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보헤미아(현 체코) 지방의 작곡가. 스메타나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클래식 작곡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며, 소위 '국민악파' 라고 불리는 19세기 중후반 민족주의 악파의 거두이기도 하다. 다만 그의 생전에 체코라는 나라는 존재한 적이 없다.[1]
성씨에 들어가는 R에 diacritic이 붙어 있는데, 굉장히 기괴한 발음으로 대충 설명하자면, /r/(치경 전동음, 스페인어의 rr)과 /ʒ/(유성 후치경 마찰음, 영어 pleasure의 s)을 동시에 발음하는 느낌이다. 한글로는 어쩔 수 없이 ㄹ와 ㅈ[2]를 나눠서 표기하지만 체코어에서는 동시에 발음한다는 소리(...) řá를 정확하게 표시 안하고 diacritic을 뺀 ra로 써버리면 누가봐도 드보락[3] 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는 표기이다. 자세한 내막은 치경음 항목 참조.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체코어 표기법에 따라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표준이지만 그 이전에 쓰였던 안토닌 드보르작이라는 표기도 아직 많이 쓰인다.
2. 생애[편집]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던 프라하 근교의 시골 마을인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인 프란티셰크 드보르자크는 도축업이 본업이기는 했지만 치터를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가업을 잇게 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아들 안토닌도 도축업 시험을 무난하게 통과했다. 클래식 작곡가들 중 유일한 도축업 자격증 보유자이다.(…)
하지만 결국 안토닌은 음악을 본업으로 택했고, 1857년에 연주 실기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해 바이올린과 비올라, 오르간 연주법을 배웠다. 동시에 작곡도 시작했고, 졸업 한 지 2년 뒤인 스무 살에 첫 현악 4중주를 작곡했다.
1860년대 중반에는 갓 설립된 프라하 국민극장의 부속 관현악단에서 비올라 단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지휘자로 일하고 있던 대선배인 스메타나로부터 작곡 활동을 본격적으로 해보라고 권유를 받기도 했다. 실제로 드보르자크는 이 시기에 두 곡의 교향곡을 쓰는 등 창작 쪽에서도 분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극장에서 주는 월급은 집세 내기도 빠듯했고, 비올라 연주 외에도 생계 유지를 위해 중상류층 자제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나가야 할 정도로 현시창인 상태였다.
1873년에 결혼한 뒤 박봉과 격무에 허덕였던 극장 악단 연주자 생활을 청산하고 프라하의 한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했는데, 여전히 살림살이는 어려운 상태였지만 그나마 봉급은 약간 더 후한 편이었고 매일같은 연주 활동도 없어서 작곡할 시간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주어졌다. 실제로 드보르자크의 작품들 중 중요한 초기작들은 대부분 이 해를 전후해 쓰이기 시작했다.
1877년에는 당시 유럽에서 날리던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를 만나게 되었는데, 한슬리크는 당시 젖뉴비에 불과했던 자신이 쓴 음악을 당대 본좌였던 요하네스 브람스가 은근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슬리크의 중개로 드보르자크는 브람스를 직접 만났고, 브람스는 후배를 대단히 환대하면서 계속 작곡 활동을 할 것을 종용했다. 심지어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출판사 중 하나였던 짐로크 출판사와 전속 계약을 맺도록 주선까지 해줬다.
이듬해인 1878년에 바로 짐로크를 통해 피아노 3중주 제1번, 현악 4중주 제2번, 현악 합주를 위한 세레나데, 교향곡 제5번 네 작품이 출판되었고, 반응은 상당히 좋았다. 1880년에는 종교음악 분야에서 처음 나온 걸출한 대작인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가 초연되었고, 약 3년 뒤인 1883년에는 런던에서 공연되어 절찬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직접 영국을 방문해 연주 여행을 할 정도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890년에는 러시아에 가서 차이콥스키를 직접 만나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다. 1891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프라하 음악원에서는 작곡과 악기론 정교수 직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870년대 후반 부터 전속으로 있던 짐로크 출판사와는 관계가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인세 수입 등의 교섭이 자주 무산되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체코인임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던 드보르자크의 이름을 자꾸 독일어식으로 악보에 기입하여 드보르자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짐로크에서 출판된 초판본 악보들 대다수가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아닌 '안톤 드보라크(Anton Dvorak)'라고 표기하고 있다.
1892년에는 미국의 뉴욕에 새로이 설립된 내셔널 음악원에 원장으로 부임했는데, 처음에는 고향을 떠나면 강한 향수병에 시달릴까봐 몇 차례 고사했다. 하지만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인 거액이었던 연봉 15000달러가 음악원 측에서 제시되고, 짐로크와의 관계가 끊겨 수입이 급감할 것을 걱정했는지 결국 초빙 요청을 수락하고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드보르자크는 음악원장에 부임한 뒤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하게 인종을 불문하고 모든 미국인 음악 전공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했고,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의 학생들도 물론 입학할 수 있었다. 한 예로 흑인 바리톤 가수 겸 작곡가인 해리 벌리(Harry Burleigh)는 당시 음악원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드보르자크는 이때 들어온 학생들로부터 흑인 영가나 원주민 민요 등의 미국 토착 전통음악을 전수받는 데 힘썼고, 이때의 경험은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4], 현악 4중주 제12번 '아메리카', 첼로 협주곡 등의 후기 대작들에 차례차례 반영되었다. 드보르자크는 흑인 영가나 아메리카 원주민 민요야말로 진정한 미국의 음악이라 극찬했고 미국 작곡가들은 그들의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보르자크의 발언처럼 현대 미국 대중음악의 대부분은 흑인 음악이 원류라고 할 수 있는데, 록과 메탈 등은 원류가 블루스, 힙합도 결국엔 흑인 음악이 원조이다. 재즈나 블루스는 말할 것도 없다.
1895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는 영국 등에 연주 여행 가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고국 체코에 정주하면서 실내악과 교향시, 오페라 작곡에 주력했고, 1901년에는 탄생 60주년 기념식이 국가 행사로 성대하게 열리고 프라하 국립음악원 원장에 추대되는 등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도 했다.
1904년 초 건강 악화로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비소카의 별장에서 요양했는데, 잠시 병세가 호전되는 듯 했지만 결국 심장마비와 뇌졸중이 겹쳐 5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프라하의 비셰흐라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들[편집]
- 교향곡, 현악 4중주, 협주곡 등 절대음악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여러 편의 표제가 달린 연주회용 서곡, 5편의 교향시를 짓는 등 표제음악도 적지 않다.
- 체코 모음곡, 슬라브 춤곡 등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 많다.
- 교향곡 2번 B플랫 장조 (1865)
- 교향곡 3번 E플랫 장조 (1873)
- 교향곡 4번 D단조 (1874)
- 교향곡 5번 F장조 (1875)
- 교향곡 6번 D장조 (1880)
- 교향곡 7번 D단조 (1885)
- 교향곡 8번 G장조 (1889)
- 교향곡 9번 E단조 '신세계로부터' (1893)
- 비극적 서곡 (1870)
- 연주회 서곡 F단조 (1871)
- 교향시 F단조 (1874)
- 교향 변주곡 (1877)
- 3개의 슬라브 광시곡 (1878)
- 체코 모음곡 D장조 (1879)
- 축전 행진곡 (1879)
- 프라하 왈츠 (1879)
- 폴로네즈 E플랫 장조 (1879)
- 프라하 학생들을 위한 폴카 (1880)
- 갈롭 E장조 (1881)
- 나의 집 서곡(1882)
- 스케르초 카프리치오소 (1883)
- 후스교도 서곡 (1883)
- 자연 속에서 서곡 (1891)
- 사육제 서곡 (1891)
- 오텔로 서곡(1892)
- 교향시 '물의 정령' (1896)
- 교향시 '한낮의 마녀' (1896)
- 교향시 '황금 물레' (1896)
- 교향시 '산비둘기' (1896)
- 교향시 '영웅의 노래' (1897)
- 현악을 위한 세레나데 E장조 (1875)[5]
- 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1878)
- 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한 녹턴 B장조 (1875)
- 피아노 협주곡 G단조 (1876)[6]
- 바이올린 협주곡 A단조 (1879, 1880년과 1882년 두 차례 개정)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마주레크 E단조(1879)
- 첼로 협주곡 A장조 (1865)
- 첼로 협주곡 B단조 (1894~95
- 현악 5중주 1번 A단조 (1861)
- 현악 4중주 1번 A장조 (1862)
- 현악 4중주 2번 B플랫 장조 (1869)
- 현악 4중주 3번 D장조 (1869-70)
- 현악 4중주 4번 E단조 (1870)
- 피아노 5중주 1번 A장조 (1872)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F단조 (1873-77. 1877년 바이올린과 관현악용 편곡)
- 현악 4중주 5번 F단조 (1873)
- 현악 4중주 6번 A단조 (1873)
- 현악 4중주를 위한 안단테 아파시오나토 F장조(1873)
- 현악 4중주 7번 A단조 (1874)
- 현악 5중주 2번 G장조 (1875)
- 피아노 4중주 1번 D장조 (1875)
- 피아노 3중주 1번 B플랫 장조 (1875)
- 현악 4중주 8번 E장조 (1876)
- 피아노 3중주 2번 G단조 (1876)
- 현악 4중주 9번 D단조 (1877)
- 현악 6중주 A장조(1878)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카프리치오 (1878)
- 현악 4중주 10번 E플랫 장조 '슬라브' (1878-79)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폴로네즈 A장조 (1879)
- 바이올린 소나타 F장조 (1880)
- 현악 4중주 11번 C장조 (1881)
- 피아노 3중주 3번 F단조 (1883)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발라드 D단조(1884)
- 단악장 현악 4중주 F장조 (1885)
- 피아노 5중주 2번 A장조 (1887)[7]
-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3중주 C장조 (1887)
-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미니어처 (1887)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4개의 낭만적 소품 (1887)[8]
- 피아노 4중주 2번 E플랫 장조 (1889)
- 피아노 3중주 4번 E단조 '둠키(Dumky)' (1890-91)
- 세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가보트 (1890)
- 4대의 트럼펫과 팀파니를 위한 팡파르 (1891)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론도 G단조 (1891)
- 현악 4중주 12번 F장조 '아메리칸' [9] (1893)
- 바이올린 소나티나 G장조 (1893)
- 현악 5중주 3번 E플랫 장조 “아메리칸” (1893)
- 현악 4중주 13번 G장조 (1895)
- 현악 4중주 14번 A플랫 장조 (1895)3.6. 피아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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