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모세(신34:1-12)
모세는 구약성경 최대의 인물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지도자요, 입법자요, 선지자였다. 모세 오경을 저술했고,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 등의 율법을 부여 받아 이를 이스라엘의 법령으로 제정, 궁극적으로 선민 국가의 기틀을 수립, 발전시킴. 한마디로 모세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일으킨 국부(國父)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모세의 생을 한 두 시간으로 간단히 소개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이 시간 그의 생을 세 단계로 구분하여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모세는 대략 B.C.1527년 출생하여 B.C.1406년 12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본다. 그의 생은 40년 단위로 크게 세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1. 애굽 왕자 모세
애굽의 총리대신이었던 요셉의 후광으로 인해 애굽으로 이주하여 환대받던 야곱의 후손들은, 요셉의 사망 후 얼마의 세월이 지난 뒤부터는 오히려 바로 왕의 억압을 받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급속히 인구가 늘어가자, 애굽의 바로왕은 위협을 느끼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박해와 견제 가운데 노예 민족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심지어 바로 왕은 이스라엘인들의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는 극단적 정책을 시행하기도 한다. 이때에 모세가 태어나게 된다.
모세는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모세는 레위지파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리암은 누나였고 아론은 세살 위 형이었다.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기가 자라자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갈대로 만든 상자 속에 아기를 넣어 나일 강 기슭의 갈대밭에 놓아두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목욕나온 바로 왕의 딸에게 발견되어 양자로 자라게 되었다.
모세는 ‘(물에서) 구원하여 낸다’는 뜻과 함께, 이집트어의 ‘Mes’에서 비롯된 말로 ‘아들’이라는 뜻도 있다. 애굽왕 바로의 딸 핫셉수트의 양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미리암의 기지로, 모세는 생모 요게벳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된다. 아마 이대 그 부모는 모세를 신앙 가운데서 지극정성으로 키웠을 것이다. 비록 공주의 양자이기는 하지만, 모세 자신이 누구인지,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백성인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세는 엄마의 품에서 자라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또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젖을 뗀 후엔 왕궁에 들어가 애굽 왕자의 교육을 받게된다. 35년 이상 애굽 왕궁에서의 생활과 교육은 후일 민족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애굽에서 출애굽하기 위해서는 애굽을 알아야 한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서 자라나 애굽에 가서 바로와 맞섰다면, 애굽의 그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이나 문화에 압도되어 자기 소신껏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의 궁중에서 왕자로 자랐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바로왕 앞에 서서 자신있게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사역을 맡기실 때, 그 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시고 준비시키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양육방법이요 훈련방법이다.
이윽고 모세에게는 자기의 과거를 청산해야 할 시기가 닥쳐왔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11:24-27)”
모세는 바로 왕의 딸의 양자로서 애굽에서 영화를 누리면서 일생을 보낼 것인지, 애굽의 학정에서 신음하고 있는 동족을 구출해야 할 것이지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모세가 40세쯤 되던 어느날 이스라엘 동족을 때리는 애굽인을 보고 쳐 죽인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동족을 애굽인의 학대에서 구출하려는 의욕에 불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기 힘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그대로 쓰실 수 없었다. 그에게는 연단이 필요했다.
2. 미디안 목자 모세
모세는 애굽을 탈출해 미디안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매일 반복되는 광야에서의 생활은 공허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절이야말로 모세에게는 중요한 준비기간이었다. 세속의 교육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교육은 인간을 공허하게 만든다. 40년동안의 평범한 목자생활은 애굽 왕자로서의 자만심을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모세는 스스로 초라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공허하지 않은 그릇은 쓰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에 모세를 당신의 종으로 개조하고 계셨던 것이다. 연약한 양떼를 키우려면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성급하고 완력을 쓰기 좋아하던 모세도 양떼와 함께 천천히 걷는 것을 배워야만 했고, 어린 양새끼를 부드럽게 보듬는 법을 체득해야만 했다. 갈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헤매는 양떼를, 물가로 풀이 있는 곳으로 자상하게 몰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은 그가 후년에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데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다. 모세가 누구보다도 온유했던 것은 이 목자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 배웠을 것이다. 쓸쓸하고 공허한 사막의 생활이야말로 모세에게 가장 필요한 준비 기간이었다.
모세는 어느새 80세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 끝나버릴 것 같은 어느날,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신다. 시편 90편에 보면, 모세는 절대자 앞에서 자기의 연약하고 허망함을 절실히 느끼고 ‘아침에 돋아난 풀’에 비유했다. 그는 하나님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그의 준비 기간은 이제 끝났다. 겸손한 사람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한 사람 중에 모세만큼 힘든 사역을 감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정만 60만 명이었으므로 여자와 어린아이, 연장자까지 합친다면 족히 200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이 군중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큰일을 감당하기 위한 정신력과 신앙심, 추진력은 거의 초인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지도력을 갖추는데 40년, 아니 80년이 필요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에 대해 조급한 마음을 갖기보다, 준비된 사람으로 자신을 가꾸는데 더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얼마나 일을 많이 하느냐보다, 누구 편에 서서 어떤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은혜를 많이 받는 것도 귀하지만, 하나님이 쓰시기에 불편하지 아니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중요하다.
3.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모세에게 애굽에서 시달리는 당신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내세워 지상에서 ‘만유를 회복’하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큰 종으로 쓰시기 위해 키우는데 80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모세의 자아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깨어져 버렸다. 자신감과 자만심으로 혈기왕성하던 모세가 아니라, 이제 80세가 넘은 노인으로 부름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종에게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2)” 하고 약속하시고 종에게 권능을 주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뜻밖의 사명을 받고 자기의 무능을 절감한 나머지 망설이던 모세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과 증거에 용기를 얻어 담대하게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에게 나아간다. 당시에 세계 최대 강국인 애굽의 왕 바로의 권세는 대단했다. 바로는 애굽 국민들이 태양신의 아들로 믿고 신처럼 경배했으며, 바로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가 최고의 맹세였다. 애굽은 바로 때문에 존재하고, 국민은 그를 위해 살고, 나일강은 그를 위해 흐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최고의 권력자 앞에 일개 도망자인 모세가 불쑥 나타나, 현재 혹사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게 해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바로가 퉁명스럽게 대꾸한 것은 당연했다. 이것은 실로 무모한 요구였다. 모세가 처음에 이 사명을 받아들이기를 망설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힘을 의지하고 간 것이 아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하고 갔던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재앙이 아홉 번이나 바로와 애굽에 내렸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졌다. 드디어 열 번째 재앙이 내려졌다. 죽음 앞에서 바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게 되었다.
그러나 출애굽의 감동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따라 언동을 취했다. 그리하여 홍해가 가로막고 애굽 군대가 그들을 추격해 올 때,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광야에서 쓴 물을 마시게 되었을 때 불평하고, 곤경에 처하면 하나님을 거역했다. 그들은 다만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축복만을 반가워했다.
하지만 모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을 믿었다. 그의 영안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역경에서도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애굽의 군대는 홍해가 삼켜버렸고, 므리바의 쓴물은 단물이 되었고, 40년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셨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앙인에게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모세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역사하고 계신다.
모세의 성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온유함이다.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민12:3)고 하였다. 그러나 모세의 성품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고 시체를 유기했던 성급하고 난폭하기까지 했던 사람이다. 십계명 돌판을 받아왔을 때, 백성의 패역함을 보고 던져 깨어버리기도 했고, 그 자리에서 레위 자손에게 명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된’ 자들을 동족 가운데서 3000명이나 살육하였다. 물론 동족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과격하고 불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이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가라하시나이까(민11:12).” 모세는 때로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고 짜증스럽게 불평하기도 했다. 오죽 답답하고 힘들었으면 그랬겠는가마는, 하여튼 모세는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가지고 오는 자질보다, 살아가면서 갖추어지는 후천적인 자질이 훨씬 더 지배적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택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세상 누구보다도 온유한 성품으로 자신을 가꾸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모세가 지도자로서 갖고 있었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충성심이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이 충성심에서, 인내와 순종과 열정 같은 모세의 지도력이 나왔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 40주야를 금식한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날을 기다리지를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시조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때 모세가 뭐라고 말하는가? “하나님,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저들을 다 죽이시면, 애굽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하하하!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다 죽이려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구나! 하나님, 어리석은 이 백성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리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장).”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고 했다.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이 지워져도 좋으니 백성만은 살려달라고 중보기도했다.
모세의 인내와 순종과 열정은 생사를 뛰어넘는, 목숨을 건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모세는 구약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가장 잘 예표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로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40년 동안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눈으로 보고서도 조금만 어려움을 당하면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으며, 때로는 돌로 영도자 모세를 치려고까지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광야에서 모래바람에 스러져갔다. 모세는 40년 동안 무지몽매한 동족을 이끌고 광야를 헤매며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직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그 오랜시간을 충성된 마음으로 묵묵히 참고 견디어 왔다.
그러던 어느날,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약속의 땅에 모세 자신은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자기를 선민의 영도자로 삼으시고, 언제나 자기와 같이 하시면서 가르쳐 주시고 격려해 주시던 하나님께서, 자기더러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은 뜻밖의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모세는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아찔했을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 엎드려 하나님께 번의를 간구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되풀이하여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며 이 일로 다시 간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신3:26). 이때의 모세의 비통한 심정은 모세 밖에는 잘 모를 것이다.
결국 모세는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가나안 온 땅을 바라다만 보았을 뿐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결정적인 까닭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광야 가데스 므리바에서 목이 말라 아우성칠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므리바의 반석을 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고,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자기를 앞세웠다. 여기서 우리란 모세 자신과 형 아론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큰 실책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그 종이 할 일의 전부일진데 오히려 영광을 가리고, ‘우리가’ 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자기 것인 양 백성들에게 내세웠기 때문이다.
나를 내세우면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진다. 이것은 특히 하나님의 종이 경계해야 하는 일이다. 이처럼 모세에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40년간이나 이끈 큰 공적이 있다 할지라도, 죄에 대해서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이것은 결국 모세로 대표되는 구약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역으로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신약 복음만이 완전한 것을 예표해 준다. 신약 시대의 오늘날 성도된 우리가 오직 무흠 무죄한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하여 값없이 구원함을 얻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모세는 역시 위대했다. 그는 기도의 제목을 달리하여,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27:16-17)” 하고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새 지도자로 세우라고 지시하셨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성업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모세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일꾼으로 좋은 모범을 보인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모든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허락이지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주어지는 환경과 주어지는 사역의 과정에 대해 충성할 뿐이다. 모세가 스스로 계획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모세의 생애 전체를 볼 때 그의 개인 인격 자체가 고매하여서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또 그는 주안에서 오랜 연단과 경륜을 쌓으면서 계속 그 신앙 인격이 성숙되어 갔으나 결코 완전에 이른 것도 아니었다. 이는 한번 성도된 자라 하여도 땅에 있는 동안 계속하여 더욱 진전되는 성화를 통하여 신앙 인격을 성숙시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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