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린카는 1804년 러시아 스몰렌스크 출생입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많은 음악적 혜택을 누렸죠. 열세살인 1807년에는 페테르부르크 귀족학교에 입학, 유명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존 필드(John Field)에게 피아노를 배웁니다.
이후 5년 정도 체신부 관리 생활을 한 글린카는 1823년부터 완전히 작곡가로 전업합니다. 1830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고 들은 글린카는, 1834년 지그프리드 데인(Siegfried Dehn)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가극 작곡가로서의 사명을 느낍니다. 러시아인에게 러시아만의 가극이 필요하다는 걸 깨우치죠.
귀국 후 글린카는 고골리, 푸시킨 등과 함께 국민 음악 운동에 나섭니다. 서른 두 살이던 1836년, 폴란드 침입군에 대한 이반 스사닌(Ivan Susanin)의 애국적 이야기를 다룬 ‘황제에게 바친 목숨’을, 42년엔 ‘루슬란과 루드밀라’를 만듭니다. ‘황제에게 바친 목숨’은 절반의 성공은 거두지만, ‘루슬란과 루드밀라’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습니다. 리스트나 베를리오즈 등 식견 있는 음악인들은 호평 일색이었지만, 대중들의 평가는 싸늘하기만 했습니다.
이후 글린카는 다시 여행에 나섭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을 돌며 민족음악을 공부하죠. 이 여행에서 다시금 많은 걸 배운 글린카는 귀국 후 바르샤바에 정착, ‘카라니스키야’, ‘마드리드 여름밤의 추억’ 등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당국은 극단적 문화탄압정책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의 작품도 별로 상연되지 못합니다. 이후 건강상태가 계속 나빠진 글린카는 1857년 떠난 베를린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글린카는 러시아 고전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러시아의 국민 가극을 완성해 음악 세계에 커다란 공헌을 남기죠.. ‘러시아 5인조’라고 불리는 무소륵스키, 보로딘 등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그가 정립한 국민음악의 전통은 많은 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차이콥스키에 계승돼 러시아 음악의 국격을 높였고, 체코나 헝가리 등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비록 진가를 인정받은 건 타계한 후였지만, 국제적 영향력을 끼친 최초의 러시아 음악가로 평가받으며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글린카의 쓸쓸한 죽음이 현재의 명성으로 조금이나마 위로되길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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