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 클래식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24 March 1681 - 25 June 1767)

헤븐드림 2021. 5. 9. 03:59

 

                                          

 

후기 바로크 시대 독일의 작곡가.

18세기 초기와 중기에 활동한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은 당시 독일 최고의 작곡가였다.

​텔레만은 바흐와 동시대인이면서 바흐와는 상이한 길을 걸은 작곡가이다.
텔레만은 바흐가 소지역 작곡가로서의 명성에 만족할 때, 전 유럽 최고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누렸다.
그의 작품 범위는 음악사에서 그 어느 누구도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며 포괄적이다.
텔레만의 작품 수는 2000여 곡에 이르며, 이는 동시대의 대표적 작곡가인 바흐와 헨델의 작품을 합한 것보다 많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음악사가들의 관심은, ‘바로크 시대’를 거쳐 지속적으로 진행된 음악의 발전 및 고전양식의 탄생에서 벗어나 바흐에게로 모아졌고, 이후 텔레만의 이름은 거의 잊혀졌다.
즉, 바흐의 작품이 18세기 전반기에 작곡된 모든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바흐와 비교된 텔레만은 ‘피상적이고, 경망스러우며, 단지 직책에 따르는 의무로서 다작을 일삼는 작곡가’라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특히 막스 슈나이더와 로맹 롤랑의 논문 발표(1910) 이후, 텔레만의 음악양식은 이후 전개되는 ‘갤런트 양식’과 ‘전(前) 고전주의’ 양식의 선구적 역할을 한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었고, 20세기 후반기에 텔레만에 대한 왜곡된 평가는 시정되었다.
두 사람은 상이한 작곡적 이상과 예술관을 지녔으므로, 단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었고, 텔레만 개인과 그의 작품이 지닌 음악사적·사회적 기능과 중요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즉, 텔레만의 작품은 ‘고전양식’의 태동기에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텔레만의 음악은 동시대 음악가였던 바흐 및 헨델의 음악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텔레만은 철저한 ‘계몽주의 작곡가’로서, 당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중산층 시민계급의 음악 향수권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 음악 개혁가였다는 평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텔레만의 오라토리오는 바로크 양식에 기초하고 있지만 전기 고전파 양식의 특징이 나타나는 진보성을 갖고 있다.

종교음악이라 해도 오페라 적인 특징이나 자신의 사상, 감정이 표현되어 있다.

바로크 적인 대위법으로 쓴 기악작품에도 기교적인 장식을 요구하지 않았고, 많은 기악작품에서 선율이 분명하고 악구가 규칙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1733년에 작곡된 하프시코드 판타지들은 초기 소나타 형식의 시초가 되었다.

텔레만은 그의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을 모두 작곡하였다.

그는 음악회의 연주회 프로그램에서도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을 함께 올림으로 전통적인 연주회의 관습을 무너뜨리고 모든 종류의 음악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음악 교육에도 관심이 깊어서 음악의 편집과 출판에도 관여하였다.

텔레만의 이러한 시도는 교회음악이나 세속음악을 음악이라는 예술의 한 분야로 귀속시켰다는 점에서 현대의 예술관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만은 바로크 시대에 있어서 진보적인 작곡가였다.

그의 이름은 바하의 그늘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지만,20세기에 들어와서 그의 음악적인 업적이 재평가되고 있다.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은 1681년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프로테스탄트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지만 실질적인 음악교육은 받은 일이 없었다.

텔레만의 가족은 딱히 음악적 배경이 없었는데, 그의 증조부는 할버슈타트에서 가수로 활동했으나 그 밖에 다른 직계 가족은 음악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텔레만의 아버지는 1685년에 사망하여, 그의 어머니가 어린 텔레만의 양육을 도맡았다.
그들은 중상류 계층에 속했으며, 교회에서 일했다.

텔레만은 10살 때 음악을 접하게 되어 소질을 드러냈는데, 12살에 처음으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텔레만의 음악적 재능을 용납하지 않았고, 직업적인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는데, 당시 음악가는 그다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직업도, 보수가 많은 직업도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음악에 몸담기를 우려하여 그의 모든 악기를 빼앗고, 그가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진로를 택하길 기대하여 1693년에는 젤러펠트의 새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그 학교의 관리인이 텔레만의 재능을 인정해준 덕분에 그는 계속 작곡을 하고 스스로 음악에 대한 지식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그가 힐데샤임의 김나지움 안드레아눔(Gymnasium Andreanum)에서 공부를 마칠 적에, 텔레만은 리코더, 오르간, 바이올린, 비올라 다 감바, 플루트, 오보에, 샬뤼모, 더블 베이스, 베이스 트롬본을 스스로 완전히 익혔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음악 양식을 접했으며, 일찍이 요한 로제뮐러와 아르칸젤로 코렐리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1701년에 텔레만은 어머니의 권유로 법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는데, 얼마 가지 않아 법률 공부보다 음악 활동에 더 치중하여 남은 생애 동안 음악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는 텔레만의 음악 활동에 디딤돌이 되었으며, 그는 도시의 두 주요 교회에서 음악을 의뢰받는다.

라이프치히시 당국은 그의 음악적 재능과는 별도로 이 젊은 음악가가 조직의 구성에 있어 엄청난 정력·재능·근면성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들은 그를 토마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인 요한 쿠나우를 도와 격주로 주일마다 연주되는 칸타타를 작곡하도록 했으며, 아울러 대학 부속 교회인 노이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주었다.
얼마 안되어 그는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40명 규모의 '콜레기움 무지쿰'을 창설하였다.

텔레만은 학생들의 음악단체인 '콜레기움 무지쿰'을 재편성하여 공공 연주회를 갖는 유용한 아마추어 관현악단으로 만들었으며, 이듬해 라이프치히 오페라단의 감독이 되어 이 오페라단을 위한 작품을 썼다.

그리고 텔레만은 두 공국 궁정에서의 직책을 가졌는데, 조라우(Sorau, 현재 폴란드의 zary)에서 궁정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있다가 아이제나흐(1708~12)에서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를 거쳐 나중에 지휘자가 되었다.

또한 연주·지휘·연구·작곡 활동을 통해 나중에 그가 프랑크푸르트암마인(1712~21)과 함부르크(1721~67)에서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활용한 음악적 지식, 실제적 경험, 작곡기법을 얻었다.

이 당시 텔레만의 명성이 높아지자 연장자인 작곡가 요한 쿠나우의 분노를 사게 되는데, 텔레만이 합창 지휘자에 임명되면서 도시의 음악 감독이던 자신의 지위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텔레만은 또한 자신의 오페라를 만들 때 많은 학생들을 이용하여 이들이 쿠나우의 교회 음악에 참가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쿠나우는 텔레만을 '오페라 음악가'라고 비난했으나, 텔레만이 이 일을 그만둔 뒤에도 쿠나우는 자신이 오페라에서 잃었던 성과를 되찾지 못했다.

 

당시 조라우의 에르트만 폰 프롬니츠 백작은 프랑스 음악의 열렬한 애호가였는데, 그가 륄리(J. B. Lully)를 비롯한 많은 프랑스 작곡가들의 곡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텔레만은 조라우 시절에 프랑스 음악에 대한 지식의 폭을 넓힐 기회를 얻었다.

그 영향으로 작곡된 것이 관현악 모음곡 200여 곡이다.

당대의 저명 음악평론가였던 샤이베는 텔레만의 이 음악을 “프랑스 음악양식으로 작곡된 것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이며,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음악”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이 시절 텔레만은 폴란드의 민속음악을 접할 기회도 갖게 되어, 그 음악적 요소들을 기악 작품에 접합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교회음악·실내악·오페라 양식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텔레만이 폴란드·프랑스·이탈리아의 음악양식이 갖는 여러 가지 장점들을 혼합하고 독일 양식 특유의 장점과 결합하여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로 소화해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텔레만의 악풍은 독일 양식의 근본적이면서 짜임새 있는 화성, 이탈리아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성, 프랑스 음악의 다양한 형식, 그리고 폴란드 민속음악의 율동적이고 원시적인 생동감을 하나로 결합한 개성적 스타일과 독특한 아이디어로 특징지어진다.
또한 관현악 편성기법 및 색채감의 표현도 동시대 작곡가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샤이베는 이러한 텔레만의 음악을 ‘혼합 취향(Vermischter gôut)’이라고 부르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훗날 크반츠(J. Quantz)는 이러한 음악양식이 바로 ‘독일의 취향’이라고 명명하였다.

1729년, 텔레만은 러시아 궁정에 독일 관현악단을 조직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으며, 그 이전1722년 쿠나우에 이어 토마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와 달라는 라이프치히 시 당국의 제안도 거절했다.

이 자리가 이미 17년 전에 쿠나우가 죽을 경우 그가 계승하도록 시 당국과 약속되어 있었다는 것은 젊은 텔레만의 높은 명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가 거절한 이 직위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 돌아갔다.

함부르크에서의 모든 활동 외에도 계약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시는 물론 아이제나흐와 바이로이트 궁정을 위한 음악도 작곡했으며 계속 자신의 작품을 출판했다.

텔레만는 악보집 출간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주도했고, 음악애호가들을 위해 그 자신이 수많은 실내악곡들을 작곡하여 출간했다.
텔레만은 믿기 어려운 작업량으로 1715년부터 44권의 악보집을 출간함으로써 일반대중에게 그의 음악을 소개했다.
이러한 시도는 텔레만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텔레만은 동시대의 주도적 위치에 있던 음악가들과는 달리 음악가 출신 가문의 태생이 아니었고, 음악연주를 주요 과제로 삼는 유명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텔레만은 동시대 음악의 주요 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텔레만은 음악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당시 유명한 궁중이나 대도시에서 연주되었던 음악을 얼마나 어렵게 접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텔레만은 자신의 출판동기에 대해 “인간은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산다”라고 말했다.

 

텔레만의 악보 출간은 당시 독일에서 서서히 확대되어가는 시민들의 음악실습을 위한 결정적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텔레만의 계획을 실행해줄 출판업자가 프랑크푸르트나 함부르크에 없었기 때문에, 작곡가 텔레만은 자신이 출판업자로 나서는 1인 2역을 하게 된다.

그의 악보집 출간은 텔레만의 명성을 독일 전역뿐 아니라 전 유럽으로 확산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1733년에 발표된 <테이블 음악, Musique de Table>과 파리 체류 기간이었던 1738년에 발간된 <4중주곡, Nouveaux Quatuors>의 예약자 명단에 전 유럽의 유명 음악인들을 비롯해 수많은 귀족계급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텔레만에 대한 전 유럽적 관심을 증명해주는 단적인 예이다.

한편, 악보집 출간 이면에는 출판업자들의 횡포에 맞서는 텔레만의 고된 노력이 숨어 있다.
당시 출판업자들은 악보와 대본을 무단으로 인쇄하여 판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출판업자들의 해적행위에 대항하는 텔레만의 노력은 거의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을 상대로 벌인 텔레만의 법률적 행위는 훗날 전개되는 독일의 저작권법 설립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18세기에 살았던 그의 동시대인들의 눈에는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은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였다.

비평가 요한 마테존은 그에 대해 언급하기를 "코렐리와 장 바티스트 륄리는 단지 명예를 얻었지만 텔레만은 모든 찬사 위에 있다"고 했다.

공공 연주회를 통해 텔레만은 이전에는 궁정이나 귀족 또는 제한된 수의 시민들을 위해 존재했던 음악을 일반대중들에게 소개했다.

악보로 출판된 방대한 작품들은 독일 전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관현악단들, 여러 부류의 아마추어와 전문 음악가들에게 기악적·성악적 자료를 제공했다.

텔레만의 음악은 자연스러운 선율, 대담한 화성, 쾌활한 리듬이 특징이며 악기 편성 또한 나무랄 데가 없다.

심오한가 하면 기지에 차 있고 가벼운가 하면 진지하며 결코 다양성을 잃지 않고 있다.

출판된 작품 가운데는 유명한 선곡집 <테이블곡, Musique de Table>(1733 출판, 관현악 모음곡 3곡, 협주곡 3곡, 4중주 3곡, 3중주 3곡, 소나타 3곡 포함), 최초의 음악 정기 간행물인 <충실한 음악거장, Der getreue Music-Meister>(1728~29, 70곡 포함), <조화로운 예배의식, Der harmonische Gottesdienst>(1725~26, 72곡의 교회 칸타타), 하프시코드를 위한 판타지아 36곡이 있다.

대표작품으로 칸타타 <음악에 의한 예배>, 오라토리오 <심판의 날>, 세속 칸타타 <이노, Ino>, 기악곡 <타펠 무지크>, 오페라 <핌피노네, Pimpinone>, 관현악곡 작품으로 <물의 음악>, <돈 키호테> 등이 있으며 이외에 수난곡 46곡, 교회칸타타 107곡, 오페라 40곡, 실내악곡 350곡, 협주곡 120곡, 관현악곡 140곡이 있다.

텔레만은 그를 열광적으로 맞아주었던 프랑스를 잠시 여행(1737~38)한 것을 제외하고 결코 독일을 떠난 일이 없었다.

대략 1740년부터 텔레만의 이론적인 논문을 쓰는 데 더욱 주력하면서 그의 성과는 줄어들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란츠 벤다나 그의 대자(代子)였던 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와 같은 몇몇 젊은 작곡가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1755년 그의 장남 안드레아스가 죽은 뒤, 텔레만은 그의 손자인 게오프크 미카엘 텔레만을 양육할 책임을 지게 되었고, 미래의 이 작곡가에게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의 여러 종교적인 오라토리오는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이후 텔레만은 시력이 나빠져서 1762년에 이르면 창작이 줄어들게 되는데 그러나 이 작곡가는 1767년 6월 25일 죽는 날까지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2번의 결혼을 통해 8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다.

첫번째 부인은 출산하다 젊은 나이로 죽었고, 2번째 부인은 그에게 3,000달러의 빚을 남긴 채 스웨덴 장교와 달아났다.

텔레만은 다작하는 작곡가이면서 예리한 문필가이기도 했으며 1718, 1739년에 나온 2권의 자서전은 비교적 사실을 잘 기록한 책이다.

첫번째 아내가 죽자 그는 긴 시를 출판했으며 그의 성악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그가 직접 쓴 가사가 붙어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그의 음악 선곡집에 쓴 서문인데 거기에는 그의 음악(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은 물론)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대한 분량의 실제적인 충고가 포함되어 있다.

바흐와 헨델의 친구였던 그는 바흐의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의 대부이기도 했는데, 카를 필리프 에마뉴엘 바흐는 텔레만이 86세의 나이로 죽은 후 함부르크의 음악감독직을 이어 받았다.

텔레만이 죽은 후,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새로운 음악 양식이 옛 것을 대체했다.

그리고 바흐와 헨델의 음악이 재평가되었던 19세기에도 텔레만의 명성은 다작가이기는 하지만 실속 없는 3류 작곡가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역사적·미학적으로 보다 정확한 견해가 성립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막스 슈나이더와 로맹 롤랑의 연구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1930년대 이래 그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판들이 출판되면서 연주자, 지휘자, 음악 출판업자들의 관심이 점차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