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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친근한 소용돌이/문성해 시집

헤븐드림 2013. 12. 29. 00:45
시집 <자라>의 저자, 문성해 두 번째 시집. 주변의 작고 소박한, 아주 소소한 일상에 시선을 깊이 드리우고 이를 시로 표현해 총 3부로 나누어 담았다. 2부에서는 시인의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품인 <귀로 듣는 눈>이 포함되어 있다. 

어지럽고 복잡하고 징글징글한 세상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읊조리는 듯 착하고 넉넉한 여인네의 마음씨로 다 품고 풀어내고 있는 듯하면서도, 삶에 있어 누구보다 강인한 근성과 투지를 지니고 있는 건강함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은이 | 문성해 
1963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매일신문과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자라』가 있다.

문성해 시인 제 3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 중 시 세편 

                     

첫사랑

(문성해)

 

 

마당에서 비눗물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애의 퉁퉁 분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점심 전이었고

삼촌 방에선 정오를 알리는 라디오소리가 흘러나오고

담장 밖 돼지우리에선 산달을 앞둔 커다란 몸이 뒤척이는 소리

아무래도 흘러나오는 것이 유독 많았던 그날

내 몸에선 비릿한 초경과 함께 울음이 흘러나왔고

학교에서 나를 데리고 온 그애 곁에서 문득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고 있었고

이북 방송을 다시 듣기 시작한 삼촌이

먼 길 가는 기러기 행렬을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안방에서 자고 있는 막냇동생처럼 조용했지만

내 안의 피가 몽땅 흘러나가고 남모를 피로 조용히 바꾸어진 그날 저녁

나는 기르던 토끼를

태연히 식구들과 둘러앉아 먹을 수가 있게 되었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핏빛 노을이 떠내려가는 수챗구멍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날부터였을 거다

내 몸이 둥실둥실 보름달처럼 부풀기 시작한 것은

 

 

 

 

 

                     

듀공 

 

 

이불 속에서

당신과 나의 멸종을 생각하는 아침

먼먼 이국의 바다에서

그 덩치가 산만하고 소리가 귀신을 부른다는

듀공의 울음을 생각하는 아침

그이들이 침략자의 칼과 총이나

지구온난화에 따름 슬픈 멸종이 아니라

 

간밤

검은 소나기떼를 따라

칠흑빛 모란을 따라

구름을 따라

꽃향기를 따라

 

그 덩치가 코끼리 같고 소리가 사자 같다는 듀공이

흠흠 거리며 따라갔다면

깃털보다 가볍게 흘러갔다면

그건

아름다운 일이라고

 

그런 멸종이라면

나도 이 무거운 종을 벗어버리고

낙인 같은 발자국 거두고

 

하늬바람 따라

산그림자 따라

부슬비를 따라

 

 

 

                    

육필 원고

시인L에게

 

 

그저께는 잡지사에서 보내달라는 육필원고를

주머니에 꽂고 다니다 잃어버렸지요

낙엽들 사이를 헤집던 그날 밤

백지를 잘게 찢듯 눈이 내렸어요

눈을 안경에 맞고 숨결에 섞고 보니

그날 나는 시를 버린 게 아니라

시가 내게서 나간 것임을 알았어요

내가 하얀 종이 위에 지문을 묻히며 쓴 것들이

어느 음식점 밑에서 구정물에 젖다가

비루먹은 개나 쥐새끼 코끝을 간질이다가

퉁퉁 불다가

조용히 퍼지다가 마침내 찢어지니

나는 시를 잡지사가 아닌 공중으로 돌려보낸 거라는 거

그날 밤 까칠한 내 얼굴 위로

자꾸만 신발을 벗어놓던 그 눈발도

해진 주머니를 빠져나온

누군가의 졸시였단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 거였어요

 

 

 

**문성해: 경북 문경 출생. 1998년《매일신문》, 2003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자라』『아주 친근한 소용돌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