 말이다. ‘네 산’은 ‘네가 피신할 곳’이라는 말로서 피신할 인간적, 세상적 방책을 의미한다.
2절은 원문에 ‘이는[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믿음 없는 친구들이 그에게 도망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이며 그를 쏘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도는 ‘마음이 바른 자’로 표현된다. 그는 이성과 양심을 따라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되게, 악인은 그런 성도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한다. ‘어두운 데서 쏜다’는 말은 은밀히 해치려 한다는 뜻이다. 악인들은 솔직하거나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거짓되며 이중적이다.
다윗은 환난 중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피난처이셨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 믿음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당황하거나 두려워 떨거나 낙심하는 것은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참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피하며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시편 46편 저자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말했다(시 46:1).
[3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터’(foundations)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교리들과 생활 교훈들 곧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초이다. 실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터이시다(고전 3:11). 우리는 기독교의 기본적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온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히 6:1-2).
건물은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그 건물은 언젠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이 부정되거나 무시된다면, 거기에 어떤 기독교적 삶이 가능하겠는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이 부정된다면, 거기에 참된 기독교는 없을 것이며 기독교인의 믿음과 소망은 헛될 것이다. 거기에는 신앙의 정조와 절개를 지키는 보수신앙과 의롭고 선하게 사는 도덕적 삶이 무의미하며 무가치할 것이다.
때때로 세상이 악화되어 사상적, 윤리적 기본이 흔들리는 시대가 있고 심지어 오늘날처럼 교회조차도 배교적이고 부도덕하게 되는 때가 있다. 세상은 심히 불경건하고 음란하고 쾌락적이며 자유주의적 교회들은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부정하고 왜곡시키며 심지어 낙태와 동성애 등의 윤리적 악들을 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터는 견고하다.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시편 102:27,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말라기 3: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히브리서 13:8-9,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디모데후서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4절]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므로, 성도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기초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에 계신다. 그는 무한하시고 온 우주에 충만하시지만 특히 천국에 계시며, 또 옛시대에 성막과 성전에서 구름으로 그의 영광 곧 그가 사람들과 함께하심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는 오늘날에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계신다(고전 3:16).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특히 그 영광의 보좌를 하늘 즉 천국에 두셨다. 그의 보좌는 통치하시는 왕의 보좌이며 심판하시는 재판장의 보좌이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심히 거룩하고 위엄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에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의인들과 악인들을 감찰하시고 그들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그들의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살피신다. 하나님의 눈은 매우 밝으시다. 하나님의 시력은 완전하시다. 그의 시력은 약해지거나 쇠하여지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의 삶을 감찰하신다. ‘안목’이라는 원어(아프아프)는 ‘눈꺼풀’ 즉 ‘눈’이라는 뜻이며 ‘감찰한다’는 원어(바칸)는 ‘시험한다, 증명한다’는 뜻이다.
그는 사람의 행위뿐 아니라 생각과 감정과 뜻까지도 다 아시고 그의 선함과 진실함을 시험하시고 판단하신다. 시편 139:1-4, 2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5절]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감찰하시고 시험하시며 그들이 과연 진실한 신앙고백자인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지하는지, 혹시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인 자가 아닌지 시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신다. 그는 겸손하고 사랑하는 의인을 인정하시지만, 교만하고 강포한 악인을 미워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도덕적 판단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분명하시고 정확하시다. 세상 사람들은 악인들을 칭찬하고 그들을 친근히 할지 몰라도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항상 명확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악인들을 미워하신다.
[6절]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그물을 내려치신다. 그것은 악인들이 받을 징벌이다. 아무리 약삭빠른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내려치시는 그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그 징벌은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으로 묘사된다. 그것들이 악인들의 소득이다. 불과 유황은 맹렬한 불의 형벌을 가리킨다. 유황은 성냥이나 화약의 원료로 불이 아주 잘 타는 물질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셨고(창 19:24) 또 최종적 지옥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으로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계 21:8). 태우는 바람은 환난과 재앙의 바람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내리실 형벌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증거되고 의인들의 억울한 고난이 보상되며 마침내 세상의 도덕 질서가 확립될 것이다.
[7절] [이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좋아하심이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그의 얼굴은 정직한 자를 보시리로다](MT, KJV).7)
본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의 이유, 즉 의인을 시험하여 인정하시고 악인의 악을 판단하시고 징벌하시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의(義)는 도덕적 표준에 일치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 실상, 그 자신이 도덕적 표준이시다. 또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일을 좋아하신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고 악한 일을 미워하시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께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다. 또 그의 얼굴은 정직한 자들을 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악행을 미워하시지만, 의인들의 선한 행위들을 좋아하시고 그들에게 더 풍성한 은혜와 평강과 능력을 내리실 것이다.
시편 11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로 피하자. 이 세상은 환난이 많고 믿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로 피한다. 그것은 믿음의 당연한 표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기도할 것이다. 시편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오늘날 기본이 흔들리는 세상과 교회의 현실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과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역사적 기독교, 성경에 계시된 모든 진리를 믿고 보수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 항상 피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온 세상을 감찰하고 계신다. 그는 눈은 밝고 완전하시다. 그의 시력은 세월이 흐른다고 쇠해지지 않으신다. 그는 의인들과 악인들을 아시고 감찰하시고 판단하신다. 그는 공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는 의인들과 악인들에게 그들의 행한 대로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의로운 삶을 살자.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미워하시고 그들의 악한 행위들에 대해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으로 징벌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의인들의 삶을 인정하시고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좋은 것으로 복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 속에 남은 모든 악한 것들을 다 버리고 오직 의로운 삶을 살자.
12편: 거짓된 세상에서 지키심
[1-2절]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한다. 성도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행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성도는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할 수 있고 그의 응답함을 체험한다.
다윗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까닭은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충성된, 신실한, 믿을 만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원문에는 1절 하반절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경건하고 충성된 자가 하나씩, 둘씩 없어져 가는 현실은 슬프고 안타깝고 또 이런 구약교회의 영적, 도덕적 현실은 매우 절망적이게 보인다.
사람들은 서로 거짓말을 하며 아첨의 말을 하고 두 마음으로 말한다. 그들은 자기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면 거짓말을 하고 남의 비위를 맞추며 속과 겉이 다른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를 매우 미워하신다(잠 6:19). 또 아첨의 말은 사람을 멸망시킨다(잠 26:2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25).
이런 현실에서 성도가 어떻게 신앙과 경건, 정직과 충성을 논할 수 있겠으며, 이런 현실에서 그가 어떻게 신앙과 정직을 지키며 또 고난과 외로움을 각오함이 없이 진리를 전파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때 성도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3-4절]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사람의 거짓과 교만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은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자기보다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아첨하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자기를 자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실 것이다. 그는 사람이 거짓된 아첨의 말이나 자랑의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그는 철저한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이다. 그는 사람의 말 한마디까지도 공의로 갚으실 것이다.
[5절]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성도는 세상에서 악인들에게 눌림을 당하고 탄식하므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 가련하고 고통을 당하는 자로 표현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정한 때에 일어나셔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성도를 구원하실 것이다.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는 구절에서 ‘그 원하는’이라는 원문(야피아크 로)은 ‘그를 비방하는 자로부터 건져’(NIV)라는 의미이든지, 혹은 ‘그가 원하는’이라는 뜻이라고 본다(NASB). 안전지대는 더 이상 원수의 비방과 핍박이 없고 싸움과 위협도 없고 오직 평안함만 있는 곳을 가리킨다.
[6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악인들의 말은 악하고 거짓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순결한 은같이 오류나 거짓이 없다. 사람의 말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고 거짓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확실하며 정직하고 순결하여 전적으로 믿고 신뢰할 만하다(시 19:7-8).
[7절]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세대에서 성도를 지키시고 보존하실 것이다. 5절에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지켜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경건한 롯을 심히 음란한 소돔 성으로부터 구원하셨다(창 19:16-17, 29; 벧후 2:7-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8절]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이 세상이나 부패한 교회에서, 악인들은 곳곳에서 활보하고 있고 비루함 즉 대단히 나쁘고 야비하고 부도덕한 일, 저질스럽고 무가치한 일이 사람들 중에 커지고 많아지고 있다.
시편 12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은 물론이며 교회도 때때로 심히 부패함을 알자.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사회는 그러하였고 신약교회의 역사도 그런 점들이 보인다. 교회가 부패할 때 경건하고 충성된 자를 찾아보기 어렵고 거짓과 아첨이 유행하고 참된 성도들은 눌림과 궁핍 때문에 탄식한다. 세상은 의례 그렇고 그러므로 회개해야 구원을 받지만, 교회도 때때로 그러한 것이다(딤후 3:1-5).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고난 가운데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키심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거짓말로 비방을 받는 참된 성도들을 돌아보시고 도우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지키시고 건지셔서 다시는 고난이 없는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함을 알자. 6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은 완전하고 확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하다(시 19:7-8).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 거짓과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다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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