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편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13편 강해: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림
[1-2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다윗은 원수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마음에 근심하고 그의 원수는 그를 대항하여 자긍하며 의기양양해 하였다. ‘종일토록’이라는 원어(요맘)는 ‘날마다’(KJV, NIV) 혹은 ‘계속’(BDB)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의 마음의 근심과 고통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고 점점 커져갔다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잊으신 것 같고 그 얼굴을 숨기신 것 같았다. 그는 다윗을 돕지도 않으셨고 그를 핍박하는 악인을 징벌하지도 않으셨고 다윗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도 주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원문에 보면 다윗은 1절에서 2번, 2절에서 2번 아드 아나라고 부르짖는다. 우리 말 성경은 3번은 ‘어느 때까지’라고 번역했고 1번은 ‘언제까지’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고 그의 마음의 고통도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높으신 뜻, 깊으신 뜻,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뜻, 완전하신 뜻 가운데 어느 기간 동안 다윗을 그렇게 버려두셨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여호와여’ 하며 부르짖었다. 우리에게는 부르짖으며 기도할 하나님께서 계시다. 우리는 고아가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그는 그의 정하신 때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3-4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고난 중에 다윗은 하나님께 두 가지를 기도하였다. 첫째로, 그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생각한다’는 원어(나바트)는 ‘본다, 주목한다, 중시한다(regard)’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시고 중시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큰 행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소돔에서 건지셨다(창 19:29). 또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생각하셔서 요셉을 잉태케 하셨고(창 30:22), 한나를 생각하셔서 사무엘을 잉태케 하셨다(삼상 1:19).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의 해결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 안에 있다.
둘째로, 다윗은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하였다. ‘눈을 밝힌다’는 것은 낙망하기 쉬운 고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며 또 자신이 처신할 바를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판단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부족이 있으면 철저히 반성하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고난의 현실 속에서 사람이 눈이 어두우면 바른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믿음 없이 행하고 말과 행위에 실수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이 밝아야 한다.
또 다윗은 자신이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는 목적을 표현하였다. 그는 사망의 잠을 자지 않기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낙심은 사람을 불신앙에 떨어지게 하고 불신앙의 결과는 영적 죽음이다. 불신앙은 영적으로 잠자는 것과 같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잠이다. 또 그는 그의 원수가 그를 이기었다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기뻐하지 않게 하기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성도가 의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거나 손이 피곤해지면 대적자들이 기뻐할 것밖에 없을 것이다.
[5-6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다윗은 고난의 현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했다.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인 사람이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특히 고난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면 우리의 모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고 그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 그의 긍휼과 인자의 품에 안겨야 할 것이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그를 후대하심을 확신하고 있다. 지금은 원수들이 그를 핍박하고 대적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고 그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을 확신한다. 시편 34:8에서 그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다. 로마서 8:32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실의 고난 중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다윗은 또 이런 확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후대하심은 그의 기쁨의 이유이며 찬송의 이유이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기쁨과 찬송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4에서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교훈하였다. 또 그는 히브리서 13:15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교훈하였다.
시편 13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도 때때로 고난의 시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도에게 주시는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를 여러 가지 고통 가운데 버려두시지만, 그러나 어떤 고난이든지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고(고후 1:8-9), 교만하지 않고 겸손케 하고(고후 12:7), 또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게 한다(시 119:71).
둘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운 문제를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다윗처럼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하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부족을 깨닫기를 원한다. 또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포기하거나 낙망하거나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 그 모든 일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준다. 우리는 그것을 알기를 원한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 중에서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자.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온전한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의지하며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주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14). 또 히브리서 4:16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의지하자.
제 14 편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14편 강해: 어리석고 부패된 인생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주장하시는 자이시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를 부정하는 것이 큰 무지요 어리석음이듯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큰 무지요 어리석음이다.
또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는 그 행위가 부패하게 되어 있다.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한다. 사람들은 다 죄인이며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두려워함이 없이는 악을 떠나지 못한다. 잠언 16: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贖)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자는 범죄하기 쉽고 범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참된 도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세상에도 비교적 선한 사람들이 있으나 그들의 선행은 결함이 있는 선행이다. 그것은 환경에 따라 변하며 흔히 자기 자랑을 동반하고 위선적이다.
[2-3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람들을 보시니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고 다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신 것이니 확실한 사실이다. 세상의 종교들은 우상숭배적이고 고행과 금욕을 가르치나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의와 선을 행하게 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새 생명의 구원을 얻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길 수 없고 우상숭배와 죄를 떠날 수 없고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없다.
[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죄악을 행하는 자, 곧 내 백성을 떡 먹듯이 먹으며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 자는 다 무지하뇨?”(KJV, NASB, NIV)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참된 경건이 없고 사람을 사랑함이 없다.
[5절]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거기서’라는 말은 악인들이 악을 행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악인이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악을 행하는 곳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함께 계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이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심을 보고 다윗을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증거한다(삼상 18:12, 28-29).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순종하는 의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을 도우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도 때때로 그 사실을 보고 알게 된다.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악인은 가난한 자 즉 고난 당하는 성도의 계획을 부끄럽게 한다. 즉 그는 그 계획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려 한다. 그것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그것은 세상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복이다.
[7절]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 즉 예루살렘에서 나오기를 소원했다. 이것은 경건한 자들의 소원인 동시에 예언적 간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온에 보내주셨다. 다윗의 예언적 간구는 성취되었다. 동일한 예언이 이사야 2:2 이하에도 나온다. 이사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여호와의 전의 산’은 시온산 즉 예루살렘 성이다. 주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회개와 죄사함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고(눅 24:47), 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것이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원수들의 핍박 아래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을 뜻하며 또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뜻도 있다. 또 영적으로 죄와 사탄과 사망에 포로된 인생들이 구원받을 것을 의미하는 뜻도 있다고 본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마 1:21). 우리는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이다. 실상, 죄와 사탄과 사망으로부터의 구원보다 더 큰 복이 무엇이며 더 기쁘고 즐거운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고(눅 10:20),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 .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교훈하였다(살전 5:16-18).
시편 14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무신론은 어리석은 사상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며 그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고 계신 세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다. 세계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하신 바를 이루시는 역사이다.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신론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무신론자는 부도덕하다. 어리석은 무신론자들은 그 행위가 부패하고 가증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도덕의 근거가 되신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를 멀리하고 의와 선을 행하게 된다. 무신론에서는 도덕의 근거가 없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인간이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은 많은 악을 행하였고 또 행하고 있으며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해왔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는 자가 의와 선을 행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의인들과 함께 계신다. 성도는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난처가 되신다. 세상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새 세계를 만드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다. 이 하나님의 구원은 시온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회개와 구원의 운동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장될 것이며(눅 24:47; 행 1:8), 오늘날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의지하며 그의 뜻대로 의롭게만 살아야 한다.
제 15 편
〔다윗의 시〕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15편: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
[1-2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주의 장막’과 ‘주의 성산’은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한 자들에 대해 본문은 열 한 가지의 자격을 말한다.
첫째로, 정직하게 사는 자이다. ‘정직하게’라는 원어(타밈)는 ‘완전하게’라는 뜻이다. 창세기 6:9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말하였고, 욥기 1:1은, “[욥은] 순전하고[완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말하였다. 완전함이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살며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성화(聖化)의 목표는 도덕적 완전함이다.
둘째로, 의를 행하는 자이다. 의는 기준에 맞는 것을 말한다. 도덕적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과 뜻을 반영한다. 양심도 하나님의 도덕성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의로운 삶이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대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주관과 편견과 이익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객관적 원칙 즉 그의 계명과 성경 교훈대로 살아야 한다.
셋째로, 그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진실은 사실 그대로를 가리킨다.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행동 원리이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쟁이들의 아비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계 22:15). 성도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든지 해가 되든지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3절]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넷째는, 그 혀로 참소하지 않는 자이다. ‘참소한다’(라갈)는 원어는 ‘돌아다니며 거짓말로 남을 비방한다, 중상(中傷)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이웃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출애굽기 23:1은,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말했다. 느헤미야의 원수들은 그가 유다 사람들과 함께 모반하려 한다는 거짓말로 그를 비방하였었다(느 6:6).
다섯째는, 그 벗에게 악을 행치 않는 자이다. 악이란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가리킨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죽인 일이나(창 4:8)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종으로 판 것이나(창 37장)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개에 팔아 넘긴 것은 다 악한 일이다. 살인, 폭력, 간음, 강간, 도적질, 인신 매매, 사기, 거짓된 비방, 명예 훼손 등은 다 천국에 합당치 않은 악한 일들이다.
여섯째는, 그 이웃을 훼방치 않는 자이다. 훼방은 남의 흠을 들어 그를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이웃에 대한 말은 정당한 것이라도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꼭 필요한 경우란, 교회의 유익을 위해 공적으로 증언하는 것이나 재판 석상에서 증언하는 것이나 남의 거짓된 비난에 대해 해명하는 것 등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후메내오와 빌레도, 부겔로와 허모게네, 구리장색 알렉산더 등을 언급했고(딤전 1:20; 딤후 1:15; 2:17; 4:14),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를 언급했다(요삼 9). 그러나 우리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는 주의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4절]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일곱째는, 그의 눈에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이다. ‘망령된’이라는 원어(니브제 는 ‘야비한, 비열한’이라는 뜻이다. 그는 비열한 자를 칭찬하거나 높이지 않고 멸시한다. 잠언 17:15는,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28:4는,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고 했다.
여덟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도덕성의 근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요(잠 8:13),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 첫 번째 요소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누렸던 악한 아합 왕보다, 비록 가난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한 선지자 엘리야가 확실히 더 존귀하고 가치 있는 자이다.
아홉째는, 자기가 한 맹세가 비록 자신에게 해가 되어도 지키는 자이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맹세를 지킬 것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사사 입다의 귀한 점은 그가 자기에게 해로운 서원을 이행한 것이었다. 그는 서원한 대로 그의 사랑하는 무남독녀(無男獨女)인 딸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다(삿 11장).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열째는, 이자를 위해 돈을 빌려주지 않는 자이다. ‘변리’라는 원어(네쉐크)는 ‘이자 혹은 고리대금(usury)’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사회에서 인정된 대금업 혹은 은행업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지만(마 25:27; 눅 19:23), 성도간에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나 특히 고리대금(高利貸金)을 금한다(출 22:25; 레 25:35-37).
열한째는,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롭게 하지 않는 자이다. 성도는 불의의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장로나 집사의 자격으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것’을 꼽았다(딤전 3:3, 8; 딛 1:7). 우리는 돈을 정당하게 벌어야 한다.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더욱이,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롭게 하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다.
시편 15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천국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한 자들의 자격은 도덕적 완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실제로도 도덕적으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마 5:20, 48; 7:21; 살전 4:3; 딤후 3:17). 빌립보서 4:8, “무엇에든지 참되며 . . .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도덕적 완전은 우리의 행위의 문제, 곧 윤리의 문제이다.
도덕적 완전은 의와 진실과 선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천국에 합당한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롭게 살고 진실을 말하며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들은 이웃을 거짓말로 비방하지 않고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고 남의 흠을 들어 비난하지 않고, 또 비열한 말을 하는 자들을 멸시한다. 또 천국에 합당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경하고 하나님 앞에서 한 서원은 자기에게 해가 될지라도 갚는다. 또 천국에 합당한 자들은 불의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자를 위해 돈을 빌려주지 않고 또 뇌물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실제로도 도덕적 완전을 위해 힘써야 한다. 선한 행실이 없는 믿음은 큰 환난과 시험이 올 때 넘어지기 쉽지만, 선한 행실이 있는 믿음은 크게 요동치 않고 견고히 설 수 있다(마 7:24-27; 벧후 1:10-11).
묵상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윗이 얼마나 성령충만함을 받았는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드렸고 또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했다.
나는 어떠한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믿고 따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선포하고 사는가?
다윗이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할 것들을 살펴보니 나에게는 정직함이 없다.
슬쩍 이유나 핑계를 대고 그 상황을 빠져나가곤 한다. 그것이 선의의 거짓이라 하여도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니만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이제 다시는 그 죄를 번복하지 말자.
그리고 망령된 자를 잘못되었다고 직언하는 것도 나에게 필요하다.
다윗도 죄를 지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오늘 시편에서 보여준 믿음의 내용을 보아 그는 회개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감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믿는 자들의 올바른 삶의 정의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도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드리며 응답하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성경큐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19편-21편 (0) | 2021.11.04 |
---|---|
시편 16편-18편 (0) | 2021.10.31 |
시편 10편-12편 (0) | 2021.10.27 |
시편 7편-9편 (0) | 2021.10.24 |
시편 4편-6편 (0) | 2021.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