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 릴케, '두이노의 비가' 中
은희경의 아홉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그녀는 '한가지의 고독을 이겨냈다'는 말로, 또 하나의 소설을 완성한 소감을 전한다. 수록된 단편 모두 개성과 색깔이 뚜렷하지만, 비루하고 초라한 삶들을 조용하게 연민하며 공감의 시선을 보내는 점과 특유의 경쾌한 문체는 한결같다.
2006년 황순원문학상 최종후보작이었던 표제작을 비롯하여 한편 한편 공들여 쓴 중단편 총 6편이 수록되었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포함한 가족관계 속에서 삶과 정체를 탐구했던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현대의 고독하고도 분열적인 인물을 다루고, 그 소소한 일상의 국면에서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인 상황에 주목하는 그녀의 섬세한 시선과 서사가 빛을 발하는 소설집이다.
1959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했고 전주여고를 거쳐 숙명여대 국문과와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근무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과 내면적 상처에 관심을 쏟는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여 젊은 작가군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등단 3년만인 1998년에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 수상하면서 소설가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30대 중반의 어느 날, `이렇게 살다 내 인생 끝나고 말지` 하는 생각에 노트북 컴퓨터 하나 달랑 챙겨 들고 지방에 내려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은희경의 인생을 바꿨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자, 산사에 틀어박혀 두 달 만에 을 썼다. 이 작품이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하면서 필명을 날리게 되었다. 한 해에 신춘문예 당선과 문학상 수상을 동시에 한 작가는 1979년 이문열, 1987년 장정일 이후 처음이었다. 또한 1997년에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로 제10회 동서문학상을, 1998년에 단편소설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 2000년에 단편소설 『내가 살았던 집』으로 제26회 한국소설문학상을 수...

인생은 반복되나 봐. 한 번 치인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어른이 되어서도 늘 비슷한 일들이 닥쳐오거든. 그때마다 어린 시절 학습된 대로 반응하게 되고, 결과는 똑같아.
의심을 찬양함
고독의 발견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날씨와 생활
지도 중독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해설ㅣ신형철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 지면
밥알은 달게 씹혀 목구멍 안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내 몸이 미칠 듯이 환호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장이 춤추듯 꿈틀거렸으며 뱃속이 흐뭇할 만큼 따뜻해졌다. 자, 네가 그토록 원하는 탄수화물이다. 숟가락질이 점점 빨라졌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국밥을 퍼먹고 있었다. 굶주린 자식을 먹이는 아비의 마음을 넘어 고통받아온 몸을 구원하는 메씨아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자포자기, 그리고 자기 파괴적이며 충동적인 악의가 팔에 속도를 붙였다. 잔칫집의 초대받지 않은 식객답게 입가로 국물까지 흘리면서 나는 탐욕스러운 속도로 순식간에 국밥 그릇을 깡그리 비우고 말았다. 국물까지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자 마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상복 여인이 다가와 말했다.--- p.111
2006년 황순원문학상 최종후보작이던 표제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서는 서른다섯번째 생일날, 가족을 버린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는 전작이었던 장편 『비밀과 거짓말』이나 소설집 『상속』의 표제작에서 은희경이 바라보던 ‘가족’과 ‘아버지’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어릴 적 아버지와 만나던 이태리 식당에 걸려 있던 보띠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잊을 수 없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는 뚱뚱한 모습만을 보였고, 이제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은 아버지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매일 먹는 밥을 거부하는 다이어트란 결국 인간의 문명화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주인공은, 끝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달라진 모습으로 빈소를 찾고, 아버지는 「비너스의 탄생」을 유품으로 남긴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자신을 거부하는 현실에서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 음식에 대한 거부와 연결된다.
또한 이번 소설집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현실과 환상의 긴장과 착종이다. 서사를 따라 충실하게 읽다보면 소설 속에서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적 현실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예술은 사람들이 사고하는 일정한 패턴을 배반함으로써 긴장을 만들어”(「의심을 찬양함」)내듯이, 하나의 허구(소설) 안에 허구적인 설정이 겹겹으로 등장한다. 바깥의 허구(소설 속의 현실)보다 더 허구적이고 황당한 상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소설 속 삶과 현실은 오롯하게 다른 차원의 삶으로 열리며 진정성을 얻는다. 겹겹의 허구 속에서 한 차원 다른 생의 진실을 만날 수 있다.
「고독의 발견」에서 거짓말도 못하고 별볼일도 없는 만년고시생 주인공 K는 생일날...

'리라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을 찾아서/신경림 (0) | 2010.02.03 |
---|---|
은희경 소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읽고 *리라* (0) | 2010.02.02 |
리라가 읽은 인상적인 독후감 주홍글씨/나다니엘 호돈 (0) | 2010.02.02 |
주홍글씨/나다니엘 호오도온(Nathaniel Hawthorne)의 장편소설 (0) | 2010.02.02 |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리라* (0) | 2010.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