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장: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1-5절]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잇소르)[비난하는 자](BDB, KB)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칼라)[보잘것없사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욥은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듯한 말을 몇 번 했었다. 9:30-31,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13:26-27,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 16:12-13,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던져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 살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27:2,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욥을 책망하셨고, 욥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보잘것없사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6-9절]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annul)(한글 국한문의 ‘피하려느냐’는 잘못임.)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판단과 섭리가 정당함을 엄위하게 증거하셨다. 하나님의 섭리는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시다. 욥은 자기 의를 변호하려고 하나님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의로운 성도도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심히 부족하며 많은 단련이 필요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정당하다. 또 성도의 고난은 언제나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우리의 성화를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인격적으로 성숙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의 뜻이다. 고난은 우리의 지식과 인격의 성숙을 이룬다.
[10절]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華美)(하다르)[광채]를 스스로 입을지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본질적 차이를 더 느끼고 그에게 복종케 하시려고 하신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위엄과 존귀로 자신을 꾸미시고 영광과 광채를 스스로 입으셨지만(시 96: 6), 욥은 그렇게 자신을 꾸밀 수 없고 영광과 광채를 입지도 못한다.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광채는 하나님과 사람의 본질적 차이이다.
[11-14절]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바라보며]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바라보며]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노를 쏟으셔서 모든 교만한 자들을 보시며 낱낱이 낮추시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다 무덤 속에, 어둑캄캄한 곳에 묻히게 할 수 있으시지만(사 2:11, 12, 17), 사람인 욥은 교만한 자를 보고 낮출 힘이 없고 악인을 제압하거나 징벌하여 정당하게 그를 무덤에 들어가게 할 능력도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벌하는 도덕 질서가 세워지지 못하고 사람들이 고통과 탄식 속에 그런 상황을 관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불의와 불법이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실상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네가 그렇게 하지 못하니 내 앞에 순복하고 내가 너를 향해 섭리하는 일에 대해 잠잠하라”는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잠잠히 바라보아야 할 뿐인 자이다.
[15절]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시 큰 짐승인 하마를 들어 말씀하신다. ‘하마’라고 번역된 원어(베헤모스--KJV, NASB, NIV)는 옛날 학자들은 ‘코끼리’로 보았고 근래 학자들은 ‘하마(河馬)’라고 보았다(BDB, KB). 본문의 묘사는 그 둘에 어느 정도 다 맞는 것 같다. 하마와 코끼리는 육지에서는 풀을 먹지만, 물 속에서도 잘 활동하는 짐승이다.
[16-18절] 그 힘은 허리에 있고 그 세력은 배의 힘줄에 있고 그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가릿대[갈빗대]는 철장 같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짐승의 힘이 허리에 있고 그 배의 힘줄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또 그는 그것의 꼬리 치는 것이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하마의 꼬리는 보통 56센티미터이며 코끼리는 1미터라고 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것의 넓적다리 힘줄이 서로 연락되었으며 그 뼈가 놋관 같고 그 갈빗대는 철장 같다고 말씀하신다. ‘갈빗대’라는 원어(게렘)도 ‘뼈’라는 뜻이라고 한다(BDB).
[19-24절]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행하신 일들] 중에 으뜸이라. [그러나] 그것을 지은 자가 칼[아마 송곳니]을 주었고 모든 들짐승의 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식물을 내느니라. 그것이 연 줄기 아래나 갈밭 가운데나 못 속에(비차)[늪 속에] 엎드리니 연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둘렀구나. 하수가 창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지라도 자약하니(이브타크)[자신만만하니]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그 짐승이 그가 만드신 것들 중에 으뜸이며 그것에게 칼 같은 송곳니를 주셨고 모든 들짐승의 노는 산이 그것을 위하여 식물을 내며, 그것이 연 줄기 아래나 갈밭 가운데나 늪 속에 엎드리니 연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두르며, 강물이 넘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지라도 자신만만하니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신다. 하마는 몸무게가 보통 1톤(1,000kg) 이상이며, 가장 큰 것은 2.6톤이 되며, 코끼리는 보통 5톤이고 가장 큰 것은 6.6톤이 된다고 한다. 코끼리나 하마는 풀이나 땅의 식물을 먹고 강이나 늪에서 잘 지낸다. 그러나 하마는 요단강에 서식하지 않는다고 하니 본문의 묘사는 코끼리에 더 적합해 보인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은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많으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과 변론하거나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비난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제넘게 하나님과 변론하거나 그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야 하고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를 의지하고 의탁하며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모든 섭리도 그러하시며 그의 하시는 모든 일들이 선을 이룰 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마나 코끼리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알고 또한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41장: 온 천하의 것이 내 것이다
[1-2절]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본문에 ‘악어’라는 원어(리웨야산)는 고래나 악어 같은 ‘큰 바다짐승’을 가리킨다(BDB, KB). 영어성경들은 원어의 글자대로 리바이어선(leviathan)이라고 번역했다(KJV, NASB, NIV). 사람이 낚시로 악어나 고래를 낚거나 끈으로 그 혀를 매거나 줄로 그 코를 꿰거나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꿰는 것은 다 불가능한 일이다.
[3-5절] 그것이 어찌 네게 연속 간구하겠느냐? 유순한 말로 네게 이야기하겠느냐? 어찌 너와 계약하고 영영히 네 종이 되겠느냐? 네가 어찌 새를 놀리는 것같이 그것을 놀리겠으며 네 소녀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 두겠느냐?
악어는 몸체의 길이가 보통 3-4미터 정도이며 몸체의 무게는 200 내지 250킬로그램 정도라고 한다. 악어의 화석은 예전에 15미터 정도의 악어도 있었음을 보인다. 청색 고래(blue whale)는 바다 짐승 중 가장 큰 짐승으로서 길이가 30미터 정도까지 자라고 무게는 200톤(2,000킬로그램) 이상이 된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큰 바다짐승들이 사람에게 무엇을 간구하며 유순한 말로 이야기할 수 있겠으며 사람과 계약을 맺고 영영히 사람의 종이 되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새를 놀리듯이 놀리며 어린 딸들을 위해 그것을 줄에 매어 두겠는가?
[6-9절] 어찌 어부의 떼가 그것으로 상품을 삼아 상고[상인]들 가운데 나눌 수 있겠느냐? 네가 능히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로 그 머리를 찌를 수 있겠느냐? 손을 그것에게 좀 대어 보라. 싸울 일이 생각나서 다시는 아니하리라. 잡으려는 소망은 헛것이라.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낙담하지 않겠느냐?[엎드러지지 않겠느냐?]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듯이, 창이나 작살로 악어나 고래를 잡아 어(魚)시장에 내다 나누어 팔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 짐승을 잡으려 손을 대어도 그것이 대들까봐 놀라 엎드러질 것이다. 그것을 잡으려는 소망은 헛될 것이다. 그것을 보기만 해도 엎드러질 것이다.
[10-11절]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용맹이 없거든 능히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 누가 먼저 내게 주고(NASB)(히크디마니)(혹은 ‘나보다 앞서 행하여’)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악어나 고래도 제어하고 이길 용맹이 있는 자가 없거든, 하물며 그런 짐승을 만드신 하나님을 당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악어나 고래보다 더 크시고 능력이 많으신 자이시다. 그는 홀로 온 천하만물을 만드셨고 땅 위에나 하늘에나 바다 속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생물들의 소유자요 주관자이시다. 사람은 그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마땅하겠는가?
[12-28절] 내가 악어의 지체와 큰 힘과 훌륭한 구조에 대하여 잠잠치 아니하리라. 누가 그 가죽을 벗기겠으며 그 아가미 사이로 들어가겠는고? 누가 그 얼굴의 문을 열 수 있을까? 그 두루 있는 이가 두렵구나. 견고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라. 서로 연함이 봉한 것 같구나. 이것, 저것이 한데 붙었으니 바람도 그 사이로 들어가지 못하겠고 서로 연하여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광채가 발하고 그 눈은 새벽 눈꺼풀이 열림 같으며 그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뛰어나며 그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솥이 끓는 것과 갈대의 타는 것 같구나. 그 숨이 능히 숯불을 피우니 불꽃이 그 입에서 나오며 힘이 그 목에 뭉키었고[있고] 두려움이 그 앞에서 뛰는구나. 그 살의 조각들이 서로 연하고 그 몸에 견고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그 마음이 돌같이 단단하니 그 단단함이 맷돌 아랫짝 같구나.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경겁하여 창황하며[당황하며] 칼로 칠지라도 쓸데없고 창이나 살이나 작살도 소용이 없구나.
하나님께서는 또 악어 혹은 고래의 구조와 움직임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 두려운 이, 견고한 비늘, 그것의 재채기, 그 눈꺼풀, 그 입과 코의 숨결, 그 목의 힘, 그 견고한 살, 돌 같고 맷돌 아랫짝같이 단단한 그 마음을 언급하신다. 또 그는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 당황하며 창이나 살이나 작살도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27-30절] 그것이 철을 초개같이, 놋을 썩은 나무같이 여기니 살[화살]이라도 그것으로 도망하게 못하겠고 물매 돌도 그것에게는 겨같이 여기우는구나. 몽둥이도 검불같이 보고 창을 던짐을 우습게 여기며 그 배 아래는 날카로운 와륵[기와조각] 같으니 진흙 위에 타작 기계같이 자취를 내는구나.
그것은 철을 지푸라기같이, 놋을 썩은 나무같이 여기며 화살이나 물매 돌도 겨같이 여기고 몽동이도 검불같이 여긴다. 그 배 아래는 날카로운 가와조각 같아 진흙 위에 타작 기계같이 자취를 낸다.
[31-34절] 깊은 물로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로 젖는 향기름 같게 하고 자기 뒤에 광채 나는 길을 내니 사람의 보기에 바닷물이 백발 같구나. 땅 위에는 그것 같은 것이 없나니 두려움 없게 지음을 받았음이라. 모든 높은 것을 낮게 보고(라아)[보고] 모든 교만한 것의 왕이 되느니라.
그것은 깊은 물을 끓는 솥의 물 같게 하고 바다로 젖는 향기름 같게 하고 자기 뒤에 광채 나는 길을 내므로 바닷물이 백발 같다. 그것은 모든 높은 것을 두려움 없이 보며 모든 교만한 것의 왕이 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천하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11절,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주 되심과 천하만물이 다 그의 것임을 바르게 알고 깨닫고 인정하자.
둘째로,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악어나 고래보다 더 크시다. 10절,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용맹이 없거든 능히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 창조자께서는 피조물보다 그 존재와 지혜와 위엄과 능력이 더 크시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높이며 그의 계명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할 때에라도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대항하는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42장: 욥의 회개와 회복
[1-3절]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며 무엇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주권자이시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 사람은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욥은 38:2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받아 3절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라고 말했다. ‘이치’라는 원어(에차)는 ‘의논, 뜻’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 욥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도전적인 말들을 했다. 이제 그는 그런 말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잘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대해 무례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4-6절]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恨)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과거에 선조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였으나 이제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다고 고백한다. 욥이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다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듣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한다. 그는 의로운 자이었지만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순복하지 못하고 몇 번 도전적인 말을 하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그 무례한 말까지 회개하는 것이다. 욥은 그가 당한 고난과 그의 부족을 통해 보다 더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고 있었다.
[7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에게 노하셨다. 그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말이 욥의 말처럼 정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그와 그의 자녀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줄곧 말했었다. 그것은 정당한 이유 없이 욥을 정죄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 큰 죄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노하신 것이다. 또 다른 인물인 엘리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노하지 않으신 것 같다.
[8절]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숫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번제 같은 제사는 아벨 때로부터 있었다. ‘번제’는 속죄와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이었다. 욥에게 잘못된 정죄의 말을 했던 친구들은 욥에게 가서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위해 번제를 드려야 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그 사람에게 가서 푸는 것이 옳다.
[9절]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으나, 사람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벌 때문에 온다고만 알고 있었고 욥을 그릇되이 정죄하였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드린 번제를 받으셨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셨고 그 중심을 받으셨다.
[10절]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해 빌매 여호와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에게 이전의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 자신을 비방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해 빌 때 하나님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 그는 욥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을 주셨다. 물질의 복도 하나님의 복이다(창 26:12-13).
[11절]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욥이 회복되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들과 또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해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14)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다. 그것은 욥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2-15절]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暮年)[노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1만 4천과 약대 6천과 소 1천 겨리와 암나귀 1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세째[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여호와께서는 욥의 노년에 복을 주셔서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셨다. 그는 양 14,000마리와 약대 6,000마리와 소 1,000겨리[2,000마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두었다. 그의 재산은 처음 재산의 배갑절이었다. 또 그는 처음의 수만큼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고 그의 세 딸들은 전국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사람의 외적인 아름다움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욥은 그들에게 그 오라비들에게처럼 기업을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욥에게 물질적인 복과 가정적인 복을 주셨다.
[16-17절] 그 후에 욥이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그 후에 욥은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다. 욥은 장수하였다. 그가 30세쯤 결혼하였고 두 번이나 자녀를 10명 낳는데 적어도 30년쯤 지났다고 가정한다면, 욥은 200세 이상을 산 것이다. 구약의 헬라어 70인역(LXX)은 욥이 170년을 더 살았고 그의 연령이 240세이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연령을 보면, 욥은 아브라함과 이삭 때의 인물이라고 보인다.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를 살았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지식과 능력이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는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난 중에도 무례하게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의 하시는 일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적 교훈이며 중심 진리이다.
둘째로,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당하는 이웃에 대해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고난이 특정한 죄의 징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사람이 와서 사과하면 용서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용서를 비는 이웃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2).
넷째로, 하나님의 본심은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평안을 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며 의롭게, 흠과 점이 없이, 온전하게 사는 자들에게 평안과 회복과 영생을 주신다.
묵상
욥기 묵상을 마치며 40장부터 출현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창조주되심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게 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욥에게 책망하신 것처럼 나도 책망을 들을 것이다.
욥이 즉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나 역시 삶의 질곡을 넘나들며 잠깐 동안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시긴 하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욥기서를 마무리 짓는 이 말씀을 보며 하나님의 지존하시고 전능하심을 실감한다.
욥과 같이 선량하고 정직하고 의로운 자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며 하나님께서 흔쾌히 축복하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록 욥이 받은 축복만큼이 아니더라도 영적으로 더욱 강건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믿음을 행하며 살 수 있는
축복이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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