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새로운 신의 등장을 기다리는가 / 박종형

헤븐드림 2023. 3. 31. 05:42

 

   명색이 주간신문의 칼럼니스트인 필자가 자식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할라치면 세상 돌아가는 실정에 대한 예리한 이해나 평가에 있어 뒤짐을 실감한다.
   어느 날 전문경영자인 아들이 최근에 재미있게 읽었다면서 ‘사피엔스’라는 화제작을 주고 갔는데 다른 날 문안을 온 대학교수인 둘째 아들도 그 책을 읽었다면서 그 후속 책처럼 나온 화제작이 ‘호모데우스 Homo Deus’라고 소개했다. 시대 패러다임이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데우스로 변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놀란 것은, 인간이 신의 영역이 허물리고 신의 역할이 무력해짐으로써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하는 것도 모자라 ‘새로운 신 데우스’의 등장을 믿고 고대한다는 시대적 사조의 풍미였다. 이른바 니체가 기독교 전통과 가치를 쇠망치로 박살을 내고 대신에 등장시킨 「초인 超人」 이라는 새로운 가치(신)를 믿고 숭배한다는 변화다.
   그러한 신의 존재 부정과 바알신의 숭배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복지로의 엑소더스 과정에서도 일어났었다. 이집트의 종살이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느님이 모세를 앞세워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심을 알면서도 잠깐의 굶주림이나 고생을 참지 못하고 배신하여 우상인 바알 신을 섬김으로써 여호와 하느님의 진노를 사 결국 40년 동안 역경의 광야를 헤매고 나서야 정착할 수 있었다.


   지금 가치 혼란의 와중에 니체의 쇠망치를 든 새로운 신 호모 데우스의 출현을 고대하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 새로운 신은 어떤 신인가.
   본시 호모 사피엔스는 ‘큰소리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종種으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 인간들이 이념 뼈다귀를 차지하려고 전쟁을 일으키고, 환경을 파괴해 지구를 병들게 만들고, 인간을 갈등과 다툼으로 대립하게 만들고, 물질만능과 과소비와 사치로 자원을 고갈시키고 빈부격차의 심화로 계층 간 대립을 조장하는 등 니체의 쇠망치질을 불감청고소원 거리로 만들었다. 인간은 변함없이 구세주의 출현을 고대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는 구세주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다.
   한데 기다리는데 지친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적 가치관의 비현실성이나 무력함 때문에 시달리는 회의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인가. 초인의 등장을 낯설어했던 게 점차 바뀌어 익숙해졌다. 현대인 삶에 익숙한 존재로 등장한 데우스(프랑스어로 신 의미)는 필수품 만물을 공급하는 시장이며 경제이고 과학이고 정치다. 신의 계명과 율법을 대체한 새로운 규율과 규제인 것이다. 변화에 대한 갈망이 낳은 새로운 가치, 신인 것이다.
   호모 데우스가 니체의 쇠망치로 깨부수지 못한 가치를 과연 대체할 수 있을 건가는 미지수다. 인류역사는 그런 망치질로 깨부순 가치와 새로운 신을 등장시키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신을 부정하는 망치질을 자행한 장본인도 인간이며 제멋대로 데우스를 등장시킨 장본인도 인간이었다. 신은 회의하면서도 인간이 세우려는 새로운 신 데우스는 믿으려는 것이다. 반대자의 목숨까지 빼앗으며 맹신한 공산주의 사상의 아성이 무참히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데우스의 옹립자들은 기세등등하다.
   한데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는 어떤 철학자였던가.
   그는 25세 약관에 라이프치히대학의 교수가 될 정도로 수재였지만 그의 삶은 불행했으니, 44세에 정신착란을 일으켜 무려 12년간이나 혼수상태에 빠져 식물인간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의 명저로 알려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일 년에 겨우 60부가 팔려 그가 너무나 실망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는 과연 쇠망치로 기독교적 가치를 깨부술 만큼 높은 지성과 냉철한 이성, 그리고 기독교적 가치를 재단할 만한 가치관을 소유했었을까 의심치 않을 수 없다. 망치를 휘두르다 억지춘향으로 신의 존재를 부순 것은 아닌가.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당시도 신의 존재와 역할을 회의하고 비판적으로 도전하는 게 세인의 이목을 끄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음악가로 명성을 얻고 성공하려면 반드시 궁정음악회나 무도회 같은 귀족 사교모임에 데뷔해야 했듯이 그도 망치를 들고 문제가 적지 않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공격한 것은 아닌가.
   그런 도전이 낳은 「초인」이라는 신에서 뻗친 맥리를 따라 21세기 패러다임의 와중에 「호모 데우스」가 등장하려는 것이 아닌가.
   충격인 것은 왜 현대인은 무엇이 불안하고 궁금하여 자꾸 신의 영역을 들여다보려 하고 기회만 있으면 놀라운 은총을 빌어 그 영역으로 틈입하려 하는가 하는 풍조의 만연이다. 더구나 신의 역할이나 권세가 약화되었다거나 의심하여 비이성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니체의 초인 같은 거대한 새 가치, 예컨대 천상세계 대신에 지상의 대지나, 가치를 이행시킨 거대한 시장 같은 것을 데우스로 섬기자 하는 것이다.
   일본의 성문화는 새로운 가치 그 어느 것으로도 이해와 평가를 할 수 없다. 대강당에 수백 명 청춘남녀가 줄지어 들어와 반듯하게 열짓고 짝지어 서서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 발가벗고 입과 유방 그리고 성기를 애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 여러 가지 체위로 성교를 하는데 그 방법이 딱 포르노와 유사하다. 온 실내에 여성들의 쾌감으로 몸부림치며 지르는 신음소리가 가득하다. 그 장면은 관음의 경지를 뛰어넘는 엄숙한 집단의식 같은 느낌마저 준다. 저들의 신은 사피엔스도 데우스도 아닐 것이다.
   대체 저들이 믿는 신은 어떤 신일까. 혹시 저들만의 신을 고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에 대한 회의와 사통해 낳는 데우스의 등장은 끊임이 없고 하느님에 대한 기도 소리 또한 끊임이 없다. 진정 현대는 새로운 신의 등장을 고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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