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 클래식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Henryk Wieniawski

헤븐드림 2021. 5. 6. 04:22
  • 주요역할 작곡
  • 국가 Poland
  • 성별 남자
  • 출생/결성 1835-07-10 Lublin, Poland
  • 사망/해체 1880-03-31 Moscow, Russia
  • 활동시기 Romantic

바이오그라피

루블린에서 태어난 폴란드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8세로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마사르에게 사사하여, 1846년에 바이올린의 1등상을 받고, 같은 해부터 폴란드의 연주 여행에 올라, 1848년에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하고, 1849~50년에 다시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콜레 밑에서 작곡을 배웠다. 그 뒤 피아니스트였던 동생인 요제프와 함께 유렵 각지를 연주 여행하여 명성을 얻고, 1860년에 러시아 황제 전속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초청되어, 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이 곳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1872년 대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슈타인과 함께 미국에 연주 여행하여 공전의 성공올 거두었다. 1874에는 비외탕의 뒤를 이어 브뤼셀 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수가 되었으나, 77년에 사임한 뒤도 연주 여행을 중단하지 않았지만, 건강을 해쳐 모스크바에서 타계했다.

비에니아프스키는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었던 당시, 루블린주 루블린 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1847년에《Grand Caprice Fantastique》 작품번호 1을 출판했다. 총 24개 작품이 출판되었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이사벨라 햄프턴과 약혼했지만, 이를 이사벨라의 부모가 반대하자 《Légende》 작품번호 17을 썼고, 그것으로 부모의 마음을 돌려놓아 1860년 결혼했다.

 

1860년 안톤 루빈슈타인의 초청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1872년까지 살았다. 그곳에 있는 Russian Musical Society에서 그는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오케스트라와 현악 사중주 활동을 했다.

 

1872년부터 1874년까지 비에니아프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과 함께 미국을 여행했다. 1875년에는 브뤼셀에 있는 콘소바토리에서 앙리 비외탕의 후임으로 바이올린 교수를 지냈다. 몇 해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콘서트를 몇 년간 가지지 못했다. 1879년 4월 오데사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갖고 이듬해에 사망했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여겨지고 있다.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포함해서 그의 작품은 어려운 기교를 가지고 있어 바이올린 레퍼토리로서 많이 연주되고 있다. 그는 사후에 얻은 명성이 많다. 1952년과 1957년, 폴란드 우편 직인에는 그의 얼굴이 도안되었다. 1979년 주화된 100 즈워티 동전에는 그의 얼굴이 있다. 체코브카 강에 있는 한 도시에는 비에니아프스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흔히 ‘Russian bow grip’이라고 불리는 기법은 ‘Wieniawski bow grip’이 더 올바른 이름이다. 이는 비에니아프스키가 그의 학생들에게 악마의 트릴을 연주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지도했던 기법이기 때문이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콘서트 순회 중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그의 시신은 바르샤바의 포와즈키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첫회의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콩쿨이 1935년 바르샤바에서 열렸고, 1952년부터 5년마다 국제 콩쿨이 열리고 있다

 

그의 독특한 바이올린 운궁법은 프랑스, 벨기에 일파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작품에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을 비롯하여 유명한 소품 여러 곡, 바이올린 곡 다수를 남겼는데, 폴란드의 국민성을 아름답게 노래 부른 것이었다. 그는 또 속칭 ‘바이올린의 쇼팽’이라고도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