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척 없이 땅을 적시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땅바닥에 깔리는 무색(無色) 몸짓,
어디엔가 쓸어 담으려 해도 담아지지 않는.
오늘처럼 겨울비 쓸쓸히 뿌리는 날은
지난 늦가을 바람 산산히 부는 해거름
우연히 올라가
가랑가랑 소리 내며 이리저리 구르는 가랑잎들과 함께
한참 서성이다 내려온 홍성 고산사(高山寺)에 다시 올라볼까,
내려오는 길에 걸음 멈추게 한 노인,
들릴까 말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지옥에서 방금 걸어 나온 듯 얼굴 캄캄하고
살갗이 주름이던, 주름 속에 눈이 박혀 있던
노인의 머리 위에 환히 올려졌던 저녁 해!
고산사, 맑게 날아가는 조그만 조선 초기 법당 속
별로 잘 생기기 않은 부처와 함께 군불 때며
시자 없이 주지 혼자 덤덤히 사는 곳,
우연인 듯 올라가
그와 눈인사 나누고 요사채 마루에 걸터앉아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계속 중얼거리는
어디에고 쓸어 담으려 해도 담아지지 않는
겨울 빗소리 한참 듣다,
이런 생각이나 하려 여기 오진 않았지?
하며 슬그머니 일어나 내려올까.
내려오는 길에 걸음 멈추고
그 캄캄한 광채(光彩) 노인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저녁 해마저 벗겨버린 빗소리 속에
두 눈 깊게 타고 있을.
시집 <겨울밤 0시 5분> 문지. 2015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피와 이별하고 셀리와 사랑하고 있다/박연희 (0) | 2021.02.18 |
---|---|
늙은 난 - 강성관 (0) | 2021.02.13 |
[알파레이디 문화톡톡]시인 문정희 '삶 속의 시, 시 속의 삶' ② (0) | 2018.05.20 |
시인 문정희 '삶 속의 시, 시 속의 삶' ① (0) | 2018.05.18 |
지금 몇 시 1부: 이성복 시인의 나는 저 아이들이 좋다 (0) | 2018.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