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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문성해
1963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매일신문과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자라』가 있다.
문성해 시인 제 3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 중 시 세편
첫사랑
(문성해)
마당에서 비눗물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애의 퉁퉁 분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점심 전이었고
삼촌 방에선 정오를 알리는 라디오소리가 흘러나오고
담장 밖 돼지우리에선 산달을 앞둔 커다란 몸이 뒤척이는 소리
아무래도 흘러나오는 것이 유독 많았던 그날
내 몸에선 비릿한 초경과 함께 울음이 흘러나왔고
학교에서 나를 데리고 온 그애 곁에서 문득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고 있었고
이북 방송을 다시 듣기 시작한 삼촌이
먼 길 가는 기러기 행렬을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안방에서 자고 있는 막냇동생처럼 조용했지만
내 안의 피가 몽땅 흘러나가고 남모를 피로 조용히 바꾸어진 그날 저녁
나는 기르던 토끼를
태연히 식구들과 둘러앉아 먹을 수가 있게 되었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핏빛 노을이 떠내려가는 수챗구멍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날부터였을 거다
내 몸이 둥실둥실 보름달처럼 부풀기 시작한 것은
듀공
이불 속에서
당신과 나의 멸종을 생각하는 아침
먼먼 이국의 바다에서
그 덩치가 산만하고 소리가 귀신을 부른다는
듀공의 울음을 생각하는 아침
그이들이 침략자의 칼과 총이나
지구온난화에 따름 슬픈 멸종이 아니라
간밤
검은 소나기떼를 따라
칠흑빛 모란을 따라
구름을 따라
꽃향기를 따라
그 덩치가 코끼리 같고 소리가 사자 같다는 듀공이
흠흠 거리며 따라갔다면
깃털보다 가볍게 흘러갔다면
그건
아름다운 일이라고
그런 멸종이라면
나도 이 무거운 종을 벗어버리고
낙인 같은 발자국 거두고
하늬바람 따라
산그림자 따라
부슬비를 따라
육필 원고
시인L에게
그저께는 잡지사에서 보내달라는 육필원고를
주머니에 꽂고 다니다 잃어버렸지요
낙엽들 사이를 헤집던 그날 밤
백지를 잘게 찢듯 눈이 내렸어요
눈을 안경에 맞고 숨결에 섞고 보니
그날 나는 시를 버린 게 아니라
시가 내게서 나간 것임을 알았어요
내가 하얀 종이 위에 지문을 묻히며 쓴 것들이
어느 음식점 밑에서 구정물에 젖다가
비루먹은 개나 쥐새끼 코끝을 간질이다가
퉁퉁 불다가
조용히 퍼지다가 마침내 찢어지니
나는 시를 잡지사가 아닌 공중으로 돌려보낸 거라는 거
그날 밤 까칠한 내 얼굴 위로
자꾸만 신발을 벗어놓던 그 눈발도
해진 주머니를 빠져나온
누군가의 졸시였단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 거였어요
**문성해: 경북 문경 출생. 1998년《매일신문》, 2003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자라』『아주 친근한 소용돌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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