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엘리바스--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3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완전충족하시므로 사람이 그에게 무슨 유익을 드릴 것이 없다. 사람의 의나 행위의 온전함은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욥기 35:7-8,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사람의 죄는 하나님께 손해되는 것은 없으나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적하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벌을 가져온다.
[4-5절]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엘리바스는 욥이 당하는 재앙이 큼을 볼 때 필경 그의 죄악이 크다고 그릇되게 단정한다. 그러나 그가 말한 악들은 분명히 악이다.
[6-9절]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담보로 취하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갈한 자[피곤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담보로 취하거나 헐벗은 자의 옷을 벗기는 것은 악한 일이다. 성경은 이웃의 옷을 담보물로 취했으면 해 지기 전에 돌려보내라고 가르쳤고(출 22:26) 또 맷돌을 담보물로 취하지 말라고 했다(신 24:6). 그것은 옷 없이 추운 밤을 지내거나 맷돌 없이 식사를 준비하는 어려움을 고려한 것이다. 또 피곤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않고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 것도 악한 일이다. 성경은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고 말했다(잠 25:21). 또 구제하지 않는 것도 악한 일이다. 권세자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존귀한 자에게 거기에 살게 배려하면서도, 과부는 돕지 않고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고아의 팔을 붙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꺾고 학대하는 것도 악한 일이다.
[10-11절] 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
악인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과 벌을 받을 것이다.
[12절]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
하늘이 참 높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별들보다 더 높이 계신다.
[13-14절]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리운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궁창으로 걸어 다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이것은 엘리바스의 잘못된 추측이었다. 욥은 하나님께 대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엘리바스가 묘사한 사람은 분명히 악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이 멀리 계셔도 모든 사람의 행동을 다 아시고 빽빽한 구름과 흑암 가운데서도 다 아신다. 오늘날 사람들이 만든 수많은 인공위성에도 고성능, 초정밀 카메라가 있어 하늘 높은 곳에서 지구 위의 일들을 상당히 자세히 알아내며, 적외선 카메라는 캄캄한 밤에도 사람과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식별할 수 있다.
[15-16절]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어버리웠고 그 터는 하수로 인하여 함몰되었느니라[그 터는 강물에 흘러 내려가는도다}.
엘리바스는 욥이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 한다고 그릇되이 비난한다. 그 길은 죄악된 길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길인데 욥은 그런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다. 또 ‘그 터는 하수로 인해 함몰되었느니라’는 원문은 ‘그 터는 강물에 흘러 내려가는도다’는 뜻이다. 악인들은 결국 망한다는 뜻이다.
[17-18절]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기를 원한다. 아니, 실상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부정한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주셨다. 그들이 땅에서 누렸던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대상 29:14; 약 1:17).
[19-20절]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무죄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우리의 대적이 끊어졌고 그 남은 것(이스람)[그들의 풍성함](BDB, NASB)이 불사른 바 되었다 하느니라.
의인들이 악인들의 멸망을 본다는 뜻이다. 악인은 결국 망한다.
[21-22절]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우리는 하나님을 친근히 해야 한다(원문)(신 10:20; 약 4:8). 그것은 말씀과 기도의 삶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원문).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했다(롬 5:10).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 또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의와 선을 힘써 행해야 한다. 성도는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믿음과 회개와 순종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계속 누려야 한다. 엘리바스는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평안의 복이다. 그 평안은 몸의 건강과 경제적 안정과 가정적 행복과 사회적 평안을 다 포함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복은 영생이다(시 1:1-3; 119:165).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23-26절]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네 보배(베체르금의 원석 등]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곧 참된 회개이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교훈을 받으며 그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섬기며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요 경건이다. 그러면 병들었던 인격이 새로워지고 불행했던 환경이라도 회복될 것이다. 또 모든 사람은 자기의 장막 곧 집에서 불의를 멀리해야 한다. 자신이 죄와 불의를 멀리해야 할 뿐 아니라, 자기의 집 곧 자기의 아내와 자녀들도 죄를 멀리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회개요 회개의 열매를 맺는 일이다.
또 사람이 이 세상의 보화를 마음에 최고 가치로 품고 살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주께서는 누가복음 14:33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이 세상의 보화를 버려야 하나님을 참 보화로 깨닫고 모실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다 해롭게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하였다(빌 3:7-8).
[27-28절]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사람이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가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불의를 버리고 물질 사랑을 끊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으면, 그는 기도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또 그러면 그는 감사히 서원을 갚게 될 것이다. 죄는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는다. 시편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사람이 의를 행하면 기도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5:7). 또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하였다(요일 3:21-22).
엘리바스는 또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입의 교훈을 받고 불의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으면, 그는 무엇을 경영하든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형통케 하심을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는 자는 그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과도 연관된다. 주께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4).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다.
[29-30절]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
성도에게는 낮춤의 고난이 있다. 성도에게 때때로 질병, 가난, 원수들, 핍박 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그 고난에서 건지시고 높이신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건지실 것이며 성도의 손이 깨끗함을 인해 그런 자가 건짐을 입을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온 자, 그 장막에서 불의를 버린 자, 세상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보배로 삼은 자는 기도 응답을 받고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지고 고난 중에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의인은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모세는 그들을 멸하시려는 하나님 앞에 서서 그들의 용서를 간청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하였고 그의 진노를 막았다(출 32:9-14). 또 야고보서 5:15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말하였고, 요한일서 5:16은,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고 말했다.
엘리바스는 욥이 악을 행했다고 단정하고 악인이 결국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욥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개인의 건강과 경제적 안정과 가정적, 사회적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바스는 또 욥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이 세상의 보배를 버리고 하나님을 보배로 삼으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는 기도 응답을 받고 그의 경영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그가 높임 받고 구원 받고 또 남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욥은 엘리바스가 말한 그런 악한 자가 아니었다. 욥은 이미 하나님과 친근히 지내며 정직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엘리바스를 통해서도 교훈을 얻는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하나님과 친근히 하고 화목하고 하나님을 보배로 삼고 그를 사랑하며 오직 의롭고 선하게만 살고 이웃을 구제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이며 우리의 하는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질 것이며 또 우리 자신뿐 아니라 남도 구원하는 자가 될 것이다.
23장: 욥--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
[1-5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도 혹독히(Syr,Targ, Vg, KJV, NIV) 원망하니 받는 재앙[그의 손](LXX, Syr, NASB, NIV)이 [나의]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변론]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욥은 극심한 재앙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하기를 원하며 또 고난의 이유를 알기를 원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과 멀어지지 말고 하나님께로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환난 때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시편 50:15에 약속하셨다. 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교훈한다. 고난 당할 때가 곧 하나님께 기도할 때이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고 말한다(약 4:8).
주께서는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서 우리가 고난 중에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눅 18장). 그러나 기도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믿음이 있어야 고난 중에 낙망치 않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굳게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6-7절]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야심 비)[내게 힘을(KJV) 혹은 관심을(NASB) 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권능이 많으시지만 무조건 피조물들과 그 권능으로 다투며 위협하지 않으신다. 그는 겸손히 그에게 나오는 자를 용납하신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감히 전능자 하나님과 변론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아뢰었다(창 18:23, 27).
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셨다(사 1:18).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들과 변론하기를 원하신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37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셔서 그에게 나오는 자들을 용납하시고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정직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시편 34:8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였고, 시편 65:2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고 말했다.
[8-9절]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섬길 때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영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전서 6:16에서 하나님을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라고 표현하며 증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신 무한하신 영이시다. 그는 예레미야를 통해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셨다(렘 23:24).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고 고린도후서 5:7에서 말했고, 히브리서 11:27은 모세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고 증거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지금은 보이지 않는 내세의 영광의 천국을 믿고 소망한다. 바울은 로마서 8:24-25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하였고, 고린도후서 4:18에서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하였다.
[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고 말한다. ‘나의 가는 길’이란 그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 그가 지금도 걷고 있는 길, 또 그가 앞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 욥의 친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오해하고 그릇되이 비방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정확히 아신다.
또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한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이라고 번역하면 그가 그 시련을 통해 그의 인격이 단련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환난과 시험이 성도의 인격을 단련시키며 온전케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로마서 5:3-4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문은 단순히, “그가 나를 시험하셨으니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것은, 그가 앞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그의 당한 환난의 일에 대해 하나님께 묻고 공정한 판단을 받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친구들의 비난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시기를 원한 내용에 이어진다고 보인다(매튜 풀, 매튜 헨리, 재미슨-포셋-브라운). 욥은, 그의 마음과 그의 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셨으니, 그가 정금 같은 자로 인정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11-12절]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욥은 자신의 발이 그의 걸음 곧 하나님의 명하신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그의 길 곧 하나님의 명하신 교훈을 지켜 치우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의 걸음’ ‘그의 길’은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가리킨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교훈대로 살아야 한다. 잠언 6:23은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했고,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증거하였다(딤후 3:16).
욥은 또 그의 입술의 명령 곧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아니하였고 일정한 음식 곧 날마다 그에게 필요한 양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양식에 비교하였다. 우리가 육신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일정한 음식을 먹듯이, 우리는 영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4:4).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그 말씀을 묵상하고 힘써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8:20), 사도 바울은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살후 2:15).
[13-14절]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뜻이 일정하다’는 원어(베에카드)는 ‘한 마음을 가지신다’ (in one mind)(KJV) 혹은 ‘유일하시다’(unique)(NASB)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음, 변치 않는 마음, 일정한 뜻을 가진 유일하신 자이시다. 그와 비교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의 뜻을 돌이킬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을 다 행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는 욥을 향해 작정하신 것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 . .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 46:10-11).
[15-17절]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그러나(NASB, NIV) 나는 어두움 앞에서 끊어지지[죽지] 아니하였고 그가 어두움을 내 얼굴에서 가리지도 아니하셨도다].
지금 욥은 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며 또 낙심한다. 그러나 그는 그 재앙의 어두움으로 아직 죽지 않았고 그 재앙의 어두움이 아직 제거되지도 않았다.
욥기 2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올 때 그가 자기에게 나아와 기도하는 자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그의 인자하심을 믿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이시므로 우리가 그를 뵈올 수 없으나 우리는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오직 그에게 기도해야 하고 또 그를 따르며 섬겨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우리의 가는 길을 오직 그는 아신다. 우리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우리의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지 못하지만,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 그는 우리가 참으로 그를 알고 경외하며 사랑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도무지 모르고 그를 두려워함도 없고 그를 사랑함도 복종함도 없는 쭉정이와 같은 자인지 다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실한 성도인지 아닌지 아신다. 실상,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가 우리의 중심을 아시면, 우리는 낙망할 것이 없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평소에 우리의 생각대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길을 굳게 붙들자. 욥은 고난의 시련이 있지만, 이것을 잘 참으면 정금 같은 인격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인격의 남은 죄성을 더욱 깨닫고 버리기를 결심하게 되며 조금씩 성화에 이른다. 욥은 자신의 인격이 정금같이 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평소에도 죄를 멀리하고 정금 같은 인격자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 또 고난 중에도 낙심치 말고 잘 참고 바르게 행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고난을 통해 불순물이 다 제거된 순수한 금과 같은 인격자로 성숙될 것이다.
욥은 평소에 하나님의 교훈을 따랐고 그의 말씀을 일정한 음식보다 귀히 여겼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계시들의 저장소인 신구약성경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을 힘써야 한다. 우리는 매일 성경 읽는 일을 하루 세 끼 밥을 먹는 것보다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렇게 사는 자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복되며(시 1:3), 큰 평안을 얻으며 장애물이 없을 것이며(시 119:165), 우리에게 닥친 모든 현실은 합력하여 선과 성화를 이룰 것이다(롬 8:28).
24장: 욥--하나님께서 악인의 심판을 지연하신다
[1절]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시간들]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날들]을 보지 못하는고?
‘정한다’는 원어(차판)는 ‘감춘다, 저장한다’는 뜻이다.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심판의] 시간들이 전능자로부터 감추이지 않았으나,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심판의] 날들을 보지 못하였는고?”이다. ‘시간들’이나 ‘날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가리킨다고 보이며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심판을 지연하심을 말한 것이라고 본다.
[2-4절] 어떤 사람은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욥은 악인에 대해 묘사한다. 땅의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악한 일이다. 신명기 19:14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先人)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고 말하였다. 또 양떼를 빼앗아 기르는 것이나,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는 것이나,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는 것도 악한 일이다. 시편 68:5는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표현하였고, 신명기 10:18은, “[그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억울함을 갚아주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 또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5-12절] 그들은 거친 땅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山中)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티플라)[보기 흉함, 불미함](BDB)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욥은 가난한 자들에 대해 묘사한다. 세상에는 악한 자들로 인하여 신음하며 부르짖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다. 입을 옷이 없고 겨울에 따뜻한 방이 없고 먹을 음식이 충분히 없고 마실 물이 충분히 없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의 불의한 일과 그 가난한 자들의 신음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 같은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고 그의 심판도 없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형제들 중 하나가 주릴 때에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방문하는 것이다(마 25:35-40). 그런 행동이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의 실천이다. 성경은 우리의 원수라도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교훈한다(롬 12:20). 또 이 세상에서 악인에 대한 심판이 시행되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은 죽지 않았다.
[13절]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 첩경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광명[빛]은 참 지식과 의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다(요일 1:5). ‘빛의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빛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빛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 길에 머물지 않는 자들, 곧 십계명을 버리고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14-17절]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욥은 살인하는 자, 간음하는 자, 도적질하는 자를 예를 들어 말한다. 이들은 다 어두움의 사람들, 곧 어두운 시간에 일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빛을 싫어하고 빛을 두려워한다. 주 예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 3:20).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빛된 생활을 해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사도 바울은 우리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고 교훈했고(롬 13:13), 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다(엡 5:8-9).
[18-21절]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무덤]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기억함을 다시 얻지 못하나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그는 잉태치 못하므로 해산치 못한 여인을 학대하며 과부를 선대치 아니하는 자니라.
악인들은 빨리 쇠잔할 것이고 그들의 산업은 저주를 받고 그들은 다시 포도원의 소산을 즐기지 못할 것이다. 범죄자는 곧 죽어 무덤에 묻힐 것이다. 그를 낳은 태, 곧 그의 모친도 그를 잊어버리고 벌레가 그 시체를 먹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기억지 못하고 그는 나무처럼 꺾일 것이다. 악인은 슬픈 여인들도 동정치 않고 도리어 학대한다.
[22-23절] 그러나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시니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도 일어나는구나. 하나님이 그들을 호위하사 평안케 하시나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옛날 영어성경은 22절을 “그는 또한 그의 권세로 강한 자들을 이끌도다. 그가 일어나니 아무도 생명을 확신하지 못하도다”라는 뜻으로 번역했다(KJV). 그러면 그것은 악인들이 다른 동료들을 끌어들이고 사람들은 그 악한 자들을 두려워한다는 뜻일 것이다. 23절도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고 ‘그 악인’이라고 보며 그 동료들이 어느 정도 평안을 누리지만 그의 눈이 그들의 길에 있다는 뜻 같다.
그러나 근래의 한 영어성경은 “그러나 그는[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그 강한 자들을 끌어내시도다. 그가 일어나시나 아무도 생명을 확신하지 못하도다”라는 뜻으로 번역했다(NASB). 그러면 23절의 ‘그’도 하나님을 가리킬 것이다. 한글개역은 후자에 가깝다.
[24-25절]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낮아져서 범인(凡人)처럼 제함을 당하고 곡식 이삭같이 베임을 입느니라.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
악인들은 얼마간 평안을 누리나 결국은 다 죽게 될 것이다.
욥기 2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다고 낙심치 말아야 한다. 악인들은 일시적으로 형통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최종적, 공의의 심판이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의 땅의 경계표를 옳기고 앙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와 과부의 소를 볼모잡으며 빈궁한 자를 몰아내는 등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탐심 등의 죄악을 버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고 또 그의 계명과 교훈을 따라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남에게 선을 베풀며 구제하기를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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