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큐티

욥기 31장-33장

헤븐드림 2021. 9. 15. 04:14

31장: 욥--나는 의롭게 살았다

 

[1-4절]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욥은 처녀에게 주목치 않았다. 마음으로라도 범죄치 않기 위해서이었다. 그는 불의와 악을 행하는 자에게 재앙이 임할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길을 감찰하시고 그의 걸음을 다 세신다. 그는 그의 품은 마음과 생각과 뜻을 다 아신다. 그는 그것이 깨끗하고 선한지 아니면 불결하고 악한지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5-6절]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거짓]에 빨랐던가.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순전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세상 사람들은 악하고 헛된 것을 구하고 그 발걸음이 거짓에 빠르지만, 욥은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자신의 정직함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순종한 자만 가질 수 있는 담대함이다. 성도의 담대함은 진실한 순종의 삶에서 나온다.

[7-8절]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그리하였으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니라.

‘길’은 정로(正路) 즉 의의 길을 가리킨다. 욥은 인생의 정로를 지켰고 그 길을 떠나지 않았다. 또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에 빠져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 욥은, 자신이 정로에서 떠났든지, 그의 마음이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헛되고 죄악된 것에 빠졌든지, 그의 손에 더럽고 죄악된 것이 묻었다면, 그의 심은 것들을 다른 사람이 먹고 그의 거두는 것들이 뿌리까지 뽑힐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과 징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욥은, 비록 그가 고난 중에 있지만 하나님의 계명의 정로를 떠나지 않았고 헛되고 죄악된 것을 좇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9-12절]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중죄(重罪)라.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

욥은 간음을 큰 죄로 여기며 조심하였다.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리는 것은 이미 마음이 부패되어 은밀한 접촉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성도는 그런 은밀한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성도가 음란죄에 떨어지면 고통스러운 결과를 경험할 것이다. 그는 경제적 파탄을 당하고 그의 처는 남의 종이 되어 남의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거나 다른 남자가 그와 동침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간음죄는 중죄(重罪)이다.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간부와 음부가 다 죽임을 당해야 했다(레 20:10). 모든 죄, 특히 간음의 죄는 불과 같다. 불이 나무나 집이나 물건들을 모두 다 사르듯이, 죄, 특히 간음죄는 복된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없앤다. 죄는 불행과 재앙을 가져온다.

[13-14절]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욥은 종의 사정을 멸시하지 않았다. 종이 무엇을 잘못했을 때 꾸짖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종이 무엇을 불평하거나 호소할 때 그것을 듣는 것은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종을 멸시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러 일어나 심문하실 때 하나님께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멸시하는 잘못도 범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을 멸시할 만큼 그렇게 완전한 인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그 앞에 머리를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남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15절]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욥이나 종은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다(잠 22:2). 한 부모의 자녀들이 서로 우애 있게 지내야 하듯이, 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류는 넓은 의미에서 한 형제들로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막론하고 다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알고 서로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16-23절]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욥은 가난한 자나 과부나 고아를 무시하지 않았고 그들이 어려울 때 그들을 돌아보았고 도왔다. 그는 그들이 먹을것이 없을 때에 먹을것을 주었고 입을 것이 없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재앙을 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신 10:18; 시 68:5).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성도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사도들도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을 힘썼다.

[24-28절]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욥은 재물을 의지하거나 소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물질적 부요는 신앙생활에 오히려 방해거리가 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마 19:23-24).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9-10에서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다.

욥은 해와 달을 섬기지도 않았다. 해와 달을 보고 ‘손에 입맞추는 것’은 그것을 숭배하는 종교적 태도를 나타낸다. 그는 돈에 대한 애착을 해와 달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연관해 말했다. 해와 달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이듯이, 돈 사랑도 우상숭배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그 어떤 우상도 섬기지 말아야 한다.

[29-30절]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욥은 그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고 그가 재앙 당함을 인해 뽐내지 않았다. 그는 원수의 영혼을 저주하는 죄를 범치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착한 성도이었다. 레위기 19:18에서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잠언 17:5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눅 6:27-28), 사도 바울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교훈하였다(롬 12:20).

[31-32절]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욥의 종들은 주인의 고기로 배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또 그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않고 그의 집 문을 열어주었다고 증거하였다. 경건은 구제와 선행으로 표현된다. 아브라함도 평소에 나그네를 잘 대접하였고, 롯도 그러하였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하고(롬 12:13) 특히 어려움 당한 이웃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33-37절]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아담 ם������אָ)[아담](KJV, NASB)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욥은 자기 자신이 사람들의 멸시를 두려워하여 자기 죄악과 허물을 아담처럼 숨기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담대히 말하며 자기를 송사하는 대적자들과 변론하기를 원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를 원한다. 의인의 마음은 담대하다(잠 28:1).

[38-40절]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밀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욥은 자신의 토지에 대해서나 그 소산에 대해 불법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의 토지가 부르짖어 그를 책망하거나 그의 밭이랑들이 함께 우는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정당하게 땅을 샀고 또 그 땅에 농작물을 경작하였다. 그는 그 경작을 누구에게 맡겼다면 그에게 정당한 수고의 대가를 지불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거나 그가 부당하게 남의 토지를 빼앗으므로 그로 생명을 잃게 했다면, 그는 자기 밭에서 밀 대신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도적질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우리 손으로 수고하여 구제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엡 4:28).

욥기 31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간음을 조심해야 한다. 욥은 처녀를 주목하거나 이웃의 아내에 대해 불결한 마음을 품지 않았고, 이성에 대해 늘 깨끗한 마음과 단정한 태도로 대했다고 말했다. 간음은 큰 죄악이다. 우리가 이런 죄에 떨어지면, 하나님께 복 받기를 기대할 수 없고 육신적 질병이나 경제적 파탄을 당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불의하고 거짓된 것을 멀리하고 바르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욥은 사람의 정로를 벗어나 거짓되고 헛되고 죄악된 것을 구하지 않았다. 사람은 육신의 더러운 감정과 욕심을 따라 살기 쉬우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복된 길이며 평안의 길이다.

셋째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욥은 물질적 복을 받았고 물질적 여유가 있었지만 돈을 의지하고 사랑하거나 돈에 소망을 두지 않았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성도는 돈을 버릴 줄 알아야 참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넷째로, 우리는 가난한 자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을 돌아보며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대하고 구제와 선행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원수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재앙 당할 때 기뻐하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32장: 엘리후가 말을 시작함

[1-5절]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자기를 정당화]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욥기 32장부터 37장까지에 기록된 긴 내용은 엘리후라는 사람의 말이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인 엘리후는 분명히 욥의 친구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매우 경건한 자이었고, 욥의 친구들과 달리, 그의 판단은 매우 건전하였다고 보인다. 욥의 세 친구들의 대답이 없자, 엘리후는 그들에게 노를 발하였다.

엘리후가 욥에게 노한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자기가 옳다고 자기를 정당화하기 때문이었다. 욥은 자신이 양심에 크게 가책되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는 확신 속에서 자신을 고난 속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어려운 역경에서도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실로 하나님의 섭리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

또 엘리후가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한 것은 그들이 욥에게 대답하지 못하면서 욥을 정죄하기 때문이었다. 남을 부당하게 정죄하는 것도 나쁜 일이다. 잠언 17:15는,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했다.

[6-10절]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대인(大人)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엘리후는 욥이나 그 친구들과 달리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동안 잠잠히 참고 있었고 감히 그의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노인들이 일반적으로 인생 경험이 많아 젊은이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었다. 노인들이 경건과 도덕성을 구비한다면 아마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도서에서 젊은 목회자 디도에게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딛 2:3-4).

그러나 다른 한편, 사람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운 혹은 영감(KJV)이 그에게 총명을 주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높은 자라고 반드시 지혜로운 것이 아니고 노인이라고 반드시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러므로 잠언 1:7은 참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온다고 말했고, 잠언 2:6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고 말했다. 또 시편 119:97-100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는 자는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더 지혜롭게 된다고 말하였다.

[11-14절]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그가[욥이]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라는 원어는 “할 말을 찾는 동안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12절의 ‘꺾는다’는 원어(야카크)는 ‘깨우친다, 잘못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이긴다’는 원어(나다프)는 ‘찌르다, 패배시키다, 치다’는 뜻이다. 14절의 ‘그’는 욥을 가리킨다.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이 욥을 깨우치거나 욥의 잘못을 증명하지 못했고 욥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마치 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지혜로 욥을 책망한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한다.

잠언 10:20-21은,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고”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한다”고 말하고, 잠언 25:11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한다. 우리는, 물론, 잘못을 행한 자에게는 충고와 책망의 말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바르게 행하는 자에게는 위로의 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4,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15-22절]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엘리후는 나이 많은 다른 이들의 말을 인내하며 들었고 이제 자신이 대답할 몫을 말하고자 한다. 그는 마치 봉한 포도주같이, 새 가죽부대가 터지게 됨같이 할 말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성도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하여 말하는 것이 좋다. 의인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잠 15:28).

엘리후는 또 자신이 사람의 낯을 보지 않고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첨의 말은 일종의 거짓말이다. 아첨은 악한 일이다. 잠언 26:28,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잠언 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말했다(살전 2:5). 그러나 이단자들은 원망하며 불만을 토하며 그 정욕대로 행하고 그 입으로 자랑하고 이익을 위해 아첨한다(유 16).

욥기 3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사에 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정당화하므로 또 친구들이 욥의 잘못을 증명치 못하면서 그를 정죄하므로 그들에게 노를 발하였다. 우리는 의롭게 살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끝까지 겸손히 복종해야 하고 잠시라도 하나님의 섭리에 저항해서는 안 되고, 또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을 정죄해서도 안 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구하고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고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야 지혜로운 자가 되고 또 다른 이에게 조언을 줄 때도 스승이나 노인보다 더 나은 조언을 줄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필요한 경우 남에게 유익한 충고를 주고 또 필요한 경우 위로의 말도 줄 수 있어야 한다. 충고와 위로는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두 요소이다. 우리는 잘못 행하는 자에게 적절한 충고를 주어야 하고 또 마음이 약한 자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주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남에게 충고나 위로를 줄 때 신중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보고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판단해 말해야 하고 성급히 말하여 실수하지 말아야 하고, 또 남에게 거짓말이나 아첨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33장: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리지 않으심

[1-7절]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하나님의 신[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살게 하시느니라]. 네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엘리후는 욥에게 자기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자기가 아는 바를 진실하게 말하겠다고 말한다. 성도는 거짓을 버리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엘리후는 자신이 욥보다 나은 것처럼 높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허풍이나 허세를 품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말하기를 원한다. 성도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말해야 한다.

[8-12절] 네가 실로 나의 듣는 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늘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착고[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욥은 자신이 깨끗하고 죄가 없으며 허물과 불의도 없다고 생각했다. 성도가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삶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4에서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거리낌 없이 산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욥은 욥기 13:24, 27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고 그의 발을 차꼬에 채우신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완전하고 철저한 공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죄인이다.

[13-18절]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辯爭)함은 어찜이뇨?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사람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하시는 일에 대해 다 진술하지 않으신다. 그는 진술하실 의무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의 행하시는 일들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그와 변론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오직 잠잠히 순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이 제한적이며 하나님의 본심이 고난이 아니고 평안이라는 것을 안다. 예레미야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시편 30:5,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안다(롬 8:28).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상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고 옛 시대에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고 지금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단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감각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이 확실하게 교훈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그로 파멸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고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19-22절]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마음[생명]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와지느니라.

엘리후는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심각한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람은 뼈가 늘 쑤시며 입맛이 떨어져 음식 먹기를 싫어하고 살이 빠져 수척하며 보이지 않던 뼈가 튀어 나와서 그의 영혼은 죽음의 구덩이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23-26절]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사자]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진대[보인다면] 하나님이[그로]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그를 긍휼히 여겨 말하게 하기를] (NASB)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하게 하라]. 그런즉 그 살이 어린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만일 그에게 단 한 명의 사자라도 해석자로 있다면 그는 그를 긍휼히 여기며 옳은 것 곧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것이다. 그것은,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그의 살은 어린아이보다 연해져서 소년의 시적을 회복할 것이며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로 자기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그의 의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는 건강도 회복될 것이다.

[27-28절]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야솨르)[옳은 것]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야쇼르 알 아나쉼)라는 원문은 ‘사람들을 보며’(KJV)라는 뜻이라고 보인다.12) 본문은 죄의 징계로 극심한 질병의 고통을 받은 그가 사람들을 보며, ‘내가 전에 범죄하여 옳은 것을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죽음의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건지셨고 내 생명이 빛 곧 기쁨과 행복을 누리리라’고 간증할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29-30절]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여러 번 이런 징계의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그로 하여금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지시고 생명의 빛 즉 영생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엘리후는 ‘구덩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18, 22, 24, 28, 30절), 그것은 멸망의 구덩이인 지옥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멸망의 구덩이인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다.

[31-33절] 욥이여, 귀를 기울여 내게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너를 의롭게 하려 하노니 말하라.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

엘리후는 모든 일을 정당히 판단하고 말하려 한다. 그는 욥이 옳으면 옳은 것을 인정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욥이 할 말이 없으면 자기의 말을 좀더 들어보라고 말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하나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거나 불평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욥이 자신의 의와 성결을 주장하며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하시는 것들을 다 진술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지 말고 잠잠히 참고 믿고 순응하고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니고 평안을 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사람으로 교만치 않게 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신다. 우리는 그의 긍휼과 대속의 은혜로 지옥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고 또 상당한 평안을 누리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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