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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친근한 소용돌이/문성해 시집

헤븐드림 2014. 9. 22. 21:31
시집 <자라>의 저자, 문성해 두 번째 시집. 주변의 작고 소박한, 아주 소소한 일상에 시선을 깊이 드리우고 이를 시로 표현해 총 3부로 나누어 담았다. 2부에서는 시인의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품인 <귀로 듣는 눈>이 포함되어 있다. 

어지럽고 복잡하고 징글징글한 세상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읊조리는 듯 착하고 넉넉한 여인네의 마음씨로 다 품고 풀어내고 있는 듯하면서도, 삶에 있어 누구보다 강인한 근성과 투지를 지니고 있는 건강함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은이 | 문성해 
    1963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매일신문과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자라』가 있다.

    문성해 시인 제 3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 중 시 세편 

                         

    첫사랑

    (문성해)

     

     

    마당에서 비눗물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애의 퉁퉁 분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점심 전이었고

    삼촌 방에선 정오를 알리는 라디오소리가 흘러나오고

    담장 밖 돼지우리에선 산달을 앞둔 커다란 몸이 뒤척이는 소리

    아무래도 흘러나오는 것이 유독 많았던 그날

    내 몸에선 비릿한 초경과 함께 울음이 흘러나왔고

    학교에서 나를 데리고 온 그애 곁에서 문득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고 있었고

    이북 방송을 다시 듣기 시작한 삼촌이

    먼 길 가는 기러기 행렬을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안방에서 자고 있는 막냇동생처럼 조용했지만

    내 안의 피가 몽땅 흘러나가고 남모를 피로 조용히 바꾸어진 그날 저녁

    나는 기르던 토끼를

    태연히 식구들과 둘러앉아 먹을 수가 있게 되었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핏빛 노을이 떠내려가는 수챗구멍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날부터였을 거다

    내 몸이 둥실둥실 보름달처럼 부풀기 시작한 것은

     

     

     

     

     

                         

    듀공 

     

     

    이불 속에서

    당신과 나의 멸종을 생각하는 아침

    먼먼 이국의 바다에서

    그 덩치가 산만하고 소리가 귀신을 부른다는

    듀공의 울음을 생각하는 아침

    그이들이 침략자의 칼과 총이나

    지구온난화에 따름 슬픈 멸종이 아니라

     

    간밤

    검은 소나기떼를 따라

    칠흑빛 모란을 따라

    구름을 따라

    꽃향기를 따라

     

    그 덩치가 코끼리 같고 소리가 사자 같다는 듀공이

    흠흠 거리며 따라갔다면

    깃털보다 가볍게 흘러갔다면

    그건

    아름다운 일이라고

     

    그런 멸종이라면

    나도 이 무거운 종을 벗어버리고

    낙인 같은 발자국 거두고

     

    하늬바람 따라

    산그림자 따라

    부슬비를 따라

     

     

     

                        

    육필 원고

    시인L에게

     

     

    그저께는 잡지사에서 보내달라는 육필원고를

    주머니에 꽂고 다니다 잃어버렸지요

    낙엽들 사이를 헤집던 그날 밤

    백지를 잘게 찢듯 눈이 내렸어요

    눈을 안경에 맞고 숨결에 섞고 보니

    그날 나는 시를 버린 게 아니라

    시가 내게서 나간 것임을 알았어요

    내가 하얀 종이 위에 지문을 묻히며 쓴 것들이

    어느 음식점 밑에서 구정물에 젖다가

    비루먹은 개나 쥐새끼 코끝을 간질이다가

    퉁퉁 불다가

    조용히 퍼지다가 마침내 찢어지니

    나는 시를 잡지사가 아닌 공중으로 돌려보낸 거라는 거

    그날 밤 까칠한 내 얼굴 위로

    자꾸만 신발을 벗어놓던 그 눈발도

    해진 주머니를 빠져나온

    누군가의 졸시였단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 거였어요

     

     

     

    **문성해: 경북 문경 출생. 1998년《매일신문》, 2003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자라』『아주 친근한 소용돌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