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큐티

예레미아애가 3장-5장

헤븐드림 2021. 4. 29. 03:41

 

3장: 선지자의 고통과 소망

 

1-33절, 진노 중에도 소망이 있음

[1-3절]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자는 내로다. [그는]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

유다 백성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진노의 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흑암 중에 행하도록 이끄셨다. 광명은 기쁨과 행복을 가리키고, 흑암은 슬픔과 불행을 가리킨다. 그들이 현재 처한 상황은 흑암이다. 슬픔과 고통, 불행과 죽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징계의 손을 유다 백성을 향해 펴시고 종일토록 거듭 징벌하셨다.

[4-6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부수셨고] 담즙[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셨고 그들의 뼈를 부수셨다. 유다 백성은 그 전쟁 중에 먹지도 못하고 마음을 쓰고 매 맞고 넘어짐으로 온 몸이 상하고 찢기고 뼈가 부서지고 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수고로 그들을 둘러싸셨고 그들로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고통과 불행에 가득히 에워싸이게 하셨다.

[7-9절]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사 내 첩경을 굽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둘러싸서 그들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 군인들의 감시 아래 감금되어 자유가 없었고 도피할 곳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구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셨고 그 기도를 물리치셨다. 그는 그들이 그 국가적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의논하고 세운 계획들을 막으셨고 그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하셨다.

[10-13절] 저는 내게 대하여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의 사자 같으사 나의 길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로 적막하게 하셨도다.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전동(箭筩)[화살통]의 살로 내 허리(킬레요사이)[나의 콩팥]를 맞추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의 사자같이 그들을 위협하여 곁길로 가게 하셨고 그들의 몸을 찢으셨고 그들로 적막하게, 쓸쓸하고 비참하게 만드셨다. 또 그는 숙련된 궁수처럼 활을 당기고 과녁을 맞추듯이 그들의 내장을 맞추셨다.

[14절]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 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을 당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지자 예레미야를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15-18절]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조약돌로 내 이를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유다 백성은 고통으로 배불렀고 그들의 이는 꺾였고 그들의 몸은 재로 더러워졌다. 평안과 형통의 복은, 잊혀진 옛 이야기가 되었다. 그들은 힘과 소망을 잃었고 낙심과 절망만 있었다.

[19-23절] 내 고초와 재난(마루)[안정 없음](BDB, NASB, NIV)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징벌로 큰 고난을 당하고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다. 그것은 쑥과 담즙같이 그들의 심령에 쓴 고통이며 또 이런 고통 중에 그들은 낙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망할 만한 큰 고난 중에도 소망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 소망이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중요한 진리이다. 죄로 인해 회복 불가능하게 된 죄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다. 또 이 소망은 그의 크신 성실하심에 근거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에 근거하고 그의 성실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날마다, 아침마다 새롭다.

[24-26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는 남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경건한 고백이다. 땅의 것을 재산과 기업으로 삼는 자는 땅이 불탈 때 그의 소망이 땅과 함께 사라질 것이지만, 하나님을 재산과 기업과 복으로 삼는 자는 그 소망과 영광이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참 소망이 되신다. 그는 우리의 기쁨과 힘과 위로가 되신다. 또 그는 그를 기다리며 구하는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고 의지하며 소망하는 자에게 선과 복을 베푸신다. 시편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7-30절]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유다 백성은 지금 하나님의 징벌로 큰 고난 가운데 있다. 그러나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단련을 받아서 거룩하고 온전한 인격이 되어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당하는 고난의 멍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메우신 것이니 잠잠히 또 입을 티끌에 대듯이 겸손히 하나님 앞에 굴복하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좋다.

[31-33절]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고난 받는 유다 백성이 소망 중에 인내하며 대처할 수 있는 이유는, 주께서 그들을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들을 근심케 하셨지만 그의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주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고생케 하시거나 근심케 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택자들을 향해 크신 자비와 긍휼을 가지고 계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하자. 죄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고 또 고난과 불행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죄 짓지 않는 것은 최상의 길이다. 의로운 삶은 충만한 평안을 가져오며(사 48:18) 몸의 건강까지도 보장된다(잠 3:7-8).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자. 이스라엘 백성은 죄 때문에 큰 징벌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본심은 그들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니다. 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모든 좋은 것을 주신다. 평안과 행복은 본래 사람을 위해 예비된 바이다. 죄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고 상실되었으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죄와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다(롬 3:23-24).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야 한다. 21-22절,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6절,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을 달게 받으며 잠잠히 긍휼의 하나님만 바라고 죽는 날까지 의와 선을 힘써 행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본분이며 승리의 길이다.

 

34-66절,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함

[34-36절]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께서는 갇힌 자를 학대함과 불의한 재판을 미워하신다.

[37-39절]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유다 백성에게 임한 재앙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 즉 주권자이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그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의 일들이다. 사람의 복과 재앙이 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이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원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통치자시며 사람은 자기의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40-41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살피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또 유다 백성들은 마음과 손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어야 한다. 마음과 손을 든다는 말은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를 말한다.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하나님께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를 올릴 것이다. 유다 나라의 소망은 오직 참된 회개와 간절한 기도에 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그 나라는 다시 세워지지 못할 것이다.

[42-43절]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窘逐)하시며 살륙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유다 나라의 멸망의 원인은 그들의 범죄함과 패역함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용서치 않으셨고 진노하여 그들을 내쫓으셨고 죽이셨고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 죄가 죽음과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죄가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이었다.

[44-47절]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열방 가운데서 진개(塵芥)(세키)[쓰레기, 찌꺼기](BDB)와 폐물을 삼으셨으므로 우리의 모든 대적이 우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두려움과 함정과 잔해와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우심으로 그들의 기도는 그 앞에 상달치 못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날에 그를 찾지 않다가 징벌과 환난의 날에 그를 찾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열방 중에 쓰레기와 같이 여기셨다. 대적들은 그들을 조롱하고 멸시하였고 두려움과 멸망이 그들에게 임했다.

[48-51절]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의 참혹한 재앙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흘렀고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그는 하늘에 계신 주권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렸다.

[52-54절] 무고히 나의 대적이 된 자가 나를 새와 같이 심히 쫓도다. 저희가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물이 내 머리에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예레미야는 백성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 같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 군인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나 그들은 까닭 없이 독수리가 먹이를 쫓듯이 심히 쫓았다. 유다 백성은 고난의 깊은 구덩이에 던지웠고 물이 머리에 넘친 것과 같았다. 그들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55-56절]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

절망적 상황에서 주권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성도만의 특권이다. 또 그것은 모든 어려운 문제의 해결책이기도 하다. 유다 백성은 과거에 하나님의 응답을 여러 번 체험했다. 그런 체험에 근거하여 그는 현재의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

[57-59절]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송사들을 변호하셨고]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伸寃)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도 응답의 첫 단계는 마음의 평안이다. 구체적인 응답은 그 다음에 온다. 예레미야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갚아주셨고 현재의 억울한 형편도 감찰하심을 확신한다. 과거의 체험은 현재의 지침이 된다. 과거에 공의로 섭리하신 하나님께서는 현재도 모든 일을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 분명하다.

[60-63절] 저희가 내게 보수(報讐)하며 나를 모해(마카솨바)[해치려 계획]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 여호와여, 저희가 나를 훼파[훼방](국한문 개역성경)하며 나를 모해[해치려 계획]하는 것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과 종일 모해[해치려 계획]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 저희가 앉든지 서든지 나를 노래하는 것을 주여, 보옵소서.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위를 다 감찰하시고 들으시며 공의로 보응하신다. 그는 악한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백성을 향해 원수를 갚고 해치려는 악한 계획들을 한 것을 다 감찰하셨고 그들이 유다를 비방하는 악한 말들을 다 들으셨고 다 보셨다.

[64-66절] 여호와여, 주께서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사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 저주를 더하시며 진노로 저희를 군축(窘逐)하사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시리이다.

원문은 네 개의 명령형 동사(미완료시제 단축형)로 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다 기도의 내용들이다. 첫째는, ‘보응하소서’라는 말이다.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소서.”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전 12:14; 시 1:6; 롬 2:6-8; 계 20:12).

둘째는, ‘주소서’라는 말이다.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 저주를 더하소서.” 직역하면, “그들에게 마음의 강퍅함을, 그들에게 저주를 주소서.” 완고함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며 징벌이다. 강퍅함과 완고함을 가진 자는 결코 회개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이다.

셋째는, ‘쫓아내소서’라는 말이다. “저희를 진노로 쫓아내소서.”

넷째는, ‘멸하소서’라는 말이다. “저희를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소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악인들의 영원한 징벌과 멸망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자. 37-38절,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경건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40-41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유다의 멸망은 그들의 범죄함과 패역함 때문에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진리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불경건과 부도덕의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자. 55절,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9절,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옵소서.” 성도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시편 46:1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말했다.

 

 

 

 

4장: 예루살렘 거민을 낮추심

 

 

1-12절, 거름더미를 안았음

 

[1-2절]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으며 성소의 돌이 각 거리 머리에 쏟아졌는고.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와 정금에 비할러니 어찌 그리 토기장이의 만든 질항아리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했다는 말은 예루살렘 성의 낮아진 형편을 묘사한다. 전에는 정금과 같았으나 지금은 빛을 잃은 정금이 되었다. 마치 정금이 빛을 잃고 정금 아닌 물질로 변질된 것처럼, 예루살렘 성은 비천한 상태에 떨어졌다. 성소의 돌들은 길거리에 쏟아지고 버려졌다. 전에 정금같이 보배로웠던 시온의 아들들은 이제는 토기장이가 만든 질그릇같이 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김을 받았다.

[3-5절] 들개는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 같도다.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진수를 먹던 자가 거리에 외로움이여, 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운 자가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들개들’(탄닌)은 여우와 이리 중간쯤 되는 짐승인 ‘재칼들’을 가리킨다고 한다(BDB, NASB). 사나운 짐승인 재칼들도 자기 새끼에게는 젖을 먹이지만, 유다 백성은 짐승보다 더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같이 자기 자식을 돌보지 않는다. 젖 먹는 아기는 젖을 먹지 못해 목이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고 어린아이들은 먹을 빵을 구하나 떼어 줄 자가 없었다. 맛있는 음식만 골라 먹던 아이들은 이제 거리에서 처량하였고,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우던 자들은 이제 천한 자같이 거름더미를 안았다. ‘거름더미를 안았다’는 말은 그들의 비천해짐을 잘 보인다.

[6절]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무너지더니 이제 처녀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중하도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그들의 죄는 옛날의 소돔 성의 죄악보다 더 무거웠다. 옛날에 소돔 성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순식간에 멸망했듯이, 예루살렘 성과 유다 나라는 하나님의 징벌로 처참하게 멸망하였다. 예루살렘의 처참한 멸망의 원인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고, 바로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7-8절] 전에는 존귀한 자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보다 붉어 그 윤택함이 마광한 청옥 같더니 이제는 그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 가죽이 뼈에 붙어 막대기같이 말랐으니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도다.

‘존귀한 자’라는 말(네지레하)은 ‘그들의 성별된 자들’이라는 뜻인데(BDB, NASB)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들을 가리키든지(KJV) 그들의 방백들을 가리킬 것이다(NIV). ‘산호’(NASB)라는 말은 ‘홍옥’(KJV, NIV)이라고도 번역된다. 유다 나라의 성별된 자들 혹은 방백들은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우유보다 희며 홍옥보다 붉고 윤택함이 광나는 청옥 같았으나, 이제는 얼굴이 숯보다 더 검게 되었고 거리에서 알아볼 자가 없으며(원문 순서) 그 가죽이 뼈에 붙었고 몸이 막대기같이 말랐다.

[9-10절] 칼에 죽은 자가 주려 죽은 자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이들이 찔림같이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처녀 내 백성의 멸망할 때에 자비한 부녀[여인들이]가 손으로 자기 자녀를[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식물을 삼았도다.

굶어 죽어가는 자들의 모습이 처참하기 때문에, 선지자는 차라리 칼에 죽은 자들이 굶어 죽은 자보다 낫다고 말한다. 예루살렘 멸망의 가장 처참한 모습은 그 거민들이 너무 굶주려 평소에 인자하던 여인들이 손으로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은 일이었다. 그것은 이미 2:20에서도 말한 사실이었다: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원문은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 그러하였음을 암시하기를, ‘여인들’이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다고 증거한다.

이것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그 명령을 행치 않고 그것을 멸시하고 싫어하고 그 언약을 배반할 때 내려질 것이라고 경고된 바이다. 레위기 26:29,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신명기 28:53,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11-12절]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피우사 그 지대를 사르셨도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 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불을 피우셨고 그 기초를 삼키셨다(원문의 뜻). 원수들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그 성을 비참하게 멸망시키리라고는 세상의 열왕들과 백성들은 믿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상상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하나님께서는 일반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으시고 예언된 징벌을 그들에게 내리셨다. 예루살렘 성은 처참하게, 비극적이게 멸망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죄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며 죄를 회개하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모든 행복의 시작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사람이 죄성 있는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짓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멀리하고 죄 짓지 않기 위해 힘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반드시 벌하신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

셋째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 즉시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결코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우리는 깨달은 죄를 즉시 회개하기를 힘써야 한다.

 

13-22절, 지도자들의 죄 때문에

[13절]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

유다 나라의 멸망은 백성의 죄악 때문일 뿐 아니라, 또한 지도자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실상, 지도자들의 죄악이 더 중요하다. 한 사회는 그 지도자가 어떤 자인가에 따라 그 평안의 여부에 차이가 난다. 유다 지도자들인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성읍 중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리는 가증한 죄를 범했다. 의와 진리를 선포하고 공의를 시행해야 할 자들이 의인들의 피를 흘리고 악인들의 악을 용납한 것이다.

[14-15절] 저희가 거리에서 소경같이 방황함이여, 그 옷이 피에 더러웠으므로 사람이 만질 수 없도다. 사람이 저희에게 외쳐 이르기를 부정하다, 가라, 가라,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저희가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이 이르기를 저희가 다시는 여기 거하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저희’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소경같이 방황했다. 실상 그들은 영적 소경이었다. 그들의 옷은 피에 더러워져서 사람이 만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병 환자에게 ‘부정하다’고 외치며 진 밖으로 나가 살게 했듯이(레 13:45-46), 그들은 다 부정한 자같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방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며 이 땅에 다시 거하지 못할 것이다.

[16절] 여호와께서 노하여 흩으시고 다시 권고치 아니하시리니 저희가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여호와께서 노하여’라는 원어(프네 여호와)는 ‘여호와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얼굴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흩으시고 다시 돌아보지 않으실 것이다. ‘권고하다’는 원어(힙비트)는 ‘쳐다보다, 존중하다’는 뜻이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나라들과 달리 사랑하셨고 주목하며 귀히 여기셨으나(신 11:12),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는 지금 진노의 얼굴을 그들에게 향하셨다. 본절 후반부의 ‘저희’는 유다의 원수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유다의 존귀한 지도자들, 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높이거나 대접하지 않을 것이다. 바르게 행하며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지도자들은 존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지만, 악을 행하며 백성으로 화를 당케 하는 자들은 모욕을 당할 것이다.

[17-20절]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저희가 우리 자취를 엿보니 우리가 거리에 행할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이 다하였고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도다. 우리를 쫓는 자가 공중의 독수리보다 빠름이여, 산꼭대기에서도 쫓고 광야에도 매복하였도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을 구원치 못할 나라 곧 애굽을 바라보고 헛된 도움을 기대했다. 그러나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을 때, 애굽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그들의 멸망을 막아주지 못했다. 그들의 외교적 노력과 군사대국과의 동맹이 무용지물이었다.

원수들은 유다 백성을 가까이서 엿보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예루살렘 거민들을 관측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멸망 곧 유다의 멸망이 가까웠고 그 마지막 날이 이르렀다. 그들을 쫓는 바벨론 군대는 공중의 독수리보다 빨라서 유다 백성은 산꼭대기로도 광야로도 도망칠 수 없고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20절의 ‘우리의 콧김’은 ‘우리의 코의 호흡’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 곧 왕을 가리켰다고 본다. 유다 멸망 때의 왕은 시드기야이었다. 유다 백성은 그 왕이 그들을 잘 다스려 열국 가운데서 평안하게 살 줄로 생각했으나, 그는 원수들의 함정에 빠졌고 사로잡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헛된 소망과 기대, 헛된 의지물을 다 파하셨다. 애굽 나라도 그들의 왕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닌 모든 인간적 소망과 의지물은 다 헛되었다.

[21-22절] 우스 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무나. [그러나](NASB)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그러나](NASB) 처녀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에돔은 우스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표현된다. 이 ‘우스’는 욥의 고향인 우스(욥 1:1)와 같은 지역일 것이다. 에돔 사람들은 멸망하는 유다를 보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제 에돔에 대해 비꼬며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무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에돔이 슬퍼해야 할 소식을 전하고 있다. 에돔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돔 사람들의 죄악을 벌하시며 그들의 허물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나 반면 그는 유다 백성에게는 그들의 죄의 형벌이 끝나고 다시는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없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다와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라는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망과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열국을 공의로 섭리하신다. 그는 자기 백성 유다라도 범죄할 때 혹독하게 징벌하셨다. 유다의 멸망을 비웃고 기뻐하던 에돔은 장차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유다는 때가 되면 회복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로 진행되고 성취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계 역사의 진행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섭리자 하나님만 바라보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 있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진행된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암울하게 보이는 일들까지도 섭리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신다. 개인의 일도, 교회의 일도, 국가의 일도, 세계의 일도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삼위일체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고 섬겨야 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헛된 소망을 버리자. 하나님 없이 가진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가진 모든 인간적 소망은 헛되다. 불경건은 가장 근본적 죄악이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의 소망도 하나님께 있다. 국가의 안전은 정치 외교나 경제나 군사력에 있지 않다. 각종 미사일이나 이지스함이나 F-35 전투기 같은 최첨단 무기들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나 한미동맹을 견고히 하는 것이 나라의 평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는 모든 소망과 의지물은 실상 다 헛되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한 나라를 지키지 않으신다. 현세의 평안과 형통, 미래의 영생과 천국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다. 시편 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경건하게 살고 의와 선을 행하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섭리하신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살고 의와 선을 행하는 자는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다(창 5:22). 창세기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 앞에 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경건이다. 또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의롭고 선한 행실로 증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오직 신구약성경에 증거된 그의 모든 명령과 교훈을 힘써 지키고 행해야 한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5장: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함

[1-5절] 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옵소서. 우리 기업이 외인에게, 우리 집들도 외인에게 돌아갔나이다.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이오며 우리 어미는 과부 같으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 우리를 쫓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곤비하여 쉴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는 유다 나라와 예루살렘 성의 멸망으로 인해 당한 비극적 상황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기를 구한다. 그 모든 불행에 대해 그에게 탄원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그들에게 남은 소망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땅과 집들은 다 외인들에게로 돌아갔다. 각 가정은 자녀들과 여자들을 보호하고 책임져줄 자들이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며 그들의 어머니는 과부 같았다. 그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돈을 주어야 하였고 땔감을 얻기 위해 값을 주어야 했다. 기본적 식생활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을 쫓는 자들은 그들의 목을 눌렀고 그들은 피곤하며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6절]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악수한다’는 원어는 ‘손을 준다’는 말로 상대에게 충성을 맹세하거나 복종하겠다는 뜻이라고 보인다. 역대상 29:24, “모든 방백과 용사와 다윗 왕의 여러 아들이 솔로몬 왕에게 복종하니[손을 주니].” 에스라 10:19, “저희가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손을 주며] 그 아내를 보내기로 하고.” 유다 사람들은 배불리 양식을 얻기 위해 애굽 사람들과 앗수르 사람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복종하였다.

[7-8절]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종들이 우리를 관할함이여, 그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선조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다고 말한다. 선조들이 범죄했고 지금 다 죽고 없어졌고 그 자녀들은 그 선조들의 죗값을 받고 있다. 사람이 지은 죄의 값은 자신이나 자녀들이 반드시 받아야 한다. 바벨론 나라의 종들은 유다 백성을 다스렸다. 유다 백성은 온갖 학대를 당했으나,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어줄 자가 아무도 없었다.

[9-11절]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주림의 열기로 인하여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탔나이다]. 대적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광야에는 바벨론 군인들의 칼이 있기 때문에 양식을 얻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러 날 먹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피부는 아궁이처럼 탔다. ‘검다’는 원어(카마르)는 ‘달아오르다’는 뜻이다(BDB, NASB, NIV). 또 대적자들은 시온에서 부녀자들을, 유다 각 성에서 처녀들을 학대하고 욕보였다. 전쟁의 결과는 비참했다. 거기에는 사람의 기본적 도덕성도, 양심도, 인정도 없었다.

[12-14절] 방백들의 손이 매어달리며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소년들이 맷돌을 지오며[돌리오며] 아이들이 섶을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노인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소년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방백들은 손이 매어달리기까지 했고 장로들의 얼굴은 존경을 받지 못했다. 이전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자들이 이제는 모욕과 부끄러움을 당했다. 이전에 그렇게 힘든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어린 소년들이 무거운 맷돌을 돌렸고 어린아이들은 땔감을 지다가 힘들어 엎드러졌다. 노인들은 이전처럼 성문에 앉아 담소하거나 성안의 재판사건을 처리하는 일을 하지 못했고 소년들은 이전처럼 즐거운 노래를 부르지 못하였다.

[15-18절] 우리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우리의 무도(舞蹈)[춤]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 우리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시온산이 황무하여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

그들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그쳤고 춤이 애통으로 변하였다. 그들의 머리에서 아름다운 면류관이 땅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떠났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비극적 현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왔다고 말한다. 불행은 죄 때문에 온다. 그것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마찬가지이다. 죄의 결과로, 그들의 마음은 피곤하였고 그들의 눈은 어두웠으며 시온산은 황무해져서 사람들이 거하는 대신에 여우들이 뛰노는 곳으로 변하였다.

[19-20절]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며 그의 영원하심과 그의 영원한 통치자 되심(NASB, NIV)을 고백한다. 시편 9:7,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영원히 잊으시고 버리실 것인지 질문한다. 사람들은 현재의 비극적 징벌과 재앙으로 낙심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때에도 진행되고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있다.

[21-22절]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만일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지 않으시다면](NASB, NIV).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기도는 사람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해져 있음과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본서의 핵심적 진리를 증거한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증거했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 구원의 전적 은혜성은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을 통하여 밝히 증거되었다. 로마서 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또 구원은 사람의 본래의 영광스런 상태로의 회복이다. 성경은 그것을 예언한다. 그것은 사도행전 3:21에 기록된 ‘만유를 회복하실 때’이며 요한계시록 21:1에 예언된 ‘새 하늘과 새 땅’이며 21:5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세상의 큰 변화이다.

 

본장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죗값은 크고 무섭다(7, 16절).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이시다. 그는 죄에 대해 고생과 파멸, 몸의 죽음과 영원한 지옥으로 벌하신다(계 21: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의 대가를 치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둘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구원받은 자는 다시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죄가 없는 인격과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며 섭리의 목표이다. 구원은 죄사함이며 신앙생활의 일차적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자. 21절,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빌립보서 3:8,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의만 의지하고 감사하며 찬송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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