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장: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크심
[1-5절] 이로 인하여 내 마음이 떨며 자기 처소에서 떠나느니라[뛰느니라]. 하나님의 음성 곧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 들으라. 그 소리를 천하에 퍼치시며 번개 빛으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위엄의 울리는 음성을 내시고는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1절의 ‘이로 인하여’라는 말은 앞장 끝에서 말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능력의 일들을 가리킨다. 엘리후는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능력의 일들을 인해 그의 마음이 떨리며 뛴다고 말한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를 사용하심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는 천둥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표현한다. 천둥소리는 온 천하에 퍼지고 번개 빛은 땅끝까지 이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다 이해하고 헤아릴 수 없는 큰 일들을 행하신다.
[6-13절]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비도 그같이 내리게 하시느니라.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 이는 그 지으신 모든 사람으로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짐승들은 숨는 곳으로 들어가서 그 굴에 머물며 남방 밀실에서는 광풍이 이르고 북방에서는 찬 기운이 이르며 하나님의 부시는 기운에 얼음이 얼고 물의 넓이가 줄어지느니라. 그가 습기로 빽빽한 구름 위에 실으시고 번개 빛의 구름을 널리 펴신즉 구름이 [그의]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무릇 그의 명하시는 것을 세계상[온 세상의 지면에]에 이루려 함이라. 혹 징벌을 위하며 혹 토지를 위하며 혹 긍휼 베푸심을 위하여 구름으로 오게 하시느니라.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고 적은 비와 큰비도 그같이 내리게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신다는 말은 이런 일들은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눈이 내리고 비고 오면 짐승들은 숨는 곳으로 들어가 그 굴에 머문다. 남방에서 태풍 같은 광풍이 밀려오고 북방에서 찬 공기가 닥쳐온다. 하나님의 부시는 기운에 얼음이 얼고 물의 넓이가 줄어진다. 그가 습기로 빽빽한 구름 위에 실으시고 번개 빛의 구름을 널리 펴시니 눈과 비구름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들을 온 세상의 지면에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악인들이나 악한 땅에 징벌을 내리시는 데 그것들을 쓰기도 하시고 또 논과 밭을 위해, 그의 긍휼 베푸심을 위해 쓰기도 하신다. 그는 천둥과 번개, 적은 비와 큰비, 남방으로부터의 광풍과 북방의 찬 공기, 물의 얾, 비구름 등을 다 주관하신다.
[14-22절]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 빛으로 번쩍 번쩍하게 하시는지 네가 아느냐? 구름의 평평하게 뜬 것과 지혜(데임)[지식]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을 네가 아느냐? 남풍으로하여 땅이 고요할 때에 네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네가 아느냐? 네가 능히 그와 함께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너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어두워서 진술하지 못하겠노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어찌 삼키우기를 바랄 자가 있으랴[만일 사람이 말한다면, 정녕 그는 삼키울 것이라](KJV). 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북방에서는 금빛이 나오나니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묘한 일들을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네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름을 하늘에 평평하게 뜨게 하시는지 아느냐, 지식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기묘한 일들을 아느냐, 남풍이 고요히 불 때 옷이 따뜻해지는 까닭을 아느냐, 네가 능히 하나님처럼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고 묻는다. 실상, 사람은 하나님의 기묘한 일들에 대해 무엇을 말할 만한 지식이 없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 앞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어두운 비구름은 때때로 해를 가리지만 바람이 불어 비구름을 지나가게 하면 하늘이 맑아지고 우리는 밝은 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어떻게, 왜 구름이 거기에 생기고 바람이 그때에 부는지 모른다.
[23-24절]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는 전능자 하나님을 다 측량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가 자신을 알리신 작은 부분과 분량만큼이다. 하나님께서는 권능이 지극히 크시고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욥기 37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전능하시고 엄위하시며, 그의 지혜로운 뜻대로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주관하시고 구름과 바람과 눈과 비를 주관하신다. 12절, “구름이 그의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하나니 이는 무릇 그의 명하시는 것을 온 세상의 지면에 이루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적당한 때에 그의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신다.
둘째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다. 23절,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욥기 36:26,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시편 145: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 . . .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는 그가 자신을 나타내신 지극히 작은 부분뿐이다. 물론 그 지식은 확실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크신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다.
셋째로, 사람은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기본적 마음가짐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는 그를 경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38장: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심
[1-7절]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측량하였는지], 누가 그 준승[(목공일에 쓰는) 줄]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柱礎)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은 그의 위엄과 불쾌함을 나타내시는 것 같다. 욥과 그 친구들은 자신들을 반성하며 두려움과 겸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에차)[의논]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씀하셨다. 욥의 문제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불경건이나 사악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무지와 사려 깊지 못함에서 나온 불평스런 말에 있었다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에게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라고 물으셨다. 그가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욥은 존재하지도 않았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이 일을 행하셨다(사 44:24).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드러난 창조 세계의 일들도 모른다면, 그는 하나님의 감추인 섭리의 일들에 대해 아는 것처럼 처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새벽 별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동의어로 쓰였고 그것은 천사들을 가리켰다(욥 1:6).
[8-11절]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그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포대기]를 만들고 계한을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바닷물이 무더기같이 넘쳐흐를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셨다. 바닷가의 모래 벌판은 바닷물이 넘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경계선이다. 예레미야 5:22,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界限)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12-15절]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쫓아낸] 일이 있었느냐?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고 만물이 옷같이 나타나되 악인에게는 그 빛이 금한 바 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아침을 오게 하신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침이 오지 않을 것이다. 새벽빛이 온 땅에, 땅끝까지 순식간에 비취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빛이 비치면 땅은 진흙에 도장을 찍은 것같이, 예쁜 옷같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천지만물은 밝은 빛 아래서 각각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깔과 모양을 드러낸다. 또 아침 빛은 악인을 쫓아낸다. 악인은 아침 빛을 싫어하고 어두운 밤을 좋아한다. 악인들에게는 빛이 없다. 악인들은 빛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빛으로부터 피하며 도망친다. 또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빛을 거두신다. 악인에게는 참된 기쁨도 평안도 행복도 없다.
[16-18절] 네가 바다 근원(네베크)[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깊은 바다 속에는 아마 많은 샘들이 있을 것이다. 노아 홍수 때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성경은 말한다(창 7:11). 전문 잠수부(다이버)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만(보통은 수중 30미터 정도 들어간다고 함), 그것은 깊은 바다(보통 5-6km, 최저 약 11km)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잠수함도 물의 압력 때문에 아주 깊은 바다 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특별한 탐사선도 겨우 900미터 정도 내려간다고 한다. 사람은 바다 속에 대해 지극히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녀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아시며 그것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또 ‘사망의 문,’ ‘사망의 그늘진 문’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것은 죽음과 무덤을 가리킬 것이나, 혹시 악인들을 위해 예비된 지옥의 문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사람은 죽음너머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지옥의 문,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간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세계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라고 물으신다. ‘측량하다’는 원어(힛보난타)는 ‘지각(知覺)하다, 이해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광활한 지구의 넓이를 느낄 수 없다. 오늘 우리도 땅의 크기를 수학적 어림 계산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19-24절]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네가 능히 그 지경으로 인도할 수 있느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年數)가 많음이니라.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
우리는 빛의 이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흑암의 처소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또 눈 곳간과 우박 창고를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죄인을 징벌하실 때 사용하신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을 위해 아모리 다섯 왕들의 연합군과 싸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큰 덩어리 우박들을 내려 여호수아를 도우심으로 아모리인들 중에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게 하셨다(수 10:11). 사람은 또 빛이 나뉘는 길을 알지 못한다. 빛은 1초에 30만 킬로미터, 즉 지구를 일곱 바퀴 반 정도나 도는 속도로 달려나간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동풍의 길도 파악하기 어렵다.
[25-30절]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이 돌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날 때 그것을 주장하는 이는 하나님밖에 없으시고 천둥과 번개의 길을 내는 자도 그 분뿐이시다. 사람은 비와 이슬방울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지 못하고 수증기가 어떻게 공중의 서리가 되는지 혹은 물이 어떻게 얼음이 되는지 그 이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물이 섭씨 0도 이하가 되면 언다는 것을 알지만, 왜 그것이 그래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창조 세계는 신비로 가득하다.
[31-33절]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옛날부터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하며 별자리들의 이름을 붙였다. ‘묘성(昴星)’은 황소자리 별자리(Pleiades)로서 일곱 개의 별들로 되어 있고, ‘삼성(參星)’은 오리온 별자리(Orion)로서 세 개의 별들로 되어 있고, ‘북두성(北斗星)’은 큰 곰 별자리를 가리킬 것이다. 사람은 별들을 묶거나 풀 수 없고 때를 따라 그것들을 이끌 수 없다. 거대하고 광활한 우주 공간인 저 하늘에 떠 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 그리고 그것들이 여러 모양들을 이루며 규칙적이게 제자리를 지키는 현상들은 사람이 조금도 관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34-38절]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 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티끌이 굳어질 때와 흙덩이가 서로 붙을 때, 누가 하늘의 병을 기울일 수 있느냐?](NASB, NIV).
욥의 목소리가 구름에 도달하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도달했다 할지라도 구름이 그의 말에 복종치 않을 것이다. 하늘의 번개를 주관하고 그것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참 지혜를 잃어버렸고 심히 무지하고 허무한 것을 추구하고 사는 상태에 있지만, 확실히 짐승들과는 다르다. 사람에게는 짐승들에게 없는 높은 수준의 지혜와 이성과 도덕성이 있다. 이런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지혜로 구름들의 수를 다 셀 수 없으며 하늘의 물병을 기울여서 단단하게 굳어지는 티끌과 딱딱하게 붙어버리는 흙덩이를 부드럽게 할 능력이 없다. 욥이든지 누구든지 사람은 구름과 비에게 명령할 힘이 없다.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39-41절]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삼림에 누워서 기다리는 때에니라.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사자는 동물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납고 날렵한 짐승이다. 그것은 100 내지 250킬로그램의 체중을 가지고도 시속 6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달려가 얼룩말, 영양, 기린, 사슴, 물소, 멧돼지 등을 사냥한다. 낮에는 보통 나무 그늘에서 쉬고 밤에 활동하며 열 마리나 스무 마리씩 떼를 지어 산다. 사람이 사자를 위해 먹이를 사냥할 수 없고 젊은 사자들의 식욕을 채울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르신다.
까마귀 새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다 하나님의 선하신 배려와 공급 속에 살고 있다. 시편 104:27-29,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 만물을 먹이시고 기르시고 섭리하신다.
욥기 38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우쳐주신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땅의 기초를 놓으셨다. 그는 바닷물을 주장하시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빛 자체이시고 세상의 빛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며 친히 만물과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바다 근원과 사망의 문과 땅의 넓이를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빛과 눈 곳간과 우박 창고를 아시고 동풍의 길도 아신다. 그는 폭우와 우뢰와 번개 길을 내시고 이슬방울과 얼음과 서리를 주관하신다. 그는 하늘의 별들과 별자리들을 홀로 창조하셨고 운영하신다. 그는 구름과 번개와 비를 주장하신다. 그는 사자와 까마귀 같은 모든 동물에게 먹을것을 주시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신다. 그는 자연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위엄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히 엎드려 그를 경배하며 그의 위대하심과 그의 지혜와 능력과 자비하심을 찬송하고 잠잠히 그의 섭리하심에 순응하고 그의 모든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감히 무지하게 하나님께 도전적이고 불평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엘리후가 지적했었고 이제 하나님께서 증거하시는 바와 같이, 만일 욥에게 그런 부족이 있었다면, 그는 그것을 뉘우쳐야 한다. 우리는 오직 전지 전능하신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39장: 동물 세계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
[1-2절] 산(山)염소가 새끼 치는[낳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滿朔)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산염소’라는 원어(야알레-살라)는 ‘바위의 영양(羚羊)’이라는 뜻이다. 산염소나 바위의 영양 같은 짐승은 다른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와 바위 사이 또는 동굴에 여러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고 한다. 욥은 그런 산염소나 산양, 암사슴 같은 짐승의 새끼 출산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다.
[3-4절]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그 고통(산고 産苦)을 던져버리며]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그런 짐승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고 그 출산의 고통을 던져버리며 그 새끼들은 강해지고 들판에서 자라다가 어미를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암사슴 같은 짐승은 새끼를 낳은 후 1년 정도 키우지만, 그 후 어린 사슴은 어미를 떠나 독립해 나간다고 한다.
[5-8절]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들나귀는 성읍의 지꺼리는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들나귀는 집에서 기르는 나귀와 그 성질이 다르다. 들나귀는 들이나 척박한 벌판을 거처로 삼고 자유로이 산다. 그것은 성읍 사람들의 요란한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것을 제어하려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또 그것은 여러 가지 먹을 만한 푸른 것을 찾아 산과 풀밭을 자유로이 두루 다닌다.
[9-12절]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써레=논이나 밭의 흙을 고르게 하는 도구]를 끌겠느냐?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집에서 키우는 소는 순하게 길들여져서 외양간에 매어두기도 하고 논이나 밭을 갈게도 하고 써레를 끌게도 하지만, 들소는 그렇지 않다. 들소는 사람에게 복종치 않기 때문에 외양간에 머물게 할 수도 없고 밭이나 논의 일을 위해 사용할 수도 없다. 비록 그것이 힘이 많아도, 욥은 그것을 의지하거나 그의 힘든 일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는 일이나 타작마당에 곡식을 모으는 일 같은 일들을 맡길 수 없다.
[13-18절]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타조들의 날개들은 사랑스런 날개와 깃털을 가지고 즐거이 퍼드덕거리도다](NASB).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劬勞)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괘념치[마음에 두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주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암타조는 여섯 개 내지 여덟 개의 알을 모래 위 오목한 곳에 낳고 40일 가량 버려두어 부화시키는데, 발에 깨어지거나 다른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않고 마치 자기 새끼가 아닌 것처럼 그것에 대해 무정하고 그것이 깨어져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조가 뛰어갈 때는 말 탄 자를 무시하듯이 잘 달린다. 경주마는 시속 약 72킬로미터로 달리지만, 타조는 보통 시속 64킬로미터, 최고 145킬로미터로까지 달릴 수 있다고 한다.
[19-22절]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목덜미에 난 긴 털)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카파르) [앞발로 치고] 힘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말은 힘이 좋은 짐승이다.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는 그 힘의 상징이다. 옛 시대에 말은 전쟁의 필수 도구이었다. 말은 또한 겁이 없는 짐승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협해도 움츠리지 않는다. 그의 위엄스러운 콧소리는 두렵다. 말은 골짜기에서 앞발로 치며 달리고 자기 힘을 과시하고 앞으로 전진하며 적군들을 맞아 싸운다. 그것은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않으며 칼을 만나도 물러나지 않는다.
[23-25절] 그 위에서는 전동(箭筒)(‘전통’이라고도 발음함)[화살통]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땅을 삼킬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소리 나는 대로 소소히[쓸쓸히] 울며[나팔소리 가운데 ‘힝힝’ 하고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
말은 그 위에서 화살통과 빛난 큰 창과 작은 창들이 쟁쟁하는 소리를 내며 땅을 삼킬 듯 맹렬히 성내고 나팔소리를 들어도 머물러 서지 않으며 나팔소리 가운데 ‘힝힝’[혹은 ‘하하’] 하고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26-27절]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매는 작은 것은 25cm 정도이지만, 큰 것은 66cm 정도나 되며 날개를 펴면 날개폭이 119cm나 되는 것도 있으며, 독수리는 매보다 좀더 커서 크기가 보통 80-90cm가 되고 날개폭은 약 2m가 된다고 한다. 또 독수리는 부리가 약 5cm나 되고 끝이 2.5cm 정도 아래로 굽어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로 이런 새들을 만드셨고 섭리하신다.
[28-30절]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 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
독수리는 높은 나무 위나 높은 산 절벽이나 바위 끝에 둥지를 만든다고 한다. 독수리와 매는 동물들 중에서 시력이 가장 좋은데, 매의 시력은 사람보다 약 8배나 더 좋아 하늘에서도 쥐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그것들은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짐승의 시체도 먹는다. 예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24:28; 눅 17:37).
사람은 어떤 동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매우 적고 모르는 것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친히 만드셨고 그것들의 구조와 생리를 잘 아신다. 그는 다른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들 사이나 동굴에 무리 지어 생활하는 산염소나 영양 종류나 암사슴을 만드셨고, 들이나 척박한 벌판을 거처로 삼고 자유로이 사는 들나귀와 들소도 만드셨다. 그는, 자기가 낳은 알에 대해 무정하지만 경주마보다 빠른 타조를 지으셨고 그 성질과 생리를 잘 아신다. 그는 힘있고 겁 없는 말도 만드셨다. 그는 낭떠러지에 집을 짓는 매와 독수리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다 창조하셨고 섭리하신다. 본장에 언급한 여덟 가지 동물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고 그러므로 그는 그것들을 다 잘 아신다. 그러나 욥은 그 어느 하나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욥과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주권적 섭리자이신 그 분 앞에서 우리 자신이 지식과 능력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부족한 피조물이며 또한 심히 무지하고 죄악된 존재임을 깨닫아야 하고, 겸손히 엎드려 우리의 무지와 불경건, 죄와 더러움을 고백하고 주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하나님만 높이며 그의 모든 계명을 힘써 지켜야 한다. 또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묵상
오늘의 말씀은 참으로 감격적이고 감사드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친히 욥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은 실로 위대하고 영광스럽지 않은가?
세상 어느 곳에서 이토록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을까?
더불어 인간의 나약함이 실로 드러나는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인고로 불평해서는 안된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우주를 관할하시며 지으신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나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이라는 사실에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분을 다하여야 한다 생각한다.
그리고 살아가는 순간의 한치 앞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간구하지 않겠는가?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나타나심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영으로 깨닫게 하시는 모든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만이 전능자이시므로 모든 것을 능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머리에 각인시켜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인생을 통틀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과 동일하다.
나를 내세우거나 교만하여서 어리석은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되겠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왜 하나님이신가를 너무도 잘 설명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행복하고 감사드린다. 오늘도 찬양으로 주께 영광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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