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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8장-30장

헤븐드림 2021. 9. 12. 03:31

 

 

28장: 욥--지혜는 고귀하다

 

[1-4절] 은은 나는 광[광산]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취하고 동(銅)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사람이 흑암을 파하고 끝까지 궁구하여 음예(陰翳)[침침한 그림자]와 유암(幽暗)[어두움] 중의 광석을 구하되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구멍을 깊이 뚫고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달려 내리니 멀리 사람과 격절되고 흔들흔들 하느니라.

금이나 은, 구리나 철은 각각 캐는 광산이 있다. 사람은 캄캄함을 무릅쓰고 매우 깊은 갱도를 파고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곳에 매달려 내려가서 흑암 속에서 금은동철의 광석을 찾고 그런 것들을 캐낸다. 귀중한 것들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5-11절] 지면은 식물을 내나 지하는 불로 뒤집는 것 같고 그 돌 가운데에는 남보석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위엄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무너뜨리며 돌 가운데로 도랑을 파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시냇물을 막아 스미지 않게 하고 감취었던 것을 밝은 데로 내느니라.

사람은 땅 위에서 식물을 심고 가꾸고 먹을 것을 얻지만, 지하는 불로 뒤집는 것 같고 각종 보석은 땅 속에와 돌 가운데 있다. “지하는 불로 뒤집는 것 같다”는 표현은 영감된 과학적 발언이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중심에는 약 5,000도의 뜨거운 불이 있다고 추측한다. 화산이 한 증거다. 땅 속의 각종 금은보석이 있는 곳은 공중의 새들도, 사나운 짐승들도 모르나, 사람들은 그것을 찾아내고 캐어낸다.

[12절]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사람이 소유한 것들 중에 지혜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금은보석도 사람이 찾기 쉽지 않으나 노력하여 상당히 찾아내어 얻는다. 그러나 지혜와 명철은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땅 위의 어느 곳에 있고 깊은 바다의 어느 곳에 있는가?

[15-19절]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onyx)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욥은 지혜의 가치가 정금이나 은, 남보석, 수정, 홍보석[루비, 진주]과 황옥보다 참으로 크다고 말한다. 그것은 돈 몇 천만원이나 몇 억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가치 있다. 잠언 3:13-18도 지혜가 가장 귀하다고 증거했다.

[20-22절]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지혜와 명철의 곳은 모든 생물과 공중의 새에게 숨겨져 있다. 그러나 멸망과 사망에 들어간 자들은 지혜에 대해 소문을 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혜가 없어서 멸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혜보다 심히 가치 없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았다. 많은 사람들은 헛된 세상 것에 큰 가치, 아니 모든 가치를 두고 살고 있다. 그러나 전도서는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도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사람이 참 지혜의 가치성을 깨닫는다면, 그는 세상의 허무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행하며 살 것이다. 거기에 참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23-28절]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뢰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지혜가 이 세상의 금은보석보다 가치 있으나 사람이 지혜를 알지 못하지만, 온 세상을 두루 보시고 세상의 땅끝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 바람의 무게를 다시고 바닷물의 분량을 재실 수 있고 비와 우뢰와 번개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곧 온 우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길을 아시고 그것이 있는 곳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보셨고 찾아내셨고 그것을 선포하셨고 굳게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고 말씀하셨다. 욥의 말은 잠언의 말씀과 같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작]이며(잠 9:10) 그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 지혜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혜와 지식을 말할 수 없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그를 아는 데로부터 나온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에 그의 명하신 삶의 규칙이 요약해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키며 악을 떠나는 것이 지혜와 명철이며, 그렇지 못한 것이 미련함과 어리석음이다(잠 8:13).

지혜는 금은보석보다 가치 있는 것임을 알고 지혜를 사모하며 구하고 얻자. 요한복음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참된 지혜는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렇지 않은 것이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얻어 영육의 복과 현세와 내세의 복을 누리자. 경건 훈련을 교훈한 디모데전서 4:7-8도 같다.

 

 

 

29장: 욥--옛날은 복되었다

 

[1-3절] 욥이 또 비사를 들어[이야기하여] 가로되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같이 되었으면―그때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었고 내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느니라.

욥은 지난날들에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재난과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신다. 신명기 32:10, “여호와께서 그를[자기 백성을]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욥은 또 지난날들에 하나님의 등불이 그의 머리에 비취었고 그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다고 말한다. ‘그의 등불’이나 ‘그 광명’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의 빛, 곧 그를 기쁘게 하시고 행복케 하시는 빛이다. 민수기 6:24-26에 기록되어 있는 대제사장의 축도는 다음과 같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욥의 과거는 복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다. 지금 그는 고난 가운데서 그 복된 시간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4절]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 그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

욥은 과거에 그가 누렸던 가정적, 영적 복을 회상한다. ‘강장하던’이라는 원어(코레프)는 ‘추수의 때’라는 뜻인데(BDB), 인생의 전성기와 결실기를 가리킨다고 본다. 욥은 그때 하나님의 우정이 그의 장막 위에 있었다고 말한다. ‘우정’이라는 원어(소드)는 ‘의논, 친밀함’이라는 뜻이다(BDB). 욥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시편 25:14, “여호와의 친밀함(דוֹס)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5절] 그때는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자녀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욥은 가정적인 행복을 누렸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여러 명의 자녀를 주셨고 그 자녀들은 그 곁에서 잘 자랐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은 인생의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6절] 뻐터가 내 발자취를 씻기며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시내를 흘려 내었으며.

욥은 물질적으로도 유여함의 복을 받았다. 그의 양들과 소들은 수가 많았고 그는 그것들에게서 많은 우유를 얻었고 뻐터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먹고 남을 정도였다. 또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시내를 흘려 내었다”는 말은 돌밭 같은 곳에서도 감람나무들이 번성하여 감람유를 풍성하게 산출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다시 말해, 욥은 물질적 풍성함과 유여함을 누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욥은 가정적, 물질적 복을 누렸다.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이었다. 신명기 28장에 밝히 증거되어 있는 대로, 우리의 영육의 복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는 만복의 근원이시다.

[7-11절] 그때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베풀기도 하였었느니라.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방백들은 말을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니 그 혀가 입천장에 붙었었느니라. 귀가 들은즉 나를 위하여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위하여 증거하였었나니.

욥은 과거에 소년들뿐 아니라, 노인들과 방백들과 귀인들에게서도존경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그 앞에서 말도 조심했다.

[12-14절]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사람들이 그를 존중하였던 까닭은 그가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르짖는 가난한 자나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져내었고 망하게 된 자나 과부도 도와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그를 위해 축복하고 그로 인해 기뻐 노래하였다. 선한 삶은 하나님의 뜻이며 모세의 율법과 잠언과 구약성경 전체에서 강조된 바이다.

[15-17절]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査實)하여[조사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내었었느니라.

욥은 자신이 선한 삶을 실천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가난한 자들을 도왔고 또 억울한 일을 당한 자의 구원을 위해 애썼다. 이렇게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였고 그 앞에서 말도 조심하였던 것이다.

[18절]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善終)하리라. 나의 날은 모래같이 많은 것이라.

‘내 보금자리’는 그의 가정을 가리킨다. 날이 모래같이 많다는 것은 장수(長壽)한다는 뜻이다. 욥은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적 행복 속에서 평안히 오래 살다가 생을 마치겠다고 생각하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의 끝이나 내일의 행복과 불행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 있다.

[19-20절] 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내 가지는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이슬에 젖으며 내 영광은 내게 새로와지고[새로워지고] 내 활은 내 손에서 날로 강하여지느니라 하였었노라.

욥은 자신의 삶을 나무에 비유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 뿌리가 물로 뻗어나가고 그 가지가 밤새도록 이슬에 젖어 충분한 물을 취하는 푸른 나무처럼 복되었다고 말한다. 시편 1:1-3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악을 멀리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의 나무와 같다고 말했다. 또 욥은 자기의 영광과 형통이 영속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영광이 더욱 새로워지고 그의 세력과 힘이 날로 강하여지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므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 교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평안과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높고 깊으신 뜻은 아무도 모르며 그의 섭리하시는 길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의 내일의 일이나 행복과 불행을 알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한다.

[21-23절] 무리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가르치기를 잠잠히 기다리다가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었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이슬같이 됨이니라.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욥은 전날에 자신이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욥의 말을 이슬같이, 단비같이 여기며 사모했다. 악인의 말은 악하고 파괴적이지만, 의인의 말은 가치가 있고 남에게 유익을 준다. 잠언은 의인의 혀가 천은(天銀)과 같으며(잠 10:20), 또 지혜로운 자의 혀가 양약 같다고 말한다(잠 12:18). 욥은 그런 혀를 가졌다고 보인다.

[24절]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함소하여 동정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었느니라.

본절의 원문은, “내가 그들을 보고 웃을지라도 그들이 그것을 믿지 않으며 나의 얼굴빛을 무색케 아니하리라”는 뜻 같다(KJV). 사람들은 욥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비웃는 인격이 아님을 인정했다는 뜻 같다. 그들은 욥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즉 그를 무안하게 하지 않았다.

[25절]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고 으뜸으로 앉았었나니 왕이 군중(軍中)에[군대 가운데]에 거함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도 같았었느니라.

욥은 사람들의 길을 택해주었다. 또 그는 왕이 자신의 군대 가운데 거함같이 그들 중에 으뜸으로 앉았고, 또 애곡하는 자들 중에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다. 욥은 그의 고백대로 참으로 사람들 가운데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경건하고 선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고 보인다.

욥기 29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친근히 함으로써 그의 보호와 그의 기쁨을 누렸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고 그의 등불이 그의 머리에 비취었고 그의 친밀함이 그의 장막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도 창조자, 섭리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말씀과 기도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그의 보호하심과 그의 지식과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

둘째로, 욥은 하나님의 복을 누렸다. 그는 가정적 복을 누렸고 물질적 여유의 복을 누렸고 또 사회적으로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복을 누렸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녀의 복을 주셔서 여러 명의 자녀들이 복되게 자랐고, 물질적 여유를 주셔서 먹고 쓰고 남음이 있게 하셨고, 또 사회적으로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얻게 하셨고 그의 지혜와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유익한 교훈과 조언을 주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자는 복을 누린다.

셋째로, 욥은 구제와 선행을 실천하였다. 욥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였고 고아들을 돌아보았고 장애인들을 도왔다. 그런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며 사람들도 존경하는 삶이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며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는 삶이다. 우리도 구제와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욥처럼 큰 고난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조금 더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30장: 욥--그러나 지금은 고난 중에 있다

 

[1-8절]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기롱하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나의 보기에 나의 양떼 지키는 개 중에도[개들과 함께] 둘 만하지 못한 자니라. 그들은 장년의 기력이 쇠한 자니 그 손의 힘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랴.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파리하매 캄캄하고 거친 들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BDB, NASB) 떨기나무 가운데서 짠 나물도 꺾으며 대싸리[댑싸리] 뿌리로 식물을 삼느니라. 무리는 도적을 외침같이 그들에게 소리지름으로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쫓겨나서 침침한 골짜기와 흙구덩이와 바위 구멍에서 살며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고토로부터 매질을 당한(혹은 벌을 받은)](BDB, NASB) 자니라.

이 세상에는 존귀한 자도 있고 천한 자도 있다. 인격 훈련이 잘 되고 재산이 있고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인격 훈련을 잘 받지 못하고 가난하고 사회적 신분이 없는 자들이 있다. 욥은 예전에는 존경을 받는 존귀한 자이었다. 그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였다. 그는 많은 재산도 있었고 사회적 신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재앙으로 병들고 가난해졌을 때, 그는 심히 비천한 상태에 떨어졌다. 그는 지금 심지어 비천한 젊은이들의 조롱을 받고 있다. 사람의 존귀함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9-15절] 이제는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나를 미워하여 멀리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내 줄(KJV, NIV)을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케 하시매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그 낮은 무리가 내 우편에서 일어나 내 발을 밀뜨리고 나를 대적하여 멸망시킬 길을 쌓으며 도울 자 없는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구나. 성을 크게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들어오는 것같이 그들이 내게로 달려드니 놀람이 내게 임하는구나. 그들이 내 영광을 바람같이 모니 내 복록이 구름같이 지나갔구나.

이전에 존귀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병들고 가난해진 욥은 지금 비천한 자들의 조롱과 핍박을 받고 있다. 그들은 욥을 조롱하고 미워하며 침 뱉고 있다. 욥은 이 고난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곤고케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욥의 발을 밀뜨리고 멸망시킬 길을 쌓고 그의 길을 헐고 재앙을 재촉하며 그에게 달려든다.

세상에는 때때로 의인들에게 이런 핍박이 있다. 예수께서 당하신 핍박은 그런 유의 핍박이었다. 로마 군병들은 그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고 희롱하며 침 뱉고 갈대로 그 머리를 쳤다(마 27:29-30). 대제사장의 종들은 그를 손바닥으로 때렸다(막 14:65). 시편 22:6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했었다. 사도들도 주리고 목말랐고 헐벗고 매맞았고 정처가 없었다. 바울은 자신들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고전 4:9-13).

[16-23절]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직역하면, ‘내 영혼이 내 위에 부어지며’] 환난날이 나를 잡음이라.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하나님의[혹은 ‘나의 병의’(KJV)] 큰 능력으로 하여 옷이 추하여져서 옷깃처럼 내 몸에 붙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히 하시고 완력으로[강한 손으로] 나를 핍박하시오며 나를 바람 위에 들어 얹어 불려가게 하시며 대풍 중에[폭풍의 소란함 속에](BDB) 소멸케 하시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가시리이다[이는 주께서 나를 죽게 하시며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가실 것을 내가 앎이니이다].

욥은 지금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다. 그의 마음은 물같이 녹았고, 그의 몸은 뼈가 쑤시고 아픔이 쉬지 않으며, 그의 옷은 추하여졌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진흙에 던지셨고 티끌과 재 같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응답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잔혹히 하셨고 강한 손으로 핍박하셨다고 말하며 또 그로 바람에 불려가게 하시고 폭풍의 소란함 속에 소멸하게 하시며 그를 죽이려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욥보다 더 심한 고통이었다. 시편 22편은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고 예언했었다(14-16절).

[24-31절]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베이)[폐허 더미에서]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겠는가?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내 마음이 어지러워서[내 창자가 끓어오르고](KJV) 쉬지 못하는구나. 환난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 검어진 살을 가지고[슬퍼하며](KJV, NASB) 걸으며 공회 중에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내 가죽은 검어져서 떨어졌고[벗겨졌고] 내 뼈는 열기(熱氣)로 하여 탔구나. 내 수금은 애곡성(哀哭聲)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哀痛聲)이 되었구나.

본문은 욥이 고난 중에 가진 슬픔을 묘사한다. 그는 과거에 고생하는 자를 위해 울고 빈궁한 자를 위해 근심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큰 슬픔이 왔다. 그는 복을 바랐으나 화가 왔고, 광명 즉 기쁨과 행복을 기다렸으나, 흑암 즉 슬픔과 불행이 왔다. 그의 창자는 지금 끓어오르고 있다. 그는 햇볕에 그을리지 않았으나 살이 검어졌다. 그것은 그의 슬픔 때문이었다. 그는 이리의 형제처럼, 타조의 친구처럼 살고 있다. 그의 살갗은 검어져서 벗겨졌고 그의 뼈는 열기로 인해 탔다. 그의 수금과 비파는 슬픔의 노래, 애통과 애곡의 노래의 악기가 되었다.

성도는 고난 중에 슬퍼할 때가 있다. 다윗은 시편에서,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말했고(시 55:17), 또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말했다(시 56:8).

욥기 30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의미와 가치를 외적인 데 두지 말아야 한다. 욥은 지금 천한 자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으나 그는 천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존귀한 성도이었다. 세상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으며,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가 있고 평범한 사람이 있고, 배운 자가 있고 그러지 못한 자가 있다. 모든 사람은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는다. 시편 49:12는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했다. 참으로 사람의 가치는 외적인 데 있지 않고 내적인 데, 즉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둘째로, 욥의 고난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표이었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홀로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다. 특히 욥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사도들과 교회 역사상의 순교자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교회를 위해 담당하였다. 이처럼 의인들도 때때로 고난을 당한다.

셋째로, 우리는 의롭게 행하는 중에 고난을 당하면 욥을 기억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참고 견디어야 한다. 야고보서 5:10-11,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베드로전서 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4:12-13,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묵상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이 너무도 어려운 믿음의 실천이며

성숙한 그리스도인 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안다.

 

욥기 28장 29장 30장을 보며 욥의 믿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을 스스로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버리시는 줄 모르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욥을 생각하며 슬픈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생각나서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기도드리셨던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아프고 힘드셨을까?

 

욥이 의로운 자임에도 이토록 불같은 시련을 받는 것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이 오버랩되면서 인간 욥이 받은 고난의 한계성은 사단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기회를 주지 않는 믿음으로 교훈이 되지만 예수님은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하시는 구원의 역사적 업무를 달성하셨다는데 더욱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다.

 

물론 욥의 믿음도 나는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처참하게 죽어갈 것을 예감하는 모습에 가슴이 저려온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시면서도 나를 외면하시고 있다는 그 절망감을 공감해 본 적이 있다.

다만 예수님께서 고통 당하셨기에 그 은혜로 구원 받았는데 어찌 하나님의 뜻에 물음표를 던질 수 있을까? 하는 

믿음으로 주님께 오늘도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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